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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5:11~14 2022-04-17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알며 섬기던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 본문은 오히려 계속 부정적인 표현으로 믿음의 성장을 격려하고 있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안타까워하는 것이 그 첫째이다.

그런 다음 이 지구상에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오래 섬겨왔고 배워왔다면 이미 모든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선생이 되어 있어야 마땅함에도 아직도 여전히 신앙의 초보적인 단계여서 영적인 균형 있는 식사를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런 이유에서 어린아이처럼 부드러운 젖만 먹는 연약한 신앙에서 장성하여 거친 식물을 소화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 하나님의 바른 진리로 훈련되어서 절대적인 하나님의 선과 무엇이 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악인지를 분별하는 데까지 성장할 것을 권면한다.

그럼에도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만 주는 경계가 아니라 같은 입장에 있는 신앙의 사람들에게도 같은 교훈으로 권면하고 있다. 자연의 식물들이나 동물들도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 이치임을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 바 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막4:28) 영적인 입장에서는 이런 지극히 자연적인 성장도 안되고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도전하고 있는 가르침이다. 우리 대부분은 이제까지 신앙의 성장을 대부분 양적인 것으로 이해해 왔지만 각 개인의 믿음의 성장도 반드시 필요한 과제임을 다시한번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자녀이면서 섬기는 입장에서는 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가르치는 이 히브리서에서 또 다른 우리의 위치와 역할을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주님만이 대제사장이시고 우리 모두는 역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데 있어서 제사장 그것도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멜기세덱으로부터 레위가문 아론의 계보를 따르는 제사장들의 역할을 율법에서 보는 내용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섬기는 제사장과 백성들에게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5) 명령하셨다.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확인하고 있는 베드로 사도가 이를 인용하고 있다.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6) 이런 입장에서도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도록 성장해야만 한다.

성경에서는 어느 시대이든지 대제사장은 한 사람이었고 이것도 오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영원히 섬김에 있어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수준이 적어도 자신을 정결케 한 후에 제사를 드리는 율법시대의 제사장들보다는 못하지 않다.

왜냐하면 짐승의 피가 아닌 한번으로 영원히 완성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로 깨끗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더 이상 대제사장은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을 받은 사람들은 베드로 사도의 확인처럼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는 말씀을 확인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교회 속의 조직에서도 이 원리는 다르지 않다. 모두가 섬기는 자리가 다를지라도 차별없이 “왕 같은 제사장들”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중에서는 누구도 더 높고 낮은 제사장은 없다.

우리가 죄인으로 아무 공로 없이 제사장이 되기는 하였지만 그렇게 받은 자리인만큼 우리를 제사장으로 삼기 위해서 피를 흘리신 오직 한 분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더욱 성결하고 구별된 헌신을 드려야만 할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법이 어겨지면 그것의 피해는 고스란히 그 말씀을 어긴 당사자들임을 역사 속에서 본다.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7:23) 당부하고 있다.

제사장이라는 역할과 직책은 자녀나 종들과는 다르다. 다시금 이러한 거룩한 직책을 소중히 여기고 구별된 섬김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섬기는 우리의 자리를 점검하는…



Ⅰ. 멜기세덱에 관하여(11)

이미 앞에서도 이 멜기세덱에 관해서는 가장 많은 내용을 말하고 있는 7장에 가서 다루자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멜기세덱에 관한 이해보다는 이해가 모자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다.

