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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갈 6:6~10 2022-01-02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지난 시간에는 갈라디아 교우들의 간의 부조화의 관계를 서로 짐을 짊어짐으로 감당하여 한 사람이라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권면과 함께 먼저는 각자가 자신의 짐을 감당하므로 서로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하는 믿음의 좀더 실천적인 삶의 관계를 다루었다.

오늘 나누는 내용이야 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의식하는 신앙의 삶을 당부하고 있는데 우리가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속임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좀더 의식하여 우리 각자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들을 위하여 애쓰는 것 보다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성령을 위하여 심을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냥 미래가 아닌 영원 속에서 각자는 현재에 심은 것을 반드시 추수할 것이라는 확인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따라 사랑의 법을 이루기 위하여 선한 일을 지속하고 특히 지체된 사람들을 위하여 더욱 그리할 것을 부탁하고 있다.

오늘의 내용의 핵심은 두가지이다. “계속 심어라!” 그래야 거둘 것이 있는데 나 자신이 기뻐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심어라, ‘당장에 열매를 거두지 못한다고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것을 심으면 약속된 시기에 반드시 추수하게 될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할 한가지는 하나님을 바보로 취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심기는 심는데 대부분 사람들을 의식하며 심는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어리석은 삶이요 행동이라는 것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이면(裏面)까지 꿰뚫어 보시기 때문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참으로 한 해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이다. 신앙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하나님을 기쁘시게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지만 세상적인 이치로 하나님을 대하려고 하면 절대로 안된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오늘은 말미에 결론이나 정리를 하지 않고 듣는 각자의 몫으로 남기려 한다.



Ⅰ. 스스로 속이지 말라!

첫번째의 주제가 바로 하나님을 의식하라는 경고의 교훈이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모시라!”는 말을 하게 되는 데 그 이유는 상당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겨야 될 귀중한 대상이 아니라 나를 섬기기 위해 영광의 하나님을 이용하려 들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종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주인공 아라진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낡은 램프를 긁으면 지니가 나타나 그 어떤 문제든지 해결해 주는 그런 존재로 하나님을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셔서 절망의 지옥으로 가야 마땅한 우리들을 천국 영광의 백성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또 그분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어 응답해 주시는 분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오히려 우리를 위해서 모든 선한 일을 해 주신 분일 뿐만 아니라 만물의 창조자 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변화된 우리를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셔야 마땅한 분이요, 이 세상의 어떤 사람과도 비교될 수 없는 영광과 위엄과 존귀에 싸여 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사실 오늘 내(우리)가 아닐 찌라도 이미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시고 영적인 존재들인 천사들로 부터도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사6:3; 계4:8)라는 찬양을 받고 계시는 분으로 우리의 찬양이 아닐지라도 충분히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통한 찬양과 영광을 적어도 내게는 기뻐하신다.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많은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창조주요 구세주 이신 하나님을 나무나 돌이나 동이나 쇠로 만든 스스로 움직이거나 말하거나 듣거나 걷지도 못하고, 사람에 의해서 옮겨지고 세워지는 우상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주제는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이런 우상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무나 쇠로 만든 우상은 욕을 해도 반응이 없고 찬양을 해도 반응이 없는데 살아 계신 하나님께 그런 대접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전후좌우 어느 것도 숨길 수 없는 그러한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속이려 든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신이 속는 것이 되기 때문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6) 지속적으로 가르침을 주는 분은 누구인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 말씀은 분명히 하나님이나 우리의 스승이신 성령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여기서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당연히 갈라디아 교우들일 것이고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6) 한 것은 그 많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하여 구원의 주님을 알게 하였는데 그러한 희생과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시 할례자들인 유대인들에게 돌아가 복음의 가르침에 수고한 바울 자신을 외면해서야 되겠는가 하는 우회적인 표현으로 이해된다.

물론 이러한 당부는 여기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지만 왜,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까지도 기록하고 있는 히브리서의 내용이 가장 포괄적이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13:17)

본문에서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한 것을 “순종하고 복종하라”는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께도 더욱 그렇듯이 순종이 최선이지만 안되면 복종이라도 하라는 것이고 가르치는 자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는 것 역시 같은 의미가 될 것이다.

