Ⅱ.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엡2:8~9) “믿음으로 말미암아”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들을 받는 수단임을 보여 준다. 만약 죄인이 “구원 받기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 해답은 “당신이 하는 어떤 것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당신은 그저 믿음 안에서 그것을 받기만 하면 된다” 이다. 사도행전16:30~31을 보라.
구원이 은혜를 인한 것이므로, 인간이 하는 어떤 행위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이것은 바로 은혜의 그 본질과 반대된다. 구원이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11:6) 구원은 삯으로 지불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다.(롬4:4~5을 보라)
이것이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오는 이유이다. 믿음은 수행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태도이며, 마음의 상태이며, 마음의 의향이다. 그것은 순종적인 것이며, 수용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은혜와 일치 한다.
그래서 믿음은 구원을 전유(專有) 하는 수단이다. 일부 사람들은 그렇게 부서지기 쉬운 것이 어떻게 그러한 능력이 있을 수 있나 하고 의아해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능력은 믿음 그 자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믿음의 대상, 즉 전능하신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에다 믿음을 두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에다 믿음을 두어서는 안 된다.(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과 그 분의 능력과 그분의 약속들 안에 있다. 이것이 은혜로 인한 구원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존재할 수 있는 이유이다. 믿음은 단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말씀하실 때 우리는 그것을 믿는다. 이것은 믿음이 특유한 것임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많은 것들을 성경에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진술을 하시면, 우리는 그것이 참되다는 것을 믿는다. 이것을 인정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어떤 진술을 하시면 우리는 그분이 그것을 지킬 수 있고 지키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이것을 신뢰라고 부른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은혜에 근거한다. 로마서4:16~25을 보라. 우리는 은혜와 믿음 사이의 그 자연스런 조화를 깨뜨리지 않도록, 믿음의 정의에다 행위를 포함시키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바울 사도는 구원에 관한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서, 믿음과 행위를 서로 대치시킴으로 그것의 부당함을 보여준다.(“믿음으로 말미암아‥‥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엡2:8~9) 행위를 믿음의 일부로 만드는 것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전체적 개념을 무시하는 것이다.
또한 구원을 은혜의 선물들의 하나로 만듦으로 믿음의 자유 의지적 특성을 파괴하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울 사도는 은혜를 하나님의 선물로, 믿음을 인간의 응답으로 분명히 구분 짓고 있다.(“은혜를 인하여‥‥‥믿음으로 말미암아”엡2:8) 요한복음6:28~29에서 믿음을 “행위”라고 부르심으로 믿음이 인간 자신의 결정임을 보여 주신다.(“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가장 일반적 의미로) 예수님은 믿음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일”이라고 부르신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향한 합당한 태도인 믿음에는 항상 죄에 대한 합당한 태도인 회개가 따른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은 죄에 대한 증오와 그것을 우리의 삶에서 제거하고자 하는 깊은 의욕을 수반할 것이다. 이것이 회개이며, 이것 역시도 은혜를 받는 태도의 하나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믿음의 밑부분이다. 누가복음13:3; 사도행전2:38을 보라.(회개는, 삶의 실제적 개혁의 형태 속에서, 그 자체에 행위를 포함하지 않는다. 회개가 행위를 포함한다면 그것은 행위 -구원 문제를 야기하게 될 것이다. 회개는 변화하고자 하는 의욕이며, 의향이지, 실제적 변화 그 자체는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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