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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2:11~18 2022-02-20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바로 앞에서는 범죄로 타락하여 천사보다 못한 모습으로 추락한 사람들을 다시 영광과 존귀한 존재로 회복하시려고 죽을 수밖에 없은 인생으로 오셔서 자신이 스스로 천사보다 못한 가장 잔인한 죽음인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람의 존귀를 회복해 주신 역사를 기록하였다.

이제 여기서는 사람이 되어 구속을 완성하신 경로를 밝히면서 바울의 서신들에서는 언급하지 않은 이 히브리서의 특징 중 하나인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대제사장직을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17)는 것처럼 거론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 된 우리 모두와 같이 “형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11b)라는 표현처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위엄보다는 사람들과 같이 되심을 강조하고 있다.

그 이유를 시작부터 죄인을 자신의 피로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났다면 그 희생의 은총을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 역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났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겸손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와 같아 지시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적인 겸양을 그를 순종하고 따른다고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또한 본받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 자체가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자 그의 소유가 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실적으로 우리의 자리로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순종하고 본받고 따른다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최종적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입혀 주실 것을 믿고 이 땅에서는 수없이 권고하는 성경의 말씀처럼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Ⅰ.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난 형제(11~1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육신의 계보를 따라 태어난 우리 사람들과는 비교될 수도 없는 영광의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오신 사역에서도 자신을 늘 사람으로 표현하심을 본다. “인자[υἱοῦ τοῦ ἀνθρώπου, 4복음서에 68회정도]”

바울은 부활을 증거하면서 첫 사람 아담은 범죄하여 모든 사람을 죽음으로 이끌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살려 주시기 위한 둘째 아담으로 이 역사에 오셨다고 증거하고 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15:4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과 하나님의 백성들과 동격인 사실을 부활 후에 최초로 만나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말씀하심을 본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20:17b)

하나님과 다름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혜를 힘입어 거듭난 우리에게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11b)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17f) 라는 파격적인 겸손은 그를 따른다는 우리 모두를 교만할 수 없게 만든다. 그 이유를 다 하나님으로부터 났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11:12b)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11f) 여기 두번이나 반복되는 “거룩하게[ἁγιάζω, 깨끗하게 하다, 구별하다, 정결케 하다]”는 OT의 제사법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어이면서 이 히브리서 기자의 애용어(9:13, 10:10, 14, 29, 13:12)이다.

앞에서는 단수 능동으로 뒤의 것은 복수 수동으로 기록되면서 “거룩하게 하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1:6f) 앞에서 이미 언급한바 있다.

또 뒤의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바로 앞의 v10m에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거룩함을 입은 성도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둘이 모두 하나님의 예정과 계획 그리고 역사에 의해서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그런 결과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11b)라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역사를 인정하시는 그리스도의 겸손이지만 우리에게는 대단히 파격적인 대우이다.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 비록 사죄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하늘과 땅이던 차이를 생각하면 사실 너무나 황송한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해야 할까 부끄러워질 뿐이다. 세상의 불공평은 아무리 노력해도 해소되기 어려운 것은 사람들의 죄성(罪性) 때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죄를 얻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평준화될 수 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 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3:10~11)

그럼에도 교회 안에 직분을 계급으로 잘 못 이해하고 구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의 자리로 내려오셔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하셨는데 그렇지 못하다면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라고 할 수 없다.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12)라는 다음 절은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형제라 부르심을 증언하는 것으로 앞 절의 확인이면서 시편22:22 인용 그대로이지만 다만 “회중 가운데”가 “교회 중에서”로 바뀐 것뿐이다.

다윗의 이 시편은 사울의 핍박가운데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왕이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을 소망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다. 앞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록 자신의 희생으로 이루어지지만 그렇게 구별하신 성도를 형제라고 격이 없이 가까이하시는 것이다.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13) 이사야 예언(8:17~18)의 인용으로 그리스도와 성도 간의 형제됨을 계속해서 증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역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와 아들과 그의 몸 된 교회 간의 긴밀함을 증거한다.

이사야 당시에 적들의 공격에 직면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의지하여 어려움을 극복하자고 격려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의지하여 구속을 완성하셨고 그로 통해서 탄생되어진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형제 됨을 확인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형제됨이라는 이 놀라운 특권은 분명 우리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엄청난 희생으로 거저 얻은 은혜임을 안다면 이제는 우리가 이러한 자세를 따라야할 차례이다.



Ⅱ. 마귀를 멸하고 모두에게 자유를(14~15)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심으로 성도들이 단순히 형제가 되신 것만이 아니라 그것은 적어도 두가지 목적이 더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첫째는 마귀를 멸하려는 것과 두번째는 일평생 죽음의 공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죽음의 두려움에서 놓아주시려는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14)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였던 사람이 사탄의 부추김으로 하나님을 거역하여 생령(生靈)이 육신(肉身)으로 전락하였음을 앞에서도 말한 바 있다. 결국 신령한 존재가 육의 사람으로 떨어진 것은 마귀의 역할이었고 이것을 다시 본래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세계에서 반란을 일으킨 불순종의 마귀 사탄을 멸함으로 이루어 질 것임을 아담의 범죄후에 이미 하나님께서 증거하셨다.

그것이 최초의 복음이라고 하는 창세기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신 언약이다.

이 예언 자체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자의 후손” 즉, 사람이 되실 것을 증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14f)으로 육신이 된 사람들을 영적인 존재가 되게 하시려고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이라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이 되심은 죄인이었던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로 끌어 올릴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흐트러진 영적인 세계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 마귀를 멸하시기 위해서라는 보다 최종적인 목적을 가지고 계셨다.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14b) 그러므로 사람을 죽음으로 내 몬 마귀의 세력을 완전히 멸하시기 위해서 육신으로 오시고 죽으심을 통해서였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과 가장 가까운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3:8b)는 요한 사도의 증언이다.

