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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갈 6:11~18 2022-01-09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십자가가 복음의 핵심이라면 할례는 율법의 중심이었다. 처음부터 봐왔듯이 바울이 갈라디아에 이 편지를 써 보낸 이유는 생명의 법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를 위한 십자가를 거절하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저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여 다시 복음으로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이미 잃어버린 것들의 추억을 가지기도 하지만 율법과 할례는 그런 것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 세상과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생명의 빛의 법을 주시면서 이미 폐기해버린 과거의 의미 없는 것들을 위해서 애쓰는 저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고 사실적인 삶의 원리를 제시하고 서신을 마무리하는 부분을 다루게 된다.

전체 내용이 그랬던 것처럼 결론을 주고 있는 내용 역시 다르지 않다. 할례의 무가치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십자가의 귀중한 가치와 그 십자가로 인해 변화된 삶에 그 십자가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것이 바울 자신이 친히 겪고 경험한 사실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11)고 호소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를 지심으로 사죄의 은총을 이루시고 부활하신 후 부활을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양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에 창자국을 보여주시며 믿음을 주셨던 것처럼 바울은 그 주님께서 지셨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몸에 남겨진 흔적을 자랑함을 듣는다.

어떤 사람들이 몸에 흉터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미용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오히려 미용을 위한 성형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분명히 인생의 중요한 고비였을 것이고 그 흔적으로 인하여 더욱 조심하고 경성하며 앞으로의 삶을 살 각오를 새롭게 할 것이다.

우리 사람들은 대개 어느 것이 먼저냐 하는 순서에 민감하다. 그러나 좀더 바람직한 것은 순서보다도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력을 더 소중하게 여길 수 있다. 또 새로운 것이 나오면 과거의 것은 낡아지고 버려져서 가치를 잃는 것들도 많다.

요즘은 PC나 스마트폰의 운영체제에서 그런 것들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세상속에서의 삶이 이렇다면 영원으로 연결된 영생의 법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문명화된 생활 속에서는 민감하면서도 영적인 부분에서는 너무나 둔감한 것도 사실이다.

오늘은 순서적인 내용보다는 서로 연결된 의미로서의 내용들을 다루면서 이 말씀의 마무리를 살피고자 한다.



Ⅰ. 할례는 육체의 법일 뿐이다(12~13, 15).

앞의 3:~4:에서 이미 신앙의 논리에 있어서 율법주의를 경계하였고 그것을 실천해야 할 것을 5:1~15에 역시 다룬 바 있지만 이제 서신을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을 본다.

율법의 중심이면서 가장 오래된, 정확하게 말하면 율법을 주시기 이전부터 주어진 계율이 바로 할례였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이 아직 이삭을 낳기 전(창17:)부터 같은 믿음의 백성이 되는 방법으로 할례가 명령되어졌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이 할례를 이행하지 않으므로 죽을 뻔한 일도 모세의 형편에서 볼 수 있었다.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출4:24~26) 사실 이렇게 과거 OT에서는 할례를 행하지 않음에 진노하시기까지 하셨음을 본다.

갈라디아의 할례자들을 향하여 바울은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12) 하였는데 여기에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εὐπροσωπέω, εὖ 좋은 + πρόσωπον 앞, 얼굴, 겉]들”은 더 쉽게 말하면 겉을 좋게 보이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자랑이 되고 십자가는 좋아하지 않는 미련하고 거리끼는 것이 됨을 본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하는 것으로 봐서 강제적으로 자신들의 뜻을 성취시키려 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럼으로 저들의 얼굴을 내려는 것으로 신앙에 있어서는 안될 겉치레였다는 것이다.

최종적인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12b)사실 당시에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련한 하나님의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신비인 십자가를 가장 처참한 사형도구로만 생각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상종해서는 안될 사람들로 여겼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그대로 옮기고 있는 바울의 기록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1:23, 18)라는 것은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전달해 주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십자가는 물론이고 나무에 달려 죽은 자를 저주받은 자로 여긴 데다가(3:13; 신21:23) 그들이 로마의 법을 빌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에 대해 십자가를 증거할 때마다 거리끼는 것이었다.

