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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3:14~19 2022-03-13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지난 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완악하면 약속에 들어갈 수 없다는 두려운 경계를 과거 광야 생활하면서 40년간 거역함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망한 이스라엘의 전례를 들어서 완전한 복음을 들었음에도 완고하게 거절한다면 같은 비극을 맞게 될 것이라는 경계를 증거했었다.

오늘 이 말씀 역시 거기에 연결된 같은 경계의 교훈이다. 같은 말씀들을 반복적으로 인용하면서 시작할 때 가졌던 확신을 끝까지 놓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이집트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탈출해 나왔지만 불순종하므로 광야에서 안타까운 일생을 마친 비극적인 본보기를 제시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일에 있어서 시작은 멋지게 잘 시작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처음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흐트러지고 마는 것도 세상사에서 흔한 일이기 때문에 언제나 처음 마음을 잃지 말라는 경계를 자주 말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어떤 일을 시작은 멋지게 해놓고 지지부진하게 끝을 흐리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 바 있다. 반드시 시작 전에 그러한 일들을 모두 감안해서 자신을 따르고 끝까지 제자로 남아야 할 것을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7) 말씀하신다.

이에 대한 두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데 한 가지만 소개를 하면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눅14:28~30) 말씀하신다.

세상의 어떤 일이든지 설계나 계산없이 그 일을 시작하였다가 이루지 못하면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될 수 있다면 영생을 위한 신앙의 삶은 더욱 그렇지 않겠느냐는 권고의 교훈이다. 실제로 우리가 신앙 생활하다가 제대로 못하면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까지 욕되게 들먹거릴 수 있음을 더러 보는 사실이다.

특히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14:26)라 말씀하신 후 주신 경계이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기는 하지만 너무 흔하게 사용되는 표현처럼 우리의 신앙의 삶이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되서는 안됨을 이 히브리서에도 직접 말한 바 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0:38)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맛보았다면 이제는 그 믿음은 지속적으로 자라가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지속적으로 받았다면 이제는 그 받은 은혜를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끼칠 수 있는 데까지 역할을 하는 신앙의 성장이 지속적으로 있어져야 할 것이다.



Ⅰ. 시작과 끝이 같아야 한다(14~15)

앞에서도 약간 언급한 것이지만 어느 누구든지 시작은 대부분 그럴싸하게 출발하는 경우를 본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시간이 가면서 처음의 그 모습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데 안타까움이 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이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한번 시작하신 것이면 끝까지 다르지 않으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하나님을 Α와 Ω라고 하는 것이다. 이 히브리서 기자도 이러한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13:8)

심지어는 신앙의 실천을 당부하는 야고보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1:17) 증거하고 있다.

먼저 v14에서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함으로서 무엇이든지 시작과 끝이 한결 같아야 할 것과 그 약속을 우리에게 확인해 주고 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14f) 역시 실행하는 당사자들은 “우리가”이고 견고히 잡아야 할 때는 시작에서 끝까지이며 그 내용은 “확실한 것을”이라고 자세를 당부하고 거기에 대한 약속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14b)는 도식이 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변함없이 붙들어야 할 “확실한 것[ὑπόστασις,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으로), 실상, 실체]”이 무엇인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쉽지 않은 표현이지만 1:3f에서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또 한 곳의 같은 히브리서에서는 11:1f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고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그 믿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이 내용에서 주고자 하는 의미로 이해되어진다.

뒤에 따라오는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14b)는 내용을 봐서도 그렇게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여기에 참여한다는 것은 마치 주님의 만찬을 나누어 구속을 기념하며 확인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나눠 가지는’ 또는 비슷한 의미이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어 가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함께 나누는 상속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앞의 v7과 같은 시편95:7이하를 다시 확인하면서 과거의 경계를 지금의 현실에 가져와서 교훈을 주고 있다.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15)

중요한 것은 “성경에 일렀으되”한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의 일꾼들을 통해서 주신 모든 성경은 그의 백성들에게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성경에 일렀으되”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바르고 의롭고 온전하게 교육하시려는 교훈이며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에 온전하도록 준비시키기 위한 교훈인 것이다. 그런 목적 때문에 거기에는 책망을 포함하고 있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신앙의 사람이라면 무엇이든지 시작에서 끝이 다르지 않는 하나님과 닮은 사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Ⅱ. 진노를 산 사람들과 원인(16~17)

여기서부터는 불행한 본보기가 된 사람들을 제시하면서 마지막절까지 마치 문답식으로 묻고 답하는 형태로 증거되고 있다.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16f)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자체가 복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집트를 탈출해 나와 비록 광야 여정이었지만 이스라엘 외에 당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민족이나 사람들은 결코 없었고, 놀라운 권능과 능력을 맛본 사람들도 이스라엘 외에는 역시 없었다.

이스라엘이 빠져나간 것이 억울하고 안타까워 다시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추격하던 바로나 그의 군인들은 같은 경로를 따라 가면서도 홍해 물속에 수장된 이유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아갔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것에 차이로 생각할 수 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자체가 복이 된다고 하는 것은 죽음과 생명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며 육신적인 존재이면서도 영적인 존재인 사람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채울 수 없는 가치를 말씀을 통해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오염되지 않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감사를 갖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는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을 키우기 위해서도 주고 계시는데 그 말씀을 외면하고 거절해 버리면 더 이상 소망 없는 인생들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그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16b) 하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탄식을 보는 것이다. 완악하기 이를 데 없는 바로와 이집트를 빠져나오기까지도 10가지 재앙(災殃)의 능력을 보았다.