먼저는 멜기세덱[מַלְכִּי־צֶדֶק, = 왕 מֶלֶךְ + 올바름, 공의, 공정, 의로움 צֶדֶק]의 이름의 의미는 세상의 이치에 어울리기 보다는 진리와 공의(公義)이신 하나님께 더 어울리는 이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비록 OT성경 한곳에 등장하는 인물이지만 이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 멜기세덱에 관하여 “할 말이 많으나”라고 운을 띤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멜기세덱”에 대하여 할 이야기가 많다고 하기 보다는 앞으로 계속 진행할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과 관련하여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많다고 이해되는 것은 사실 여기 멜기세덱도 직접 이름을 거론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대신하는 “그[ὅς]”라는 지시대명사를 쓰고 있는 것에서도 이해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말하려는 내용을 듣고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서는 하고싶은 말을 다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할말은 많지만 그 말하려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조심스럽다는 투로 하는 말이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라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듣는 것이 둔하”다는 것은 더 쉽게는 ‘이해할 수 없으므로’라는 말과 같다. 사실 산수의 기초를 배우고 있는 초등학생들에게 방정식(方程式)이나 인수분해(因數分解) 같은 수학공식을 이야기해 준다고 해도 이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예외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말하려는 사람은 당연히 조심스러울 것이다.

이미 이해의 한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설명하기 어려우니라”할 수밖에 없다. 지금 이러한 이야기는 문화(文化)나 학문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것들을 이야기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과거 1세기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이 성경의 어디에 어떤 상황에서 등장하는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또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성경을 거의 읽지 않는 신앙인들에게 성경이야기를 하면 이해될 리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적어도 그리스도의교회에서 신앙하는 사람들은 성경에는 막힘이 없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멜기세덱같은 흔하지 않은 사람을 이야기하면 그것은 또 그럴 수도 있을 것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성경을 너무 가까이하지 않은 신앙인들은 성경의 제목을 찾는 것조차 어렵게 느끼기도 한다. 신앙하는 사람들이 최소한으로 라도 성경을 항상 읽어야 하고 성경을 찾는 데는 별 어려움은 없어야 한다.

그런 이유에서 이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들이 대개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지 않을지라도 그분을 선지자 정도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믿음 속에 들어와 있음에도 주님께서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고 특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시라는 사실을 이해시키기 쉽지 않음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안타까운 사실은 성경을 증거하면 어렵다고 호소하고 오히려 ‘은혜 되는 말씀을 더 좋아한다.’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들까지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그 주님의 말씀에 익숙하고 생명으로 여겨야 할 것임에도 너무나 부드럽고 듣기 편한 말씀들만 듣는데 익숙하여 균형 잡힌 하나님의 말씀은 오히려 소화가 안되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 데 오늘의 말씀은 바로 그러한 신앙이 영적으로 단단한 말씀까지 소화할 수 있도록 성장해야 할 것을 격려하고 있다.

신앙을 바로 하기 위해서는 예배나 모임에서 풀어 증거하는 말씀만으로 균형 잡힌 신앙을 할 수 없다. 말씀을 들었으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기 위하여 베뢰아 사람들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사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행17:11~12)

이 시대의 건강문제와 관련해서 채소도 많이 가공하지 않는 자연 그대로와 곡식도 여러 번 도정하지 않고 부드럽지는 않지만 현미처럼 거친 음식이 육신의 건강에는 확실히 좋다는 이론을 더러 듣고 있는데 영적인 이치도 다르지 않다.

세상의 문화에는 조금 뒤쳐지고 어려워할지라도 생명의 진리에는 익숙하여 어떤 어려운 말씀이라도 달게 소화하는 신앙의 어떤 부분을 다루든지 모두가 그런 내용을 이해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는 …



Ⅱ. 마땅히 선생이 되었어야 했다(12)

신앙 성장이 꼭 기간과 정비례되는 것은 아닌 것을 지적하고 있다. 대부분의 성장하는 것들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믿음은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자라는 것이 아닌 것으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눅13:30) 말씀하시고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19:30; 막10:31)하시기 때문이다.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12f) 그만한 시간을 신앙으로 보냈다면 가르치는 자리에 있어야 당연한데 라는 표현이다. 유대 신앙인들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전부터 성경과 하나님을 알아온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저들이 이 서신을 받고 있는 시점(AD 64~68)으로 계산한다고 해도 약 30년 정도의 기간을 지났기 때문에 성경을 알고 그 성경이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알았다면 이런 저자의 기대가 무리가 아닐 것이라고 판단된다.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자체가 성장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기르는 과일나무 조차도 계절에 맞게 필요 없는 가지를 잘라주고 거름을 주고 잡초를 제거하는 일들을 하면서 시간과 자연의 조화 속에서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방치해둔 신앙은 절대로 성장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어두움의 세력들은 이 코로나-19같은 것으로 신앙이 자라지 못하도록 내버려 두어 포기하게 만든다.

