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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살전 4:9~12 2024-05-12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이미 바로 앞에서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6f)는 기록을 나눈 바 있다. 우리의 육신의 삶에 있어서 夫婦, 父母-子息, 兄弟 중에 가장 오래 가는 관계가 어떤 관계일까? 당연히 형제관계이다. 세상의 혈연의 관계에서도 형제의 협력은 밖으로 두려울 것이 없게 만드는 든든한 울타리를 가질 수 있다. 성경의 최종적인 승리의 칭찬은 형제사랑의 교회인 필라델피아 교회이다(계3:7~13). 필라델피아 교회를 칭찬한 이유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믿음을 배반치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헤아려보면 형제 서로가 각각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능력을 함께 모아서 사용하는 것이었다.

교회의 관계는 계급적인 종적인 관계가 아니라 옆으로 평행의 횡적인 관계로 각자가 서로를 귀중하게 여기고 서로 의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사실 나 한 사람의 믿음이나 능력은 미약하고 부족할지라도 그 힘이 함께 모이면 한 사람이 가진 어떤 큰 능력보다도 강할 수 있기 때문에 교회는 형제사랑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형제 사랑의 과제는 곧 하나님 사랑이라는 관계로 연결되는 데서 형제사랑의 과제가 중요함을 요한은 여러 번 강조하고 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요일2:9~11)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3:14~15)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20~21) 적어도 요한 사도는 사랑은 형제와 관련되고 그 사랑은 위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이르는 수평과 수직의 관계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 속에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스라엘의 12지파 속에서 출발하였고 시내산에서 주어진 계명들도 형제와의 관계속에 도리를 다해야 하는 것으로 경계되고 이것 역시 위로 하나님을 의식하는 관계로 완성됨을 이해하게 된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

사도 요한의 형제사랑을 강조한 바 있지만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 역시 언제나 사랑의 지체가 형제됨을 강조하는 것을 로마서14~15장에서 시작하여 그의 서신들마다 읽게 된다. 고린도 전후서의 교회 대부분의 문제는 형제 간의 문제로 간주하고 있다. 특히 우상의 제물에 관한 문제를 거론하면서 로마서 14~15장의 문제와 비슷한 경계를 주고 있다.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로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8:11~13)

로마의 감옥에서 기록한 옥중서신 역시 형제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의 재림의 문제를 다루는 이 데살로니가 전후서 역시 형제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는 것들을 더러 읽을 수 있다. 대부분의 당부들은 “형제들아!”로 시작하고 강조하는 표현들을 더러 본다.

바울이 선교하면서 수없이 고난을 받은 대상이 자신의 혈육인 유대인들이었다면 오히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 위로와 격려를 끼쳤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맺어진 십자가의 피로 맺어진 형제들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도 이런 관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이치를 설명하려는 가운에 갑자기 형제 사랑을 강조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마지막 시대를 사는 믿음의 지체 간에 여러가지 생각지 못한 어려움과 위기가 닥친다고 하더라도 서로가 견고한 형제애를 가지고 서로를 의지하며 방어한다면 어떤 거짓의 세력도 넉넉히 이겨내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내용은 각각 2절씩의 내용이 전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v9~10이 형제 사랑에 관한 내용이라면 이어지는 v11~12은 재림을 앞둔 각자의 책임을 강조하는 부분으로 칭찬과 경계를 함께 주고 있다.



Ⅰ. 형제 사랑에 관하여(9~10)

바울이 유대인들의 방해와 핍박으로 급히 빠져나온 데살로니가 교회에 여전히 유대인들의 방해와 그곳의 같은 동족들이 환란을 끼칠 때 그것을 감당하고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육신적인 형제들조차 핍박하였을지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거듭난 형제 사랑으로 그러한 혹독한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을 바울의 이 부분의 내용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조금은 갑작스러운 내용에서 그런 것을 은연중에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대한 신앙적 체계가 없어서 혼란을 가지고 있는 가운데서도 형제 사랑에 관한 부분을 칭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오히려 저들의 주변의 핍박과 환란으로 인하여 서로를 더욱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은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이런 입장에서도 역시 믿음으로 인한 어려움이 꼭 손해만 가져오는 것은 아닌 것을 확인하게 된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9) 계속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형제 사랑에 대한 당부나 교훈은 신앙 안에서 상당히 자주 거론되는 주제이고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모범이며 이것이 어떤 면에서는 신앙을 지탱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신앙의 실천을 권면하는 로마서12:10에서는 피동적으로 사랑을 받는다면 너도 사랑하라는 형태가 아니라; “형제를 사랑하며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라고 권면한다. 히브리서13:1에서는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라 하여 이 삶의 자세는 어느 순간이 아니라 지속되어야 하는 것으로 말한다.

