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갈 5:7~12 2021-12-05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갈라디아 교회는 유대주의자들이 들어와서 혼란을 끼치기 전까지는 적어도 능력과 역사로 함께한 바울의 복음 증거를 받고 그전의 어떤 우상숭배나 다른 종교생활을 정리하고 오로지 십자가 복음의 확산을 위해 애써왔을 것이다.

그런 좋은 열심을 율법주의자들의 꾀임을 받아서 지금은 중단하고 허황된 과거의 율법으로 되돌아가려는 안타까운 모습까지 보이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의 잘못된 선택을 책망하고 그들을 그렇게 잘못되게 만든 악한 자들에게 과격한 표현(12)까지 써서 책망한다.

이미 앞의 4:17에서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했던 것과 같은 율법주의자들의 잘못된 열심을 책망한 바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그들의 잘못된 부추김에 따라 잘 못 가는 갈라디아 교우들을 책망하고 있다.

실제로 어떤 목표를 향하여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오히려 그 목표의 반대를 향하여 열심을 내는 것은 오리려 그 목표에서 점점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히 막아야만 한다.

성경에는 우리 신앙의 좋은 열심을 달음질로 표현하는 것을 더러 볼 수 있다. 1세기의 이스무스경기의 주 종목 중 하나가 오늘의 육상경기와 다름이 없는 형태였기 때문에 신앙을 이 달음질에 비유하는 것은 이해가 어렵지 않다.

갈라디아 교회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어떤 물리적인 힘이기 보다는 누룩처럼 보이지 않게 어둠의 씨를 뿌리고 그것이 교회 전체를 뒤집어 놓을 정도의 지경에 이르러 결국 복음의 효력을 무효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은혜를 잃게 만드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호소하고 있다.



Ⅰ. 진리를 순종하는 것을 그만 두지 말라(7~8)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신앙의 열심을 중단하게 만든 즉, 진리를 순종하는 것을 그만 두게 만든 것은 결코 옳은 것도 아니고 더욱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을 가능성은 전혀 있을 수 없으므로 그것은 악에서부터 난 것이라고 우회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7f) 비록 저들의 현재의 잘못된 상태를 지적하는 것이지만 갈라디아 교회가 믿음의 달음질을 아마도 잘 했던 것을 먼저 기억시키며 저들로 하여금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한 하나님께 대한 열심을 칭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서론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바울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상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신앙의 달음질을 하고 있노라 고 증거하고 있다. “…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2b~14)

로마의 감옥에서 자신의 생애의 마지막을 앞둔 상황에서 조차도 자신의 믿음의 달음질은 후회할 것이 없는 것이었음을 디모데에게 고백하고 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는 자신은 분명한 신앙의 목표를 바로 가지고 달음질하고 있노라 고 증거한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고전9:26) 사실 육상경기는 자신에게 주어진 트랙을 지키는 것과 목표지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같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는 모두 상을 얻을 수 있도록 달음질 하라고 격려하기도 한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9:24)

갈라디아 교우들도 처음에는 바울과 같이 믿음의 달음질을 잘 하고 있었던 그것을 중단시킨 사람들을 확인해 보라고 경고한다.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7b) 그러면서도 과거의 그 잘하던 달음질은 다름이 아닌 진리를 순종하는 것이었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진리를 순종하는 것은 절대로 바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진리를 향한 열심을 막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십자가를 순종하는 것을 방해하는 율법주의자들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로 확인하는 것이다.

또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사람은 진리 그 자체 이신 하나님께 당연히 징벌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실족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관복음을 통하여 증거하신 경계와 다르지 않다(마18:6; 막9:42; 눅17:1~2).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8) 이 말씀을 앞 절 말씀을 확증하는 것으로 진리를 향한 달음질을 중단시킨 대상이 진리 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함으로서 바로 그 진리를 거역하게 하는 세력임을 간접적으로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에 있어서 모든 일을 조심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진리를 순종하는 일을 중단시키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할 것이고 서로 간에 마치 마라톤을 뛰면서 그룹을 이루어 함께 뛰고 있는 동료를 격려하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달음질을 잘 하도록 격려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Ⅱ. 좋지 않은 것이 더 쉽게 퍼진다(9~10)

여기에는 좋지 못한 영향력은 보이지 않을지라도 누룩처럼 전체에 번져서 그 전체의 성질을 완전히 바꿔버릴 수 있다는 경계와 함께 그러나 갈라디아 교우들이 자신과 복음에 대한 잘 못된 생각을 갖지 않을 것이라는 일말의 확신과 함께 만약 하나님의 백성들을 흔들리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됨을 경고한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9) 적합할지 모르지만, 요즘은 막걸리조차도 특정 공장에서 만들어 팔고 있지만 과거 우리 나라의 농사짓는 가정들이 일반적으로 누룩을 만들어 농주(農酒)라고 하여 막걸리를 만들어 먹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빵에 이스트를 넣어 떡을 구워 먹는 것처럼 흔한 일이었다.