이러한 요한 사도의 증언은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14)라는 말씀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를 멸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이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죽으심의 또다른 하나의 목적이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15)는 비극의 회복을 위해서임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특히 여기 “놓아주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자신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신 말씀과 같은 의미이다.

어느 시대 어느 땅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은 덜 했다 하더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이 죽음의 공포는 사람들을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 잡히게 하여 종노릇 하게 만들어 왔다. 그런 이유에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살아 있는 평생 동안을 죽음의 공포에 매여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니 참으로 불쌍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고가 일어나 사람이 죽거나 병으로 죽어도 남의 일처럼 여길 수 없는 것은 모두가 다 이 죽음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 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죽음의 창조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죄를 범하기 전의 에덴은 전혀 죽음의 공포가 없는 곳이었기에 “에덴(희락의 동산)”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생령인 사람을 죽게 만든 마귀는 멸망 받아야 되는 것은 생명의 창조자 이신 하나님께도 합당한 것이다.

여기에 대한 분명한 해답이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증거한 바울의 고백이다.

죽음의 원인인 죄를 해결 받은 모든 사람이 들어갈 미래의 약속을 이사야는 다시 이렇게 선언하였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11:9, 사65:25)

이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음의 권세인 죄를 해결 받은 자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었을 뿐이다. 할렐루야!



Ⅲ. 중보와 도우심(16~18)

다시 천사 이야기로 되돌아 간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으로 부리시는 천사와 비교할 수 없는 창조주요 구세주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내용이 이 2장까지 주님의 영화로우심과 우월하심의 논증이다. 이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마귀를 멸하시고 죽음의 공포에서 놓아주려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그리스도의 나라를 상속할 사람들이지 천사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증거하면서 마무리되고 있다.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16) 천사는 육체를 갖지 않았고 죽을 수도 없는 영적인 존재들로 사람보다 능력 있는 피조물들이지만 이미 앞에서도 v14에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라고 그들의 역할을 분명히 언급한바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독생자가 사람이 되시고 죽음의 고통까지 맛보시면서 그들을 범죄케 한 마귀를 멸하시고 사망의 두려움에서 놓임을 받게 하시는 것은 당연히 약속의 자손 즉,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16b)는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17f)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해결 받아야 하는 대상은 마귀로 인하여 범죄한 사람들이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인 제사장은 아론의 계보에서 난 사람으로 감당하게 해 오셨다.

이런 이유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벽한 사람이 되실 필요가 있었고 이 땅에 사는 사람이 당해야만 하는 온 갓 불편을 그대로 감당하신 것이다. 이 히브리서 기자도 그와 같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는 증언이다.

그렇게 되신 이유를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17m) 함으로서 이제껏 OT에서 불완전했던 아론 계보를 따른 제사장들의 부족함과는 비교될 수 없고 대대로 그 역할을 바꿔 감당해야 했던 불완전을 완전히 해소하신 것이다. 이 부분은 앞으로 이 히브리서에서 수없이 거론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자비”의 성품은 하나님 쪽이시라면 그 약속에 “신실한” 것은 사람 쪽의 믿음직한 제사장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최종적인 역할은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17b)한 것이다. 우리의 완전하신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속량하시려 하신 것임으로 그의 백성이 되는 것이 먼저 중요하다. 이러한 백성들의 죄를 해결하는 문제가 또한 “하나님의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효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18) 고달픈 인생을 돕기 원하시는 우리 주님을 여기서 다시 확인한다.

사실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육신을 가진 사람들처럼 고난 받으실 이유가 하나도 없으신 분이시다. 그럼에도 어쩌면 영원한 영광에 계셔야 할 주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심은 처음부터 땅에서 난 우리들보다 더 많은 시험과 고난을 당하셨을 것이다.

흔히 쉽게 생각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광야에서 받으셨던 40일간의 시험만을 그분이 당하신 시험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님의 시험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으셨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시험이 가장 큰 시험이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고난이라는 것을 알기조차 못하셨을 주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형벌이라고 하는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27:40)고 조롱하는 것이 가장 견디기 힘든 시험이었을 것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이를 잘 아는 마귀 사탄은 이 사실을 항상 악용하였다. 사실 마태나 누가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주님의 공생애 시작에서 부터의 시험도 이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뛰어내리라”(마4:3, 6; 눅4:3, 9) 어쩌면 이것은 사실을 부정하라고 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에 어려우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지혜롭게 그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오늘 우리에게 “내가 이긴 것처럼 너희들도 이길 수 있다.”고 격려하고 계시다. 또 계시록의 영광스러운 약속들도 [이긴 자들, 계2:7, 11, 17, 26, 3:5, 12, 21, 21:7]에게만 주시는 언약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주 잠시 영광과 위엄의 보좌를 버리시고 우리와 꼭 같은 사람으로 오셨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렇게 보내셨고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나는 주님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며 찬양하고 옆의 지체들을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자랑스럽게 여기는가?

혈과 육과 관계없으신 주님께서 사람을 범죄하여 죽게 만든 마귀를 멸하시기 위하여 우리와 꼭 같은 형상의 육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평생을 죽음의 두려움을 가지고 죽음의 공포에 붙잡혀 사는 우리를 자유 하게 하시려고 오셨다. 나도 마귀를 멸하는 일에 일생동안 충성하고 죽음의 공포속에 매인 사람들을 놓아주기 위해 최선을 다 해야 하겠다.

예수님은 흠 없으신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하여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시고 나(우리)의 죄를 속량하는 일을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우리를 붙드시고 인생의 고난에 힘겨워하는 모든 자들을 붙들어 승리케 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