그럼에도 형제 사랑은 어떤 이권이나 조건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닌 진리를 순종하는 깨끗한 영혼의 사람이 진실되게 또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고 베드로 사도는 당부하고 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1:22) 우리의 신앙성장의 덕목에서도 형제 사랑의 목록을 포함하고 있다.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1:7)

그럼에도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 형제 사랑의 원리를 배운 출처를 바울 자신이나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9b)는 놀라운 감격을 고백하고 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근거가 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배운 사랑을 이미 실천하고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가르칠 것이 없다는 고백이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앞에서도 나눈 내용들처럼 어떤 신앙의 생소한 부분들은 바울에게 편지로라도 가르침을 요청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마치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게 요청한 것(고전7:1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에 대해 고린도서를 기록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곧 “형제 사랑에 관하여” 라는 표현인데 여기에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가르침 속에서 문제점들을 지적하기 전에 저들의 잘 감당하고 있는 부분들을 먼저 칭찬함으로써 가르침을 더욱 효과 있게 하려는 좋은 의도인 것으로 이해된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어쩌면 가장 쉽지 않은 부분에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탁월함을 본다. 범죄하는 세상에 사람들의 관계에서 미움과 원망은 너무나 쉽고 일반적인 모습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먼저 배워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가르치거나 권면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 부분에서는 우리 교회가 확실히 데살로니가 교회를 본받아야 할 것 같다.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10) 신앙의 모범이 되는 것은 서로 간에 좋은 것이기 때문에 연보에 대하여는 오히려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준비하였다는 것을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의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분발하게 하였느니라”(고후9:2)는 모범을 제시한 바 있다.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10f) 사도행전16장 이하에 기록되는 대로 마케도니야 지역에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의 교회들이 세워져 있었고 당시 데살로니가는 이 마케도니야 지역의 수도였기 때문에 다른 지역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렇게 아름다운 사랑의 모범이 되는 것을 듣는 사람마다 흐뭇한 신앙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신앙안에서 좋은 일들은 일회적으로 끝여서는 안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형제 사랑 같은 덕스러운 삶의 자세는 그것을 지속해 가는 것이 더욱 아름다운 모습이기 때문에 ‘달리는 말에 채찍질한다.’ 는 표현처럼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10b)라고 격려하고 있다. 앞의 v1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는 당부가 신앙의 전반적인 부분의 장성을 격려하는 도전이었다면 여기서는 성령의 열매의 첫번째 영적인 실과인 사랑의 열매를 지속적으로 맺는 믿음이 지속되길 당부하고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바람직한 모습은 당시에는 마케도니야 지역의 교회들에게 아름다운 모범이 되었고 20세기가 지난 이 시대에 오히려 그렇지 못한 우리 교회에까지 아름다운 도전을 주고 있다. 신앙의 모범은 한 지역안에서 또 그 시대에 끝나지 않고 같은 은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같은 믿음으로 섬기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 도전을 줌을 배운다.

당연히 오늘 우리 교회의 믿음의 행위는 이 21세기를 사는 지구촌의 교회들에게 그리고 이 역사가 계속된다면 다음의 세대에게까지 여향을 미칠 수 있다는 데서 우리의 책임이 큼을 실감하게 된다. 그것이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바람직한 모습이라면 더욱 가치가 있겠지만 옳지 못한 덕스럽지 못한 모습의 부정적인 경계는 참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교회의 모습으로 특히, 오늘 세속화되어 가는 교회들의 모범이 되지 않도록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런 중차대한 입장에서 우리 교회만이라도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서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래도 부산에서 남부지방에서 끝까지 진리를 지키는 모습으로 가고 있다는 모범이라도 잃지 않도록 형제 사랑을 회복하고 성경에 계시된 진리에 사람의 계명이나 편리를 섞는 어리석음이 없이 주신 생명의 진리에 우리의 믿음을 다하는 교회로 남을 수 있기를…



Ⅱ.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하라(11~12)

이제 이 뒷부분은 좀더 냉정하고 근엄한 분위기이다. 당시에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이미 경계해 뒀던 교훈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말투이지만 현실적으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문제들을 지적하는 내용들로 이어진다. 특히 우리 주님의 재림을 예언한 부분에서 ‘이 세상은 곧 사라져 없어질 것이라’는 부정적인 신앙적 이론이 저들의 일상의 삶에 경성하는 좋은 영향을 끼친 것 같지 않은 것 같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의 문제는 1세기의 교회들에게 조금은 지나칠 정도로 거론되었고 그런 것이 자신의 감당해야 할 자기 몫의 일까지 팽개치고 돌아다니는 문제를 일으켰음을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 문제 있는 교회들에 보내졌던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 속에 나타나는 것으로 봐서 더욱 분명하다. “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 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이미 사탄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딤전5:13-15)