그들도 본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인정한다가 이제는 유대인들의 간교한 부추김으로 복음을 떠났지만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을 감당했다는 복음적인 요소를 전한다면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당하는 것은 불을 보듯 환하기 때문에 영원과 생명은 생각지도 못하고 편한 쪽을 선택했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다시 할례를 받게 하고 자신들의 얼굴을 내려고 했던 유대인들조차도 사실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고 또 지킬 수도 없는 것이었음을 그대로 책망하는 바울의 반박을 듣고 있다. “할례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13)

예루살렘교회에서 사도들과 장로들의 모임에서도 베드로가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행15:10) 증거한 바 있다.

바울은 이미 2:11~13에서 베드로의 안디옥에서의 일을 거론하고 책망한 바 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15) 바울의 논리에서 이 말씀은 어렵지 않다.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건 할례밖의 이방인이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은총을 통해서 거듭 태어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만이 하나님 나라에서 가치가 있다는 가르침이다.

오늘의 내용의 중요성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선생인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던 사람의 거듭남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내용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비록 할례를 받은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난 사람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듭 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가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함을 주님과 더불어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죄인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창조를 받아야 하나님 나라에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Ⅱ. 십자가만이 삶의 이유(14, 17)

누구보다도 율법과 할례에 자부심을 가지고 바리새인 된 것을 자랑하고 역할을 감당하려던 바울의 변화야 말로 가치관이 완전히 뒤집힌 모습을 가장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다. 육신적으로 전혀 모자람이 없는 가문과 부귀와 명예를 다 가졌던 바울의 가치의 변화는 모든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

바울의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7~9)는 고백은 그의 가치를 가장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는 고백이다.

이런 확실한 목표와 삶의 방법이 되었기 때문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14f)라는 진실된 신앙 고백을 하고 있고 갈라디아 교우들에게도 호소력이 컸을 것이다.

이런 자신의 자랑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자랑이 가능한 것은 하반절에 그 이유를 말하고 있다. “…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b)

이미 앞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선언한 바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신앙하는 사람들이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존재라는 고백은 하지만 세상이 자신을 향해 죽었다는 표현이나 고백은 사실 들을 수 없다. 그럼에도 믿음의 사람 바울은 자신이 죽은 것처럼 또한 세상도 자신에 대하여 죽어 가치를 잃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세상의 가치는 자신 안에서 없어지고 자신도 세상을 향하여는 죽은 존재이기 때문에 육신적으로는 자신과 세상 상호간에 모두 죽은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찬송이 바로 “주 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아멘”(찬288:3)

믿는 우리조차 받아들이기 쉽지 않지만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을 뿐 아니라 세상도 자신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에 더이상 세상의 가치도 나에게는 없는 사람이다. 이런 이유에서 나도 세상도 없는 사람으로 오직 하늘의 가치만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된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자신의 몸에 가진 사람이다. 이것을 바울은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17)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흔적[στίγμα, 지우기 힘든 표식(소유표시로 짐승에게 찍은 불 도장, 문신) ←στίζω (찌르다)]” “…내 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표준새)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을 때 양손과 양 발에 못자국을 가지고 계시고 옆구리에 창에 찔린 자국을 가지고 계셨듯이 바울도 이런 흔적들을 자신의 몸에 가지고 있었다고 증언하는 것이다.

즉, 할례는 남근의 끝에 포피를 베는 것이었다면 바울 자신은 육신적으로는 모양이 없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한 흔적을 여러 개 가지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행14:19),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고후6:5)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ῥαβδίζω, 몽둥이로 때리다]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고후11:24~25f)

흔적(흉터)은 비록 모양은 없는 것이지만 극적인 상황을 가장 분명히 지우지 못할 정도로 남아 있게 되어 그 상황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불에 데인). 오늘 여러분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은 무엇인가? 이런 흔적은 모방할 수 없는 것이고 타인이 가질 수 없는 것이다.



