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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5:13~20 2022-05-08
이 소망은 영혼의 닻 같아서,  
지난 시간에 이어 다시 소망을 다루게 되는데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을 인하여 참고 견딤으로 그 언약을 자신의 것으로 누렸던 믿음의 선진들을 본받으라는 권면을 하였다면 그 대표적인 모델로 아브라함을 예로 드는 내용이 오늘 말씀이다.

복음을 증거하는 데도 아브라함은 실로 믿음의 모범이었다(행3:25, 7:17; 롬4:13; 갈3:8, 14, 16, 18). 믿음의 귀중성을 강조하고 있는 이 히브리서 역시 아브라함을 여러 번 믿음의 모범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들을 읽어 볼 수 있다(2:16, 6:13~15, 7:4~5, 11:8~19).

기대하는 어떤 것이 분명하다면 현재의 당하는 어려움이나 고통은 능히 감당할 수 있지만 소망하는 것이 없다면 즉, 바라는 것이 한 가지도 없다면 현실에 별 문제가 없다고 할지라도 별로 살아갈 기대를 갖지 못함을 역사에서 본다.

과거의 군대에 들어가 고된 훈련과 얼차려를 받으면서도 견디기 어려우면 스스로 하는 위로는 받는 기합(氣合)이 힘겨울 때 ‘그래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였음을 군대생활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경험했을 것이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약속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친히 맹세하신 너무나 확실한 언약이요 소망인 까닭에 이런 분명한 약속이 있기 때문에 풍랑이 심하여 더 위태하고 강하게 파도가 배를 밀어붙일수록 뻘 속에 더욱 깊이 박히게 되는 닻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다.

믿음 생활하는 것이 편했으면 좋을 것 같지만 사실 핍박도 없고 고난도 없는 무사안일한 신앙은 그만큼 용기도 도전도 없는 힘없는 종교생활이 되고 말아서 마치 초하루나 보름날 가족의 무사를 빌러 가는 또 오늘처럼 교주가 탄생한 날에 연등이나 다는 종교생활이 되고 말 것이다.

또 풍랑 이는 바다위에 높은 파도와 씨름하는 사공의 애처로운 모습처럼 이 세상의 바다에 온 갓 유혹과 시험에 도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외면하지 않으실 우리 주님의 격려와 위로 그리고 최종적인 승리를 확신하여 믿음이 닻처럼 튼튼히 박히는 신앙의 사람들로 사는 …



Ⅰ. 주님의 약속은 오래 참는 자가 반드시 받는다.

맹세는 어떤 일을 확실히 책임질 수 있는 대상을 두고 하는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 함부로 맹세하는 것을 금하시면서 주시는 말씀을 보면 ‘하늘로, 땅으로도,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마5:33~37) 하신 것을 볼 수 있다. “맹세하다[ὀμνύω, (거룩한 대상들을) 굳게 잡다]” 결국 사람은 능력의 한계를 가지기 때문에 맹세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데서 맹세를 금하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주시기 위하여 맹세를 하셨는데 하나님께는 더 이상의 존재가 없으시기 때문에 자신을 가리켜 맹세를 하셨다고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13)

기록한 창세기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창22:16) 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어도 이 언약을 굳게 붙듦으로 최종적으로는 이 약속이 이뤄진 것을 증언하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시고 그리고 그 맹세로 주신 약속을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14) 역시 본래의 내용은 창세기22:17~18의 말씀이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이는 실로 엄청난 약속으로 이 약속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을 순종한 후에 주신 언약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주실 복을 받기에 충분히 준비된 후에 주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하나님께서 자식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은혜로 주신 이삭이었지만 그 독자 이삭 한 사람을 본다면 위의 약속은 실현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이었음에도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15)는 확인을 기록하고 있다.

믿음과 더불어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성이 무엇일까 묻는다면 아무래도 인내 즉, 오래 참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인내가 곧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은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참고 기다릴 수 있기 때문에 믿음과 인내는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은 대부분 조급하다. 어쩌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조차도 아들을 주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해서 인간적인 방법을 생각해냈고 하갈을 통해서 자식을 얻을 계산을 실행에 옮긴 것이라고 보여 진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들은 평안이 아니라 혼란과 어려움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확실한 결과를 나중 이삭을 낳은 후의 진행되는 아브라함의 집안의 모습과 그 영향은 오늘에까지 미치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도 오늘 우리 역시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15)는 아브라함의 자세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 언약을 받았음에도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의 조급함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지나가 버릴 수도 있음을 경계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지난 주에 이미 앞의 v12에서 모든 믿음의 선진들을 거론하면서도 이미 이러한 표현을 말함 바 있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그런 입장에서 실천적인 믿음을 당부하고 있는 야고보도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4)고 당부하여 신앙의 양쪽바퀴 같은 믿음과 인내를 균형 있게 가질 것을 당부하는 것이다.