이런 누룩의 교훈을 성경에서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더러 예를 볼 수 있고 긍정적으로 사용한 예도 읽어볼 수 있다. 먼저는 긍정적인 비유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13:33; 눅13:21)는 말씀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내용처럼 하나님의 참된 구원의 진리를 대적하고 자신들의 잘못된 교리를 주입시키는 부정적인 내용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마16:6, 11; 막8:15)

그럼에도 이스라엘에서 누룩은 유월절 기간에는 집안에서 발견되지 않도록 금지하신 음식재료이다(출12:19).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신 날을 기념하는 특정한 행사를 종교적으로 기념하게 하신 날이 유월절이다.

어쩌면 그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의 역사에 어떤 것도 더하거나 감소시키지 말라는 입장에서 모든 성분을 바꿔버리는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먹으며 하나님의 행하신 능력 즉, 종살이에서 자유를 주신 사랑을 한 주간 기억하며 살게 하는 절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연히 죄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주신 역사적 그림자이다.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에 더하거나 뺄 것 없이 그 큰 사랑을 기념하며 감격하는 것이 오늘의 예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잘 못된 교리는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9)는 것처럼 죄성(罪性)을 가진 사람들에게 더 확산이 쉽고 빠르다(고전5:6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항상 건전하지 못한 믿음은 겉으로 보이지 않게 은밀히 접근하여 사람들을 오염시키는 것이 누룩처럼 완전히 성질을 뒤집어 버린다.

이런 안타까움을 경계하면서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우들에 대한 일말(一抹)의 믿음을 고백하고 있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10f) 이 짧은 표현 가운데서도 서로의 관계를 확인시키면서 권면하고 안심시키는 내용을 볼 수 있다.

“나는 너희가” 여기에는 서로의 확인이다. 그리고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근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하는 것이다. 서로가 십자가의 피를 나눈 형제애로 여전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기만 한다면 그래도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 했는데 앞에 v8에서는 율법주의자들의 “그 권면”이라고 했던 것을 마음에 두고 하는 표현으로 그들의 권면에 넘어가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는 것으로 그래도 자신을 통한 복음을 감격으로 받았던 갈라디아 교우들에 대한 확신이다.

보다 적극적인 면에서는 바울 사도를 통하여 얻은 믿음으로 인한 선물로서 구원 얻는 이치에서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즉,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으므로 은혜로 구원받는 신앙적 교훈에서 흔들리지 않을 것을 믿는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의심하고 대적하던 고린도 교회의 교우들이 처음 자신을 통한 복음을 받고 감격한 모습을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7:11)고 확인한 바 있다.

사실 어디든지 복음을 제대로만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만 만났다면 고린도나 갈라디아뿐만 아니라 제주도나 이곳 부산이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얼마나, 얼마나” 표현할 수조차 없던 감격을 그렇게 쉽사리 버리고 다는 이론을 쫓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제는 그렇게 복음에 감격하고 확신하던 그들을 변화시키려고 간교한 술수를 쓰는 사람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10b)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고 천하를 다 얻은 듯 감격하던 거듭난 사람들을 다시 죄에 돌아가게 하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심판을 받는 너무나 당연한 결과가 될 것이다.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을 의심하게 하거나 혼란하게 하는 것은 그 대상이 천사일지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확인을 이미 선언한바 있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1:8)

하물며 간교한 사람들이 생명의 복음을 흔들리게 하는 것은 그 결과가 너무나 당연한 것을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10b) 경고함으로써 율법주의자들의 할례를 받아야한다 거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잘 못 가르치는 그들은 구원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징벌 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Ⅲ. 십자가를 세워가야 한다(11~12)

세번째는 또 하나의 있을 수 없는 가정(假定)을 가지고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자들은 그렇게 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거세(去勢)를 해 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다시 한 번 더 경고하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11f) 과거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디모데를 함께 복음증거에 데리고 다니기 위해서 할례를 행했던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다(행16:3). 그럼에도 같은 협력자인 디도에게는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2:3)라는 분명한 소신을 이미 밝힌 바 있다.

