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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1:1~3 2022-01-16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갈라디아서가 이방인을 상대로 한 유대인들의 할례와 율법으로의 부추김이었다면 이 히브리서는 이미 OT성경에 익숙해 있는 유대인들에게 그 무수한 OT성경의 예언의 성취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전제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며 하신 사역과 역할을 OT성경을 인용하면서 확인시키고 있다.

이 히브리서는 믿음을 강조하는 책이면서 무엇보다도 OT성경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강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은 바로 이 믿음으로 행한 사람들임을 증거한다. 그런 이유에서 유대인들에게 11장은 우리에게 보다도 더욱 중요하다.

그들이 믿음으로 행한 것에 대해 논증하고 믿음 없는 것에 무익함을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4:2)고 경계한다.

하나님께 인정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히11:1~2) 증거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11:6)고 증거한다. 즉, 믿음 없는 어떤 행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신앙의 자세이다.

이 히브리서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론하지만 한 곳의 독특한 인용이 창세기14:17~20을 인용하고 있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7:3)는 내용이다.

물론 v4~6에까지 계속되고 있지만 이 멜기세덱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는 어쩌면 이 히브리서 전체를 비교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저자와 수신자나 기록한 동기나 목적 그리고 기록한 시기는 물론 기록된 장소조차도 분명하지 않은 데서 앞의 멜기세덱과 같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전체적인 흐름의 사상은 바울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다른 면을 역시 가지고 있다는 데서 저자를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서신이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은 내용도 더러 있다.

바울의 대부분의 서신들은 자신의 이름을 분명히 밝히고 서신을 받는 대상도 분명히 거론하고 있지만 이 히브리서에서는 그런 부분을 찾아보기 힘들다.

또 다른 면에서 바울 자신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 받았기 때문에 주로 유대인을 상대로 하는 이 서신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굳이 밝히지 않는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주경학자들도 있긴 하지만 그렇게 설득력이 있은 것 같지는 않다.

바울의 편지들과 좀 크게 다른 부분을 예를 든다면 바울의 서신들의 통일된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죄인 된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는 증거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OT의 제사장으로 표현하는 이 히브리서의 가르침이 바울의 신앙과 다른 것은 아니지만 그의 서신들에는 볼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이 히브리서의 사상은 분명해서 시작부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부리시는 천사와 비교될 수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한 모세와도 비교될 수 없는 주님의 먼저 계심(先在)에 대한 우월성을 증거하는가 하면 OT의 대제사장과도 비교될 수 없는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다르지 않음을 증거하고 있다.

OT 성경 에스더 서에는 하나님이란 명칭이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지만 자기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역사를 기록하는 것처럼 분명히 복음을 증거하면서도 복음의 핵심이 되는 “십자가”는 동사와 명사로 단 두(6:6, 12:2)번 거론하는 것 역시 이 히브리서의 특징이라 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복음을 거역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도 다른 서신과 다르게 아주 직접적으로 강하게 경고하는 내용(10:19~12:29들도 볼 수 있다.

NT성경 중에 가장 아름다운 문체가 사용되고 믿음의 논리에 전혀 흐트러짐이 없다. 마태복음이나 야고보서처럼 글 쓴 대상이 유대인인 만큼 NT성경 중에 OT성경을 가장 많이 인용한 것 역시 특징(직접적인 인용과 상황을 인용하는 것을 합쳐서 74회 정도)이지만 그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시편을 20번이나 인용하였다.

저자는 자신을 밝히지 않았지만 OT의 신앙과 성경에 능통하고 바울과 크게 다르지 않은 복음의 이해와 함께 당시 그리스 문화의 중심이었던 알렉산드리아의 영향을 받아 헬라 사상을 충분히 이해하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랬기 때문에 희랍어에 능통하여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하였고 OT 성경을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된 LXX역으로 대부분 인용하였다. 바울의 저작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히브리서의 저자가 바울과 늘 함께 동행했던 디모데와도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13:23)

내용을 대략적으로 정리하면 시작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과 품격을 거론하는데 1:1~4:13 만유의 후사이시면서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천사와 비교될 수 없는 존재로(1:4~2:18) 율법의 도구로 역할 하였던 모세와도 비교될 수 없는 바로 그 율법을 주신분으로(3:1~4:13) 주님의 존귀를 증언한다.

다음으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증거하는데 4:14~10:18, 먼저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직(4:14~7:28),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새언약(8:1~13), 진정한 성소와 희생을 완성하신 그리스도(9:1~10:18)를 순서적으로 증거한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신앙의 논리를 바탕 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천을 당부하는 부분으로 놀라운 은혜로 주어진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당연함을 증거하는 내용이 마지막부분이다 10:19~13:25.