그 이유를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면 결과로도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하여 그렇지 못할 경우 가르침을 받는 자에게 유익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것은 영적인 것을 받기 때문에 물론 육신적인 것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그 가르침을 받은 대로 순종하는 삶이 될 때 순종하는 사람들이 복될 것이고 그것을 바라보고 지도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은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7) 이 말씀도 두가지 의미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①“스스로 속이지 말라[πλανάω, (바른 길, 진리에서) 벗어나게 하다.]”로 v3의 “스스로 속임이라[φρεναπατάω, (마음으로) 잘못 인도하다, 속이다, 기만하다]”는 말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는 같은 단어가 아니다.

이 전반절의 말씀은 역시 거꾸로 이해해볼 필요가 있다. 즉,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께서 비웃음을 받으시거나 속일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속이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속이는 것일 뿐이다.

“업신여김을 받다[μυκτηρίζω, 입을 삐쭉거리다, 즉 비웃다, 조롱하다]”는 의미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하거나 공갈협박을 할 때 그가 보지 않는 곳에서 그를 비웃음으로 입을 삐죽거리고 비웃는 경우를 하나님께 적용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그런 취급을 받으실 분이 아니심으로 결국 그렇게 하는 스스로가 어리석은 것이다.

②“…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7b)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행한 것보다는 더 좋은 대우를 받으려 하는데(물건을 살 때도 같은 값에 더 좋은 것) 그것도 엄밀히 말하면 죄성(罪性)이다. 여기에 같은 경고가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9:6)라는 말씀이다.

물론 곡식은 작은 씨를 심고 많은 열매를 기대할 수 있고 이것이 수고를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역시 언제나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다음 절에 이어지겠지만 우리는 신령한 것을 위해 심는 영원의 사람들이다.

속이는 것은 남을 속이든 나를 속이든 모두 나쁘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것은 창조주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무모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결국 믿음의 사람들의 심은 것은 마지막 하나님 앞에서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에 늘 그 장소와 때를 마음에 두고 살 필요가 있다.

올해는 무엇을 위해 심을 것인가도 깊이 생각하고 도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Ⅱ. 무엇을 위해서 심는가(8)?

이 말씀은 다시 앞장(5) v19~21과 22~23으로 되돌아 간다. 인생은 내일을 위해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심고 또 그 열매를 따먹으며 사는 농부와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농부는 어떤 농사가 주업인(쌀. 보리, 밀, 고구마, 콩)가가 그 농부를 결정한다. 채소들을 심어 먹는 작은 남새밭이 주업은 아니지만 그 남새밭에도 심은 대로 내어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심을 곳이 늘 두 종류의 밭이다. “육체[σάρξ, 살, 고기]”라는 보이는 외적인 밭이 있고 “성령[πνεῦμα, 바람, 호흡, 영]”이라는 감춰져 보이지 않는 내적인 밭이 그것이다. 항상 이 두 밭에서 심게 된다.

그런데 앞에서 농부의 예를 들었던 것처럼 어떤 사람은 육체를 위해 심으면서 성령은 마치 푸성귀를 뜯어먹기 위한 남새밭으로 심는 육체가 중심이 되어 사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아마도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이런 류의 심는 삶을 살고 있다고 보여 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라시고 독생자를 십자가에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은 이러한 삶을 넘어서 성령을 위해서 심는 것을 주업으로 삼고 육체라는 밭은 세상에 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푸성귀를 뜯어먹기 위해 씨를 심는 그런 농부로서의 삶을 살기를 바라실 것이다.