이것도 같은 가정이긴 하지만 바울이 실제로 율법주의자들과 적당히 타협하여 복음을 전하면서 할례를 같이 행했다면 그들과 싸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율법의 문제들을 성령으로 확신한 바울은 그것이 옳지 않음을 알고 디모데 이후부터는 더 이상 복음과 할례를 함께 다루지 않았다.

그런 이유에서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이라는 가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진실한 바울이 디모데 사건을 마음에 두고 하는 고백일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진리로 확신하는 경우에는 어떤 경우도 또 어느 누구와 도 타협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확신을 소신 있게 믿고 행하였다. 만약에 할례만 허용했을지라도 유대인들에게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 것이고 방해를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가정을 다시 말하고 있는 내용이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11b) 여기서는 할례를 수용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걸림돌로 역할 하게 되었다는 고백이다. 사실 복음의 중심이 십자가인데 십자가를 제거한 복음은 전혀 가치가 없게 된다.

그럼에도 이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는 이미 고린도에서도 유대인들에게는 거치는 것이었음을 바울은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1:23)

인간적인 합리성을 내세우는 사람들에게는 이 바울의 행동은 어리석게 보일 수 있고 또 바울의 다른 복음 증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1:18)는 내용 같은 말씀을 인용하여 ‘그래도 전해지는 것이 복음이 아닌가!’ 라고 융통성이 없다고 비웃을 수 있다.

현재 우리 시대의 다수의 종교인들이 이런 이유에서 문화나 관습과 타협하는 예들을 더러 보는데 바울의 입장이었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바울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들조차 경계했던 것들을 그의 가르침에서 볼 수 있다. 그런 구체적인 예가 앞에서 인용한 디도의 할례의 경우 같은(2:3) 것이었다.

이 시대를 패역한 세대라고 하는 이유가운데 하나는 듣는 말씀조차도 삶에 부담이 가는 것을 싫어한다. 그냥 듣고 넘길 수 있는 그런 형태의 말씀을 들으면서 평안을 느끼고, 교우들 간에도 서로 깊이 아는 것조차 꺼려한다. 교회에 가도, 안가도 별로 관여치 않는 그야말로 종교의 행사로만 예배에 참여하려 하는 경향들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11f)라는 바울의 결연한 의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라면 반드시 지향해야할 신앙의 정절이라고 할 수 있다.

수없이 말해 온대로 율법과 복음은 양립될 수 없는 이유는 과거의 율법을 개선한 것이 복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 한 복음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전혀 새로운 구원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범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가 있는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렘31:31~32)이라고 분명히 약속하셨고 그 때에 약속된 새 언약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 한 복음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에게 지나치리만큼 과격한 표현으로 오늘의 말씀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자신이 율법에 대한 단호함을 그대로 표현하는 내용이기도 하다고 보여 진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12) 이 말씀은 조금은 우리말로는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어려운 표현이다(대개 욕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할례가 남경(男莖)의 포피를 베어내는 것이라면 그렇게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고 애쓴다면 그런 사람들은 겉가죽만이 아니라 음경(陰莖) 자체를 완전히 잘라버리라는 조금은 잔인할 정도의 비유적인 표현이다.

대부분의 진리를 위한 열심을 가로막는 일들은 그 진리를 주신 하나님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연히 어두움에 의해서 행해지고 복음과 진리를 위한 헌신과 충성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방해되어서는 안된다.

언제나 어두움의 죄악은 주님의 교회 속에 누룩처럼 보이지 않게 또 보잘것없는 것처럼 작게 시작되지만 서로에게 확실한 신뢰만 있다면 더 이상 번지지 못할 것이고 이렇게 믿음에 혼란을 끼치는 자들은 생명과 진리를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복음을 전하면서 함께 할례와 같은 다른 문화와 종교적인 부분들을 수용하고 받아들인다면 복음을 전하는 것이 별로 장애가 없을 것 같지만 그것은 십자가의 희생으로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하나님은 잔꾀부리는 머리 좋은 백성보다는 주님의 명령에 단순히 순종하는 충성된 사람을 더 기뻐하신다. 우리는 열심을 가로막는 어두움을 경계하고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생명의 진리를 위해 열심히 믿음의 달음질을 지속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