먼저는 이러한 구원의 역사에 대한 믿음의 확신을 당부하고(10:19~11:40) 그러나 믿음의 삶은 끊임없는 믿음의 인내가 필요하며(12:1~29) 그러한 실천을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사랑으로 행할 것을 권고한다(13:1~25).

이러한 전체 내용을 중심해서 기록의 목적을 정리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흐트러짐을 바로잡고, 특히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메시야)로 세우셨음을 증거하고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에 확신을 주기 위함이다.

오늘 보게 되는 첫 부분은 서론이면서도 어떤 선지자의 계시보다도 친히 오셔서 직접 말씀하시는 완전한 구원자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먼저는 불완전하지만 OT 성경의 여러 모양으로 자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시려고 하셨던 그림자로서의 계시를 인정하고, 물론 여기에 불완전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불완전이 아닌 하나님을 알리는 도구로서의 불완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역사의 마지막에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육신을 입고 이 역사에 오셔서 말씀하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상속자로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이 사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어졌음을 증거한다.

그리고 좀더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내시는데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아들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보이셨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말씀으로 만물을 운행하시고 붙드시며 사죄의 역사를 이루시고 영광의 하나님 우편에 승천하셨음을 말씀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역사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반드시 그를 바라는 자들에게 다시 오심을 잊지 않고 증언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9:28)

먼저는 단 3절을 다루고 있지만 사실 히브리서 전체 내용이 여기에 압축되어 있다. 가장 완전한 계시자일 뿐만 아니라 이 역사의 창조자로 시작과 끝이 되시면서 이 역사에 내려와 사람이 되시고 죄인 스스로 이룰 수 없는 구원을 완성하시고 본래의 영광의 자리로 되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Ⅰ. 여러 계시의 목적(1)

마치 요한복음의 첫 마당(요1:1~18)에 버금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성과 궁극성을 선포하는 것으로 들린다. 절대적인 계시 자체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완전하지 못했던 과거의 계시와 대비시키고 있다.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에게 알림에 있어서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여러가지 방법으로 나타내셨기 때문에 그것을 종합한다고 해도 사실 완벽하게 하나님을 이해할 방법이 없었다. 마치 속담에 “소경이 코끼리 만지기”라는 표현과 견줄 수 있다.

선택된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시를 주셨지만 그 선지자들 조차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임금에서부터 뽕나무를 배양하는 사람까지 그 범위를 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람이 하나님을 직접 뵐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런 이유에서 OT의 계시는 아무리 분명하다고 해도 달빛아래 보는 정도밖에 이해할 수 없는 데서 “달빛 계시”라고 하였을 것이다.

또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이 의미하는 바도 그렇다. 최초로 죄인을 구속하시겠다는 창세기3:15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완성되고 성령께서 오셔서 직접 가르치시는 오늘과는 다르게 당시로서는 아담과 하와가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약속은 아브라함으로 통해서 율법은 모세에게 또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셨지만 때로는 꿈으로 표적이나 기적으로 하늘의 징조로 말씀하셨지만 이렇게 다양하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이해가 어려울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1b) 그럼에도 여기 “조상들에게”는 유대인들의 조상으로 특정하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끝임없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셨고 지금도 말씀하시고 앞으로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은 말 못하는 계시를 줄 수 없는 우상들과는 분명한 구별을 볼 수 있다.

결국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때로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믿음의 조상들조차 이해하지 못한 때도 있었음을 역사 속에서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의 선지자들 만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이스라엘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이방의 선지자나 임금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셨던 하나님이시다. 박수 무당과 다름이 없는 발람 같은 이방 사람이 그렇다.

때로는 요시야에게 이집트 왕 느고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대하35:21b) 하신 말씀을 믿을 수 없어서 대항하다가 결국 죽고 말았다.

유다 말년에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보라 내가 북쪽 모든 종족과 내 종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주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을 놀램과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원한 폐허가 되게 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25:9) 하신다.