이 디모데에게 주고 있는 경계가 오늘 읽고 있는 v11~12의 내용과 상당히 비슷한 것을 볼 수 있고 이렇게 바울이 경계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후서3:6~13에 더 강한 말투로 거론되는 것으로 봐서 해결되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어떤 신앙의 논리이든지 경건한 자세의 사람들에게는 더욱 조심하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이론가들에게는 더 방종하게 되는 것은 시대나 상황에 관계없이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11) 여기서 주는 경계는 대략 3가지다. 항상 실제적이지 못한 이론이 더 말이 많고 자신이 감당해야 할 역할에 소홀하고 남의 수고를 기대어 사는 안타까운 자세들은 올바른 믿음의 자세라고 할 수 없다.

“조용히[ἡσυχάζω, 조용한 생활을 하다, 침묵하다, 잠자코 있다]” 일하지 않고 말만 하는 사람은 사실 조용히 있는 것 만으로 도와주는 것이다. ‘이래라, 저레라’는 잔소리는 오히려 일하는 사람들에게 장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침묵을 강조하는 것은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을 중단하라는 권고는 아니다. 베드로 사도는 남의 일을 간섭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당부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벧전4:15)

“자기 일을 하고” 성경은 항상 게으름을 경계한다. 특히 최고의 부와 영화를 실현했던 솔로몬이 게으름을 경계하는 내용들이 잠언서에 더러 나타난다. 대표적인 교훈을 한 곳만 인용하면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6:9~11) 히브리서 기자도 역시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6:12)고 믿음에 있어서 부지런 함과 인내를 권면하고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두번째 보낸 서신에서 “우리가 들은 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살후3:11)는 경계를 보는데 자신의 할 일을 하지 않으므로 오히려 그것이 다른 사람의 일을 만들어 주는 결과가 되고 있음도 책망하고 있다.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11b) 1세기를 비롯한 그레코로만 시대에 육체로 하는 노동은 오히려 노예들이나 하는 것으로 노동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한 바울은 앞에서도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2:9)는 고백을 한 바 있다.

또 옥중서신에서도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4:28)는 격려를 주고 있다. 언제나 나는 편하고 남의 수고를 의지하려는 자세가 문제이다. 사실 그렇게 한다고 건강하거나 오래 사는 것이 아닌 데도 잘못된 생각은 손으로 하는 일을 천하게 여기는 것이다.

믿음의 이론을 잘 못 이해하는 사람들은 노동을 죄의 대가로 잘 못 받아들이는 것(창3:17b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인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좋은 모범을 주신 바 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일하시고 우리 주님께서 일하신다면 그의 백성들인 우리가 일하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11b)한 것에서 “힘쓰라[φιλοτιμέομαι, 열망하다 φίλος + τιμή 가치, 귀중품, 존경, 존엄성]”는 내용이 이 구절의 앞에 나타나 강조 적인데 결국 존경과 가치를 사랑하는 것에 힘쓰는 것이고 신앙의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절대적인 가치를 귀중하게 여긴다면 항상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고전14:1f)라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12)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11)는 3가지에 힘쓰는 이유이다. 어쩌면 이것은 오늘 우리 시대에도 같은 이유로 조심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믿음의 사람들은 함께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회밖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 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도 중요한 삶의 과제이다.

바울은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골4:5)했고 교회의 중책을 맡을 사람들은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딤전3:7f) 라고 하여 교회밖의 사람들에게 복음과 덕세움을 감당해야 함을 당부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더욱 부지런히 수고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고 항상 덕스러움으로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항상 대답할 것을 준비하라는 베드로 사도의 벧전3:15의 교훈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형제 사랑을 포함한 모든 믿음으로 인한 삶의 덕목들은 어느 한 곳에서 일회적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항상 행하고 더욱 힘쓰도록 격려해야만 한다.

내일 당장 주님께서 오신다고 해도 우리는 말보다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남이 해주기를 바라기 보다는 스스로의 손으로 수고하는 영원을 살 것처럼 준비하며 최선을 다해야 한다. 불신의 사람들에게 부러운 삶이 되고 어떤 것에도 모자람이 없도록 성실로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