먼저 육체를 위해 심는 사람들에 대한 앞의 기록을 보면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5:19~21f) 했는데 이 일의 결말을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5:21b) 함으로서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8f)라는 같은 결과를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5:22~23f) 해놓고 그 결과를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3b) 하여 칭찬과 영광이 있어 모두 격려하고 칭송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영원속에서조차 칭찬 될 성령의 밭에 영생의 씨를 계속 심는 자들에게는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8b)는 복된 결과를 약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야 말로 심는 대로 거두는 영적인 원리를 가장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다. 열매는 육체적이든지 영적이든지 가장 진실하기 때문이다. 물론 때로 세상에서는 이것조차도 왜곡되게 보이기도 하지만 마지막의 시간은 각자가 심은 가장 사실적인 수고의 결실을 각 사람에게 열매로 나타내게 될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도 무엇을 심어야 할 것인가를 확실하게 도전해준다.



Ⅲ. 지속적으로 선을 행하라!

인생에 있어서 계속 선을 행하며 살기를 원하는데 세상 속에서의 삶이 지속적으로 선을 행할 수 있도록 놔두질 않는다. 그런 이유로 낙심하고 포기하고 마는 일들이 많은데 이러한 일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은 어떤 결과에도 낙심하지 말고 선을 지속적으로 행할 것을 격려하고 계신다.

선을 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범죄하는 사람들의 변명이 역시 위와 같은 것이다. ‘세상이 나를 선을 행하도록 버려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같은 말이지만 의미는 다른 뜻이다. 사람이 지속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은 세상이나 사람이나 이웃을 바라보면 불가능하다.

지속적으로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봐주지 않아도 세상이 몰라줘도 격려하며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을 의식할 때만 가능할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도 보이지 않는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9) 사람이 참 간사하고 또 인내심이 부족해서 기다리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구속을 완성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신 후부터 믿음의 사람들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의지하고 신앙생활을 계속해 왔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주님은 재림하지 않으셨고 정확하게 예고되지 않은 가운데 행한대로 갚으시겠다는 약속에도 많이 낙심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베드로 사도도 반드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말씀을 주고 있다.

베드로 사도의 표현을 빌리면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는 이유로 격려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을 한지가 벌써 이천 년이 지났다. 그렇지만 늦은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약속을 어긴 것이 아닌 것은 다시 오심을 정확한 날로 예고하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이고 오히려 지체됨이 참 믿음을 갖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다.

베드로는 다시 격려하기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벧후3:15)라고 바울도 이 사실을 기록하였다(살전4:13~18; 살후1:8~10)고 증거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예언은 이 밖에도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10:37)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5:8)고 역시 격려함을 듣는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9)는 격려는 모범적인 교회였던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도 증거한 바 있다.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살후3:13)

비록 우리 생전에 주님께서 오시지 않는다고 해도 낙심할 이유가 없는 것은 우리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고 할지라도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7; 롬2:6; 딤후4:14b)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9) 여기 앞에서는 우리가 지속적으로 선을 행해야 한다고 격려하고 거기에 대한 상급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영역임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10) 어렵고 힘겨운 때일수록 도움은 필요하고 특히 1세기의 박해 속에 있던 성도들에게 가능한 성도들의 도움은 사실적인 힘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도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9:41; 마10:42) 약속하신 바 있다.

어떤 일이든지 특히 농사를 위하여 심는 일도 때를 놓치고 늦게 파종을 하면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없다. 에베소서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하였는데 여기서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세월을 사라, 시간을 구속하라, 구원하라는 등등의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이기 때문에 그 기회를 지나버리고 잃어버리면 다시 오지 않는다는 데서 ‘기회를 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는 많은 기회들을 흘려버리고 난 후에야 ‘그때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라고 후회하는 경우들이 많다.

특히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라고 하여 좋은 일의 대상을 꼭 가려서 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반드시 그 기회를 그야말로 기회로 활용하는 신앙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시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했는데 그렇다고 이 말씀만을 중요시해서 ‘믿음의 가정들에게’만으로 한정해 버려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앞에 이미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한 것은 사실 믿음의 가정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며 “더욱 믿음의 가정들”은 같은 나라나 문화를 한정하지 않은 하나님의 가족이 된 세계 도처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의미한다.

사람을 의식하면 지속적으로 선을 행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할 때만 지속적인 착한 일이 가능하고 하나님은 그렇게 선한 삶을 산 사람들에게 반드시 약속대로 갚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