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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3:1~6 2022-02-27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천사는 유대인들에게 모세보다 더 두려워하는 존재였지만 어찌 보면 조금은 막연한 존재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천사보다도 이 역사 속에 인류의 구속을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비교될 수 없는 우월한 존재이심을 지난 2장 말미에까지 증거한 내용을 나누었다.

이제 3:1~4:13까지는 유대인들의 역사 속에 가장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인물이자 가장 존경하는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아 전달한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면서 온전치 못한 율법과 그것으로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모세와 비교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논증하고 있다.

오늘 내용에서는 비유적으로 모세는 집의 일부분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 집의 건축자로 어떤 집안의 부리는 일꾼과 그 집주인의 아들로서 비교하는 그리스도의 존귀함으로 대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시작부터 이 히브리서의 중심이 되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당부를 주고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중요한 사안일수록 더 깊이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다. 절대로 대강대강 대하거나 처리해서는 안되는 분이 바로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하나님 앞에 거룩한 존재로 세워주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시다. 믿음의 사람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의 깊이는 바로 그 사람의 믿음과 신앙의 깊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생각함에 있어서 모든 것의 출발점으로 판단해야만 할 것이다. 현재의 삶의 상태와 이유를 생각하고 출발점에서 멀어졌다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야만 하는데 사람들은 이것이 어려워서 “초심을 잃었다.”는 평가를 듣기도 한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당부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수시로 점검해야 할 바탕이다. 인생이 어렵고 힘겨울 때는 물론 평탄할 때도 삶에 있어서 나의 삶의 원인이 되시는 예수님의 하신 일과 그 구속의 역사에 나의 삶을 비춰보는 것은 매 순간 믿음의 삶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특히 세상의 일이 잘 될 때도 과연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 나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가치에 맞는가를 살펴서 잘나가다가 주저앉은 솔로몬이나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과 같은 안타까움을 다시 경험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영광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점검하지 못한 데서 결국 실패한 인생이 되었다면 잘나가던 바리새인이었던 사울은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아라비아에서 자신의 삶을 다시 점검하고 이름을 바울으로 바꿈으로 복음의 역사에 귀히 쓰이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지금 힘겨운 인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의 겪고 있는 이 어려움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하신 은혜에 합당한가 살피는 것이다. 비록 힘겹고 어려울지라도 복음에 합당하다면 이 어려움을 주님과 더불어 견뎌볼 만할 것이다.



Ⅰ. 믿는 도리의 사도(1)

이 말씀은 우리의 감격의 고백이자 귀중한 권면이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1f) 성경이 평가하는 자연적인 사람은 결코 긍정적인 부분이 없다. 항상 비극적인 내용으로 표현된다. 두 곳만 참고하면 “하물며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을 용납하시겠느냐”(욥15:16) 하였고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이라고 혹평한다.

그런 존재들인 우리를 “거룩한 형제들아!” 거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이라는 엄청난 특권은 우리 자신들의 가치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드셨다. 누가 말인가! 바로 2:5~18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의 죄를 담당해 주신 사랑과 은혜의 역사를 전제로 가능했음을 감격하고 있다. 본문의 헬라어의 순서를 따른 것이다.

왜냐하면 맨 앞의 “그러므로”는 바로 앞의 육신이 되셔서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바탕을 두고 이것이 가능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2:11f)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바울은 로마에 편지하면서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롬1:7f)고 표현한 바 있다. “거룩한 형제들아!”는 NT에서 다만 여기에만 사용되고 있는 표현으로 세상과 구별한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이런 표현을 볼 때마다 우리 자신을 살피게 된다. 나는 진정으로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존재가 맞는가! 본래는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인하여 하늘에 가치를 가지게 되었고 또 알게 되었다.

이런 이유를 앞에 두고 주는 당부의 말씀이 바로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당부인 것이다. 자격 없었던 우리를 거룩하게 구별된 자리로 옮기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세상의 썩어질 것들에 만 눈을 두고 " 마음을 두고 살던 우리를 영원으로 이끄시고 영원이 있음을 알게 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당부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될 것이다.

언제나 무엇이나 현재 나의 삶의 실마리를 풀어내야 하는 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이다. 왜냐하면 그분 때문에 우리의 가치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어떤 상황에 직면하든지 그 문제를 풀어내는 시작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를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라고 표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도[ἀπόστολος, 보냄을 받은 자, 전권대사, 사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셨던 12사도나 바울 같은 사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라는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음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앞의 2:17b에서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완벽한 대제사장으로 증거한 바 있다.