하나님을 전혀 알지도 못하는 이방 왕을 내 종이라고 하시면서 “내가 이 모든 땅을 내 종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주었다”(렘27:6) 말씀하시고,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 목으로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메지 아니하는 백성과 나라는 내가 그들이 멸망하기까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 민족을 벌하리라”(8)는 말씀 역시 이스라엘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 모든 내용을 통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우리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한 계시를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Ⅱ. 만유의 상속자요 창조자(2)

불분명한 계시의 역사를 지나서 이 모든 역사의 말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꼭 같은 사람으로 오셔서 직접 말씀하셨다는 확인과 그 최종의 계시자는 만유를 이어받을 상속자이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세계를 지으셨다고 증거하신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2f) 이 말씀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끝 즉, 마지막에 오셨다고 이해하지만 진정한 마지막인 다시 오실 재림의 때와는 어느 정도의 간격인지는 알 수 없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 말씀하신 하나님”은 그와 대조되게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오셨고 그러므로 이 말씀은 또 최종적인 계시를 의미하기도 한다. 여전히 변함이 없는 한가지는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함으로서 대상은 다르지만 여전히 말씀하시는 살아 계시고 자신의 뜻을 끊임없이 나타내시는 하나님을 뵙는 것이다.

그런 다음 마지막에 완전한 계시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을 해설하고 있다.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2b)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NT성경이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도 이 계시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위치를 서두에서부터 선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2가지의 아들의 위치를 증거하고 있다. ①“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상속은 당연히 아들의 권리이다. 여기에 종은 상속자가 될 수 없다는 논리들은 성경 도처에 기록되고 있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b) 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상속자 되심을 확인하신 바 있다.

②“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창조의 근본이시요 원인 되심을 증거하고 있다.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품격을 증거하는 요한복음1:1~3이 이를 분명히 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바울을 통한 그리스도론을 역시 그의 옥중서신에서 같이 볼 수 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

그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증거했던 그리스도는 이제 직접 오셔서 그분이 상속자요 창조자 되심을 말씀하시고 확인하셨다.



Ⅲ. 우주를 운행하시며 사죄의 역사를 이루심(3)

이 부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품위와 사역을 보다 구체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빛이신 하나님의 영광으로 계시면서도 만물을 운행하실 뿐만 아니라 죄인 된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죄를 이루시고 영광의 보좌 우편에 올라가신 구세주로서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사역을 인한 찬양의 고백을 드리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3f) 하나님의 존재와 인격에 관해서 묘사할 때는 대단히 조심스러운 것은 적절하지 못한 표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령한 것들을 묘사하는 것은 조심스럽고 또 온전치 못하다. 영광의 광채나 본체의 형상 같은 것들은 아무리 시적(詩的)이라고 해도 사람의 언어로는 완전한 묘사가 불가능하다.

과거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비로소 볼 수 있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요한사도를 통하여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하심으로서 자신이 빛이실 뿐만 아니라 빛이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조차 어둠에 다니지 않는다 하고 빛을 약속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묘사한 저자는 이제 그분의 사역을 크게 3가지로 거론하고 있다. ①“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이 우주 만물이 저절로 돌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주님께서 붙들어 운행하고 계심을 증거한다.

만물을 운행하시는 도구는 바로 말씀인데 여기 사용된 “말씀[ῥήμα, saying, 말씀하신 말씀]”은 일반적인 “말씀[λόγος]”과는 조금 다른 표현이다. 주님의 선포된 말씀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능력이 있고 그 이미 선언하신 말씀으로 만물을 운행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만들어진 질서를 따라 운행하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것은 창조시부터 이 우주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지속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그럼에도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역은 두번째와 세번째이다. ②“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영광의 보좌를 떠나셔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죄를 대신 감당하신 前無後無한 사역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가장 귀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역사이다.

이렇게 이 땅에 내려오심이 죽음을 위하여 낮아진 것이라면 ③“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는 표현은 부활하여 승천하신 구속의 완성의 사역이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으로 사역을 끝내셨다면 사실 인류에게 더 이상의 소망은 없었을 것이다.

바울이 여기에 대해 증거하는 내용을 살필 필요가 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 범죄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죽으시고 의롭다 인정함을 받게 하시려고 살아나셨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럼으로 사역의 완료를 위하여 부활하셔서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하신 것이다. 특히 이 표현은 NT에 그리스도의 승천에 반영되는 시편110:1의 인용이다.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는 표현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주님의 희생을 통하여 살아난 성도들을 위하여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는 은혜의 역할도 하신다.

과거 여러 모양과 방법을 통해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최종적인 계시를 주셨다. 그럼으로 이제 기록된 구속의 역사 외에 더 이상의 계시는 없다는 믿음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가장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하셨음에 감사드려야 한다.

그 마지막으로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상속자요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 만물은 물론 영적세계의 보존과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시고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오르셔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중보하시는 지속되는 사역에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