Ⅲ. 축복(16, 18)

바울은 비록 갈라디아 교우들이 자신이 죽음을 무릅쓰면서 복음을 전했는데도 율법주의자들의 부추김에 넘어가 복음을 버리고 또 다시 할례자로 돌아가려는 그야말로 얄미운 사람들이었음에도 자신의 권면을 다 준 후에는 여전히 축복하고 있는 내용을 마지막으로 본다.

어쩌면 이것이 바울의 너그러운 마음과 깊은 생각(度量)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신앙적 논리는 어떤 경우에서도 타협을 모르지만 그러면서도 바다와 같은 한없이 인자함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아 그대로 행동하고 사는 것을 본다.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서 찾는다면 역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16) 그럼에도 바울의 축복의 대상은 분명하다.

①“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이다. 여기 “규례[κανών, 다림줄, 자, 기준]”은 성경 66권을 정경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 낱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진리, 구원의 진리인 십자가로 거듭난 기준(십자가의 도)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이다.

②“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은 야곱이 밤에 얍복강을 건너기 전 환도(環刀), 뼈[골반과 무릎 사이에 뻗어 있는 넙다리의 뼈, 우리 몸에서 가장 길고 큰 뼈]가 어긋나게 되면서까지 천사와 씨름하면서 얻어낸 이름이다.

결국 이것이 이집트에서 나오면서 나라의 이름이 되었고 물론 옛 언약 속의 이스라엘은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야 그 나라 사람이라고 인정받았지만 하나님은 그 언약과 전혀 다른 언약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실 것을 이미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셨다(렘31:31~33).

그리고 바울 사도는 “…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9:6~8) 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난 사람들이 참 이스라엘임을 증거한 바 있다.

특히 이 갈라디아서가 계속 할례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앞에서도 여러 번 말한 바 있지만 할례 역시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2:29f)하여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닌 영적인 할례를 역시 강조하고 있다.

그럼으로 축복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스라엘” 역시 육신의 기준 즉,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난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고 과거 할례처럼 죄를 베어버린 성령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들에게 비는 첫번째 복이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하였다. 이 두 단어는 대부분 붙어 다니는 형태를 다른 서신들에서 앞뒤가 바뀐 형태로 쓰여진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딤전1:2; 딤후1:2)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요이1:3)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유1:2)

하나님의 긍휼 즉, 불쌍히 여기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음 받고 하나님과 자연과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는 평화를 누리는 것이야 말로 육신의 기준에서 살지 않고 영으로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첫째의 복이요 최고의 복이라고 할 수 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18) 앞에 인용했던 다른 서신들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에서 빠져 있던 은혜가 드디어 여기에 등장한다. 은혜는 분명히 감당할 수 없는 선물이지만 어떤 선물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야 말로 어떤 것과 도 비교될 수 없는 선물이요 은총이다.

믿음에 있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 있으면 다른 모든 신령한 것들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진리는 좋아하고 사랑하면서 이 은혜를 누리지 못함으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는데 역시 안타까운 사람들이다.

진리(예수 그리스도-요14:6)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만 오지만 그것을 순종하고 지키는 것은 사람들의 몫이고 진리를 순종하며 사모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아끼지 않으실 것이다.

할례는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율법에서조차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10:16, 30:6; 렘9:26)한 것처럼 신앙은 겉치레가 아니라 속사람의 변화이고 죄를 베어버리는 할례를 받아야만 천국의 소망을 가질 수 있다.

결국 OT에서 육과 NT에서 영의 할례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질 수 있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위로부터 거듭남 만이 하나님께나 우리에게 진정한 가치이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자신이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세상도 자신을 향하여 죽었기 때문에 세상의 가치를 잃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하늘로부터 거듭나게 하신 그리스도만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자랑이며 남이 아닌 나에만 주신 십자가로 인한 흔적이 중요하고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축복의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삶의 기준인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에게 복이 임하고 회개함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긍휼로 사죄한자들에게 평화를 누리게 하신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최고의 은혜요 선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모두의 자랑이요 선물이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