이 3~4장이 모세보다도 우월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OT에서 당연히 모세의 형 아론이 대제사장 역할을 하였지만 율법을 따라 제사로 백성들의 죄를 사함 받게 하는 역할을 하긴 했어도 역시 불완전한 모습을 너무나 많이 보여 왔었다(예: 출32장).

그러한 아론의 계보를 따른 세상에서 난 제사장이 아닌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보내신 보다 완벽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 이 히브리서의 대부분의 기록이며 중심이다(4:14~10:18).

우리가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거룩한 그리스도의 형제들이라면 온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러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고 우리의 믿음의 모범이시고 하나님 사이의 영원한 중보자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권면을 가볍게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Ⅱ. 모세보다 존귀하심(2~3)

이제 여기서부터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할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되고 신실하시며 영광스러운 존재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를 하늘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거룩하게 구별 받은 성도들이라면 적어도 이런 모세의 충성에 비길 수 없으신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본받아야만 할 것이다.

“그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2f)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보내시고 대제사장으로 세우신 하나님 아버지께 신실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것은 주님의 교회의 어떤 직분이든지 모범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교회의 어떤 직분이든지 세우신 이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시고 그 직분에 충성하신 것처럼 역시 같은 이유로 우리에게 직분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확신한다면 각자에게 직분을 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신실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교회 직분을 사람이 세웠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자신을 임직한 사람에게 충성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이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요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는다면 그 직분은 사실 가치가 없다. 왜냐하면 교회 직분은 세상의 어떤 것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2b) 앞에서 출애굽기32장의 사건에서도 아론과 모세는 확실히 달랐다. 그 죄로 인하여 백성들을 멸하겠다는 하나님의 심판의 선언 앞에서도 그러시려면 자신의 이름을 생명록책에서 지워 달라고까지 백성들을 중보 하는 모세는 사실 지도자로서 신실하였다. 아무래도 이런 모습 때문에 그의 신실성은 인정되었고 하나님께서 직접 대면하셨고 칭찬하셨던 사람(민12:7~8)이었다.

이런 모세의 자신을 세우신 하나님께 신실했음을 인정한 다음 이제부터는 이러한 모세와 비교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v6까지 증거하고 있다.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3f) 한 것은 모세가 하나님과 산 위에서 두번째 40일간 함께 거하면서 사람들이 그를 바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에 광채가 나게 되었던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잠시 하나님과 만남에서 나타났던 그 모세의 얼굴의 영광은 이내 사라지고 말 영광의 반사였다면 그 사라질 영광과 비교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요한 사도는 증언한바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바울 사도도 주님의 영광을 선포하기를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4:6)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빛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하셨다고 증거한다.

이미 1:3에서도 증거한 바 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좀 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모세의 차이를 비교하기를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3b) 즉,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그 집의 일원으로 역할을 하였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 집을 지으신 주인이시기 때문에 더욱 존귀하다는 말씀이다.

복음 속에 집은 교회로 이해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1~22) 여기에서는 완성되어져 가는 교회로 표현한다.

그런가 하면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집이요 이 집이 교회임을 확인한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3:15)

마치 지어진 집의 일부와 그 집을 지은 이의 차이는 진흙과 토기장이의 비유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집을 지으신 이가 원인이라면 그 집은 지으신 이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 차이를 생각할 수 있다.



Ⅲ. 종과 아들(4~6)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원인이 있는 것처럼 어떤 집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지은 주인이 있고 그 주인의 의도에 의해서 집의 형태가 다르게 지어 지기 마련이다. 이 v4의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내용은 모든 것이 우연히 있게 되었다는 진화론에 대해서도 변론이 되는 내용이다.

그런 다음 자연스럽게 다시 과거 율법을 통해서 장차 있을 복음을 증언한 모세의 하나님의 집에서 사환으로서 의 신실성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그 집을 맡은 아들로서 충성되고 신실 되게 일하셨음을 증언한다.

계속해서 모세와 비교될 수 없는 아들을 증거하다가 여기서는 갑자기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는 것이 앞뒤의 문맥들에 부조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4)

그럼에도 하나님의 집 건축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만물의 창조자요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소개하는 것이 크게 문제될 것은 없고, 과거 모세가 그 집의 사환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 집의 아들이시고 당연히 종과 아들 모두는 아버지께 속한다. 그럼에도 다음 v5~6은 다시 종과 아들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먼저는 종으로 하나님의 집에 신실했던 모세를 언급하고 있다.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5f) 이 말씀이 이미 모세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다.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이 히브리서를 시작하면서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1:1~2) 하였던 것처럼 모세도 하나님께서 장래에 완성될 구원의 복음을 주실 것에 대한 준비자로서 역할을 감당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인 모세의 증언을 예로 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18:15) 했던 것처럼 제한된 율법 속에서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이 주어 질 것임을 기대하며 증언하였다.