계속해서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12m)라는 말에서 저들의 자라지 못한 신앙의 상태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육신의 성장장애라는 아이를 봐도 안타깝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우리의 영적인 성장이 정지되어 있는 모습을 보실 때 안타까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간적으로 볼 때는 벌써 자라서 어떤 일들을 감당해야할 시기인데도 여전히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는 믿음의 상태는 하나님께서 만 안타까워하실 일이 아니다. 분명히 초보 즉, 기초는 중요한 것이지만 평생을 기초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분명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상태의 문제는 당연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12b) 각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은 당연히 그가 먹고 소화하는 음식과 비례 되는 데서 우유만 먹는 연약한 건강 상태로는 영적인 싸움에도 당연히 유약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탄생하여 어린아이의 시기를 좋은 양분의 음식과 교육으로 보내고 청년기와 장년이 되면서 이제는 먹는 음식의 가림이 없이 감당해야할 일을 위한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거친 음식까지도 소화하여 자신이 감당할 일들을 힘있게 감당하는 것이 믿음에 있어서도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시간의 소모는 장성하기 위해 필요할 때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같은 음식과 유약함을 벗어버리지 못한다면 안타까움 외에는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바로 앞장에서 이미 보았듯이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 때를 따라 자라고 장성하여 영적인 사명과 악에 대한 싸움을 잘 감당하는…



Ⅲ.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할 수 있어야(13~14)

앞의 내용의 보충 같은 말씀이지만 내용은 역시 신앙적으로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는 경계의 교훈이다. 유치한 상태의 신앙은 오로지 부드러운 음식만을 소화할 뿐이고 믿음의 장성한 성도들이 되어야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이치와 진리가 아닌 세상으로부터 난 꾸며진 거짓 교훈을 구분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13f) 여기 “어린아이(νήπιος)”는 기본적으로는 미성년자, 특히 언어로 소통이 불가능 한 사람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이런 표현이 사용된 기록들이나 사전들에 보면 1세기에는 어른일지라도 행동이 미숙하거나 어리석게 돈을 신뢰하는 사람, 또는 현실을 외면하고 충고를 듣지 않는 사람들과 인생의 경험이 없어 깨달음이 없는 사람을 νήπιος(바보)라고 무시하였다.

이런 어린아이에게 젖이 아닌 조금이라도 거친 음식을 먹인다면 당장에 탈이 나고 마는 것을 신앙에 비유하는 데서 심각성이 있다. 어린아이는 몸에 좋은 것보다는 입에 단 것을 좋아하고 신앙이 깊지 못한 영적인 어린아이 역시 영혼에 보다 귀에 좋은 말씀을 좋아하는 것에서 철학적으로 사용되던 1세기의 νήπιος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13b) 육신적인 어린아이는 달콤한 어머니의 젖 외에는 다른 맛있는 것을 맛본 경험이 없는 입장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각각의 고유의 음식들의 맛을 아는 사람이라면 오로지 젖만 찾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 “의의 말씀”을 성경을 보는 많은 학자들이 다양하게 이해를 하고 있지만 처음의 멜기세덱에 관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의로 인정하시는 깊은 말씀의 맛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경험만큼이나 확실한 것은 없다. 신앙을 도전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세상이나 사회 속에서 여러가지를 신앙적으로 부딪히고 계속 그러다 보면 나름대로의 방법을 터득하게 되는데 그러지 않고 그냥 어머니 품속에서 젖만 먹고 자라는 아이는 당연히 이런 경험이 없기 때문에 새로운 상황을 만나게 될 때마다 두려움으로 걱정하는 모습이 될 것이다.