[출7:14~12:30; 피, 개, 이, 파, (사축)死畜, 종기(腫氣), 우, 메, 흑암, 초사(初死)] 사람으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이적들을 경험하고 나왔음에도 그러한 경험을 모조리 잊어버린 사람들처럼 이집트에서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내리셨던 동일한 말씀을 거절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사람들과 들은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분명한 차이를 두신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눅12:47)라고 주님께서도 직접 말씀하신 바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될 것이다. 말씀이 희귀하던 시대에 예레미야는 자신이 말씀을 들은 것에 대한 감격을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15:16) 고백하고 있다.

옛 속담에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잠9:17)라는 일반적인 내용이 아닐지라도 너무 풍성하지 않고 모자라는 듯한 음식물이 맛이 있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얻어먹는 말씀에 감격을 표현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에게가 아니냐”(17) 이 말씀으로 볼 때 진노하신 대상을 이미 과거에 불순종하여 멸망당한 사람들이었음을 지적하시고 이 은혜의 시대에 그런 안타까움으로 끝나서는 안될 믿음의 자세를 우회적으로 경계하시는 것이다.

언제인가 성경의 40이란 수는 늘 고난을 의미하는 숫자라는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므로 광야는 의롭게 살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이 세상으로 상징될 수도 있다.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이라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시고 광야를 거치게 하셨다면, 우리에게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는 영원한 영광의 천국을 약속하시고 이 세상에서 합당한 훈련을 하게 하시는 것과 다르지 않다.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절대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경계를 자주 말하고 있지만 사실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이시기 보다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독생자를 희생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은혜를 등진다면 거기에 남는 것은 당연히 진노뿐일 수밖에 없다.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에게가 아니냐”(17b) 사실 숫자에 샐 수 있는 군인으로서 이집트에서 나온 사람의 숫자는 60만명(출12:37, 38:26)이라는 엄청난 수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모두 충성됨의 시험 무대였던 광야에서 삶을 마무리하고 말았다.

또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에게가 아니냐”하심으로서 그들의 반응대로 이미 형벌 받은 대상들이었음을 증거하신다. 하나님 앞에서의 구원은 언제나 과거 완료형이며 계속 이루어지고 있음을 성경에서 볼 수 있다.

가장 확실한 예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신 주님의 직접적인 말씀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본받지 말아야 할 분명한 전례를 경계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거역하여 멸망 받지 말라 애절한 호소이다.



Ⅲ. 진노를 산 결과와 결론(18~19)

이제 세번째 질문과 답변에서는 이스라엘의 믿지 못한 불신의 결과를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은 항상 자신의 사랑의 초청에 응답하는 자들을 찾고 찾으신다. 무한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심지어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이미 예비하신 구원의 영광을 누리게 하시려고 과거에나 지금이나 찾고 찾으심을 깨닫게 된다.

이미 지난 v8에서는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경계하셨고 v11에서는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는 같은 경계를 주신 바 있다.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18) 이 말씀은 적어도 세가지의 범주로 경계를 주고 있다. 하나님의 맹세와 부정적인 선언, 그리고 그 대상을 순서대로 말씀하신다.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18f) 사람은 맹세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맹세를 금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마5:34)

좀더 구체적으로는 맹세하고 지키지 못함으로 죄를 지을 수 있음을 경고하셨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약5:12)

그럼에도 하나님은 맹세하시고 그 맹세는 어떤 일이 있어도 또 어떤 변화가 생길지라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맹세하시고 그 맹세에 매이시는 분이시지만 그럼에도 오늘 본문처럼 멸망당할 맹세의 대상이 되지 말라는 경계이다.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18m) 하나님께서 이집트를 탈출시키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의 말씀을 순종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주실 것을 맹세하신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신6:10~11)

그럼에도 그 귀한 언약을 외면했던 백성들에게는 그 약속에 들어오지 못하고 어디에 시체를 묻었는지도 모를 광야에서 저들의 삶을 마치고 마는 안타까움이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18b)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주시는 마지막 결론이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19) 말씀하고 있다.

사실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을 주실 때도 저들의 노력으로 일군 산업이 아닌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모든 것을 앞의 신명기6:10~11에서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들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다 맹세하셨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얻게 되는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 역시 우리가 한 것은 한가지도 없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이라는 데서 앞의 약속과 전혀 다름이 없고 OT에서도 그들이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믿지 못하므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 모두 엎드러졌다고 증거한다.

그럼으로 역시 비록 육신적인 OT의 언약조차도 믿음을 통하여 얻어진 것이었다면 이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통하여 말씀하시고 이루신 복음의 언약 역시 믿음을 요구하심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약속임을 확인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모자람이나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시다. 앞에서 거론해 왔던 광야에서조차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고 증거한다. “사십 년 동안 들에서 기르시되 부족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사오며”(느9:21; 신8:7~9b)

다윗은 자신의 삶에서의 경험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하였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시34:9) 격려한다. 이런 말씀은 성경전체에 풍성하게 널려 있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풍성한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고 하면서도 이 모자람이나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부요를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이다.

바울은 오늘 복음 속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10)라고 증거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비단 세상에서 유동적인 물질만을 기준 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시작과 끝이 한결 같으신 Α와 Ω라는 별명을 갖고 계신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계1:8) 그러므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튼튼히 붙잡고 산다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1:11)는 분명한 확신을 갖는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완악함으로 진노하시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계속 봐왔던 그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보고 들으면서도 다만 하나님을 진노케 함으로 약속에 이르기 전 진노로 그들의 인생을 마친 이집트를 빠져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광야의 한 무더기의 무덤으로 끝내는 전처를 밟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 복음 속의 백성들 역시 하나님의 영광의 천국을 약속 받고도 처음 믿음을 지속적으로 갖지 못하고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영생이 아니라 무덤으로 끝내는 안타까움을 남길 수도 있다.

하나님의 변치 않으시는 사랑에 응답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뿐이다. 이래서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 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한 것으로 완성된 복음 속에서는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