그럼에도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5b) 라고 평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갈라디아서에서 살핀 바 있지만 율법의 한시적이고 제한된 역할 안에서 종으로 신실하였다는 것은 충분히 존경할 만한 일이다.

사실 그 율법 속에서 모세처럼 충실하게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한 사람은 흔치 않은 것을 앞에서도 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여기 “종(θεράπων, 예배자, 치료자)”이라고 하는 표현은 NT에 이곳에 만 사용된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치료하신 역사를 “θεραπεύω”로 일컫는 것과 함께 동사형으로는 NT에 모두 44회나 사용되었지만 1세기의 흔한 돈으로 거래되었던 노예(δοῦλος)들과는 격이 다르다.

어쨌거나 모세는 하나님께 인정하셨듯이 복음 속에서도 존경받는 인물로 복음이전의 제한된 제도 아래에서도 인정받았다고 하는 데서 존경받을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아들로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감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와는 비교될 수 없는 다만 사람이었음에 불과 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6f) v1에서는 주님의 인성 즉, 사람으로서 표현인 “예수”로 묘사한 반면에 여기서는 기름부음을 받으신 하늘로 올리우신 영적인 명칭인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어떤 집을 위하여 일한다고 해도 분명히 역할로서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 집 위에서 관리자로서 총괄하고 다스리는 역할이 있다면 그 집안에서 여러 구체적인 역할들을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와 모세의 차이를 그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라는 표현은 앞에서 모세에게 사용한 표현의 반복을 피하기 위한 묘사로 “하나님의 온 집에서 아들로서 신실하였고”라는 표현과 다르지 않다.

마지막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실하게 일하신 그 하나님의 집의 일원으로 계속해서 남을 수 있는 자세를 우리 모두에게 권면해 주고 있다.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6b)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로 끝까지 남기 위한 3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본래 쓰여진 헬라어 순서대로 보면 “확신[παρῥησία, 밝히 드러냄, 신뢰, 확신, 대담함]” “자랑[καύχημα, 자랑, 자랑거리]” “소망[ἐλπίς, 기대]”를 굳게 잡으라는 것이다.

낱낱이 살필 수는 없지만 우리 성경에 첫번째로 거론되는 “소망”은 반드시 좋은 일반 기대하는 데 사용되는 낱말이 아니라는 것이 특징이다. 세상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집의 일원이 된 그리스도인이요 성도라면 이 믿음 때문에 땅에서의 당하는 좋은 일 궂은 일을 기쁘게 감당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미래는 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떤 결과에 상관없이 맡기고 즐거워하며 기대하는 삶이 될 것이다.

우리가 끝까지 굳게 잡고 살아야 할 “소망, 확신, 자랑” 이 모든 낱말들은 미래지향적이며 반드시 믿음과 함께 거론되는 용어들이다. 믿음이란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심과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확신이며 이런 믿음이 있을 때 자신을 자랑하는 대신 우리를 위해 구속의 피를 흘리시고 나의 수치를 대신 십자가에서 감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게 될 것이다. 이제 소망을 잃은 이 세상 보다는 쇠하지 않을 영광을 가지고 그를 바라는 자들에게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게 되어 있다.

이런 자세로 주님을 섬기고 따르며 살며 기대하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일원이며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본받는 자세이다.

죄인이었던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초청을 받은 자들이라면 자신의 입장이나 형편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순종으로 영광에 들어가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여 매 순간 우리 삶을 부르심의 처음 상태로 되돌려야 할 것이다.

불확실한 언약속에서도 철저히 순종하고 믿음을 지켰던 모세와 같이 신실하셨지만 그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셨음에도 순종의 아름다움을 보이셨기 때문에 더욱 영광을 받으셔야 합당하시다.

만물의 창조자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 속에서 모세는 아직 확실하지 않은 가운데서도 종으로 신실하였고 그리스도는 집을 맡은 아들이심에도 그와 같이 신실하셨다. 모든 것이 아들로 통해서 확실해진 이 복음의 시대에는 나를 나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희생하신 주님께서 주실 것은 모두 좋을 것이라는 확신의 믿음과 함께 주님을 자랑하며 가지고 오실 은혜를 기대하며 소망의 삶을 지속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