이런 사람과는 다르게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14f)라는 표현은 많이 가공하거나 정제되지 않은 거친 음식을 의미라는 표현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음식은 그 사람의 건강상태를 그대로 나타내 준다는 데서 적절한 비유가 될 것이다.

단순하게 빵을 예로 들더라도 밀의 껍질이 함께 남지 않도록 아주 부드럽게 갈린 밀가루로 만든 빵이 대부분이지만 그런 것은 건강에는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 요즘은 껍질을 함께 갈아서 거칠게 간 통밀 빵이 건강에 좋다고 하여 부드럽지는 못하지만 찾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들의 문화는 발달할수록 음식을 부드럽게 만들고 그것이 오히려 건강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사탕수수에서 뽑아내는 설탕 역시 같은 이치를 보는데 당분 외에는 모든 다른 물질을 분리해낸 것이 백설탕이다.

잘 정제된 설탕은 순수한 당분은 강하지만 사탕수수의 좋은 영양성분은 모두 빼 버리고 단(甘)성분만 먹게 되는 것이 건강에 좋지 않기 때문에 요즘은 정제되지 않은 비정제(非精製) 설탕이라는 원당(原糖)이 건강 때문에 다시 찾게 되는 것을 본다. 비유가 너무 지나치지 않았나 싶다.

생명의 양식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 역시 마찬가지이다. 장성한 사람들은 말씀 그대로를 읽어도 감격이 되고 능력이 되지만 신앙이 자라지 못하면 오로지 귀에 달콤한 복이나 사랑, 평안, 안녕과 천국만 찾게 되고 이런 영적인 음식만으로 유지되는 삶은 건강하지 못하다.

왜, 최근에 와서 세계에서도 유래를 볼 수 없을 정도의 교회성장을 했다고 하는 우리나라의 교회들과 신앙이 급격하게 쇠퇴하는가 하는 문제로 비슷한 이론들이 분석되고 있다. 전쟁후의 폐허에서 복음자체보다는 격려와 소망을 주던 주된 메시지는 생활이 나아지고 윤택해지면서 별로 소용없는 메시지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오늘 마지막 말씀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14f) 여기 단단한 음식은 비유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시라는 이해 자체가 쉽지 않은 데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즉, 신앙의 깊이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의 이해가 다를 것이지만 성숙한 신앙의 사람이라면 어떤 내용이든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성령안에서 이해가 가능하리라는 말씀이다. 그럼으로 쉽게 표현하면 신앙이 지속적으로 자라서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라는 격려이다.

“…그들은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14m) 장성한 자들의 성숙의 이유를 지적하고 있다. 그 이유를 “연단을 받아” 끊임없이 훈련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신앙인들을 운동선수에 비유하는 것은 성경에 흔한 일이지만 운동선수가 훈련을 게을리한다면 보통 사람과 다름없이 되고 만다.

신앙의 사람들 역시 다르지 않다. 대표적인 예가 디모데전서4:15~16로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는 것처럼 자신과 지체들에게 훈련은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경건을 훈련하는 자들이라야 지각을 사용하므로 즉, 영적인 감각을 바로 가질 수 있고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14b)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제사장이라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속한 선과 세상에 속한 악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면 나중 영광의 나라도 찾지 못할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마귀 사탄은 우리의 신앙훈련을 방해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을 따르는 제사장이시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으로 족하지 못하다. 특히 오랫동안 신앙을 해 왔다면 하나님의 진리를 들음에 있어서도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생명의 진리으로 이끌 수 있을 정도로 장성하여 늘 초보적인 다툼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아직도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고 거친 식물을 먹을 수 없이 부드러운 음식만 찾는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다. 할 수 있는 대로 끊임없이 믿음을 훈련하고 장성하여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로 자라서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끼치는 세상에 거룩한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