Ⅱ. 하나님의 맹세는 보증되었다.

사람들에게는 맹세를 금하셨음에도 아브라함에게는 자신이 맹세의 주체가 되셨던 하나님의 언약하신 그 맹세의 의미와 효력을 증거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16f) 앞에서 이미 맹서의 의미를 간략하게 생각하였지만 사람들의 맹세의 권위를 말해주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확실성을 설명하기 위해 맹세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설명하시는 것이다. 이미 앞의 v13b에서도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라고 하였던과 같이 언제나 맹세는 자기를 담보할 수 있는 보다 우월한 대상을 가리켜 하게 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던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마5:36) 하신 내용은 사람 자신을 두고 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뒤 따르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역시 하나님의 영역임을 확인할 수 있다.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16b) 했는데 마치 솔로몬이 “제비 뽑는 것은 다툼을 그치게 하여 강한 자 사이에 해결하게 하느니라”(잠18:18)는 말씀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죄성(罪性)의 사람들은 맹세를 하고도 지키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어찌 보면 당장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 맹세하는 것을 더러 보는 모습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맹세를 금하신 것이지만 논란을 잠재우고 어떤 일의 결과를 책임지는 것을 맹세라는 행위로 확정하게 된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결정을 위하여 사용하는 이 맹세를 아브라함에게 하셨고 이것으로 주실 언약을 더욱 분명히 하신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비단 아브라함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같은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바꾸지 않을 것을 확인하셨음을 증거하고 있다.

아무 사람들에게 가 아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라는 분명한 한정을 주고 계시다. 그렇다면 과거 믿음이 선진들에게만이 아닌 오늘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이 약속은 유효함을 확인할 수 있다.

왜 맹세를 하셨는가 하면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하나님 자신의 인류구원 계획의 뜻이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실한 근거를 주시기 위해서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분명한 의지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17) 하신 것임을 증거한다.

사람들의 끊임없는 범죄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실 계획을 결코 취소하시거나 바꾸지 않으려는 이 사랑의 의지를 확신한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불변하는 같은 믿음으로 응답하여야 당연한 것이다.

또 이런 이유 때문에 죄인 구원을 사람의 의지나 뜻에 맡기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자의적인 예정으로 계획과 약속을 실천해 가심에도 충분한 확신과 감사가 된다. 사람은 아무리 선하다고 해도 이런 면에서 하나님을 본받을 수 없는 허약한 존재일 뿐이다.

우리 사람은 맹세하고 지킬 수 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증거하는 것처럼 “우리는 미쁨이 없을 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2:13) 했는데 이것이 사람과 다른 점이다.

우리 사람은 자신이 분명히 한 말인 데도 불리하면 말을 번복하거나 하지 않았다고 발뺌하는 일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요즘은 대부분 정치가들의 말이나 행동이 녹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쉽게 찾아내는 것들을 볼 수 있다.

사람들도 이럴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삶의 모든 데이터를 가지고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힘입지 못한다면 모든 인류 앞에서 우리 각자가 행한 것을 다 드러내실 것이라는 말씀이 실감되는 부분이다.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이 죄는 그 뒤를 따르리니,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딤전5:24~25) 그러나 감사하게도 불변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맹세하시고 보증하셨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보증하셨다. 우리의 믿음이 변치 않는다면 그 약속은 우리의 것이다.



Ⅲ. 영혼의 닻 같은 소망,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약속 때문에 소망이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하신 구원에 온전히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닌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모든 것을 완성하시고 먼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확신이 오늘 우리가 나누는 마지막 부분의 말씀이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18f) 여기서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은 앞에서 말한 맹세와 약속을 두고 하는 말이다. 비록 범죄하였지만 자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을 이미 창세전부터 예정하시고 이 작정을 역사 속에 진행시키신다.

물론 마귀, 사탄의 방해는 계속되었지만 선택하신 일꾼들에게 이 자신의 계획을 한번도 번복하지 않으시고 확인시키시는 것을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진실되심의 확인이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이라는 성품으로 나타내고 있다.

로마서3:4f에서 바울은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라고 죄를 물 마시듯 하는 사람과는 다르게 하나님은 절대로 진실되심을 증거한 바 있고 이러한 내용들은 성경 도처에 기록되고 있다. 이 하나님의 진실되심 때문에 구원이 흔들릴 수 없고 오히려 소망을 잃지 않음을 확신시킨다.

아마도 그 중에서 하나님의 진실성에 대하여 가장 구체적으로 기록한 내용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23:19)라는 내용일 것이다.

이 내용은 모압 왕 발락이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하는 주문에 따른 발람의 하나님의 영에 의한 고백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오늘의 정치하는 사람들처럼 말을 번복한다면 과연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되기도 하여 오히려 감사하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변치 않으시는 언약과 맹세가 죄의 도피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안도와 위로를 얻게 함을 연이어 기록하고 있다.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18b)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려는 믿음의 소망을 가지고 천성을 향하여 가는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나아가는 우리의 기대가 얼마나 튼튼한 가를 비유하는 내용이 다음 절인데 가장 적절한 비유를 찾다 보니 닻으로 비유한 것 같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19)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소망을 닻에다 비유하고 그렇기 때문에 뒤로 떠밀리지 않고 휘장 안에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음을 증거한다.

나중 10:38~39에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라는 표현 역시 이 닻과 연관이 되는 표현이다.

닻은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별로 변함이 없는 도구로 사실 바다에서 배를 부리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이지 우리 도시민들이나 가끔 배를 타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 원리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도구이다.

성경에는 가끔 배의 구조나 도구들이 가끔 등장하는데, 이물(행27:30, 41), 고물(막4:38), 거룻(행27:30, 32), 키(행27:40; 약3:4), 돛(행27:40) 등등이 모두 배에서 사용되는 도구들이다.

다행히도 저는 어려서 큰 배는 아니지만 작은 배를 젖기도 하고 타기도 하며 부두에 정박시키기도 한 경험이 있어서 이 닻의 역할이나 귀중성을 어느정도는 이해하고 있는 것이 감사할 이유인 것 같다.

이 닻이 등장하는 내용은 오늘 본문 외에 마지막 로마로 호송되는 바울이 탔던 배들이 난파되는 내용에서 볼 수 있다(행27:29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내리고, 27:40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돛을 달고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여기 2곳의 말씀에서 벌써 닻의 중요한 역할을 볼 수 있다. (밀린다면 앞에 있을 암초에 걸릴 수 있고; 해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닻이 배를 잡고 있으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끊은 것이다.)

이 시간에 닻의 기능을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하고자 하는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라는 표현이다.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닻은 배가 더 심하게 밀릴수록 더 깊이 튼튼히 박힌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어떤 것보다 합당하다.

이것을 영혼의 닻에 비유하면 세상이라는 격량의 바다에 시험과 환란의 파도가 더 거셀수록 영혼의 닻은 예수 그리스도께 더욱 튼튼히 박혀서 흔들림이 없다는 확신이다. 적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더욱 확실하다는 사실이다.

이 v19의 마지막 부분에 “휘장[καταπέτασμα, 가리게, curtain] 안에 들어가나니” 한 휘장은 본래는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것으로(출 26:31~ 등) 이 휘장은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과 인간을 구분한 상징이었다.

그럼으로 대제사장만이 일년 일차에 두려움으로 들어 갈 수 있어서 보통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는 구별된 곳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 곳에 들어가 계시고 주님의 피에 씻김을 받은 사람들은 최종적으로 그곳에 들어가게 될 것인데 이것은 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21:22) 하나님과 구속받은 백성이 구별이 없을 것이라는 선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는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27)라는 분명한 구분도 증거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확신과 소망의 근거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으로 오늘 말씀이 마무리되고 있다.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20) 여기 멜기세덱에 관한 기사는 다음 주에 연결되기 때문에 그 때 가서 자세히 보도록 하자.

이것은 적어도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위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지성소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모형들의 결론이다(레16장). 그럼에도 OT의 대제사장들은 행여라도 죽을까 봐 두려워서 금방울을 달고 온 갓 안전장치를 다 하였지만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9:12)고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복 주고 복 주시며 하나님의 변치 않을 약속에 참여시키기 원하신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에서 믿음으로 인하여 오는 불이익이나 고난을 주실 상급을 바라고 인내하는 것이 필요하고 선진들이 다 그러하였다.

하나님은 이 사실이 너무나 분명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사용하시는 맹세를 사용하셨지만 자신의 위에 어떤 존재도 없기 때문에 스스로의 이름을 걸고 선하신 구원의 약속이 분명하심을 맹세로 보증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로 영원한 영광을 찾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소망뿐 아니라 위로를 주시려 하신다. 이 소망으로 인하여 고해와 같은 세상에서 어려움과 환란을 당할수록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갈 영혼의 소망은 더욱 튼튼하고 확실해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영광의 휘장안에 먼저 들어가셔서 우리를 맞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는 모든 성도들은 성령과 더불어 말씀을 의지한다면 이 영광과 신비의 휘장안에 넉넉히 들어 감을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