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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갈 5:2~6 2021-11-28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이 역사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어느 누구라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가진 믿음은 각각이다. 중요한 것은 과연 하나님의 완전한 영광의 의의 통치인 천국에 이르는 믿음이 어떤 것인가 하는 기준을 오늘 내용은 분명히 하고 있다.

앞의 2:3 이미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라고 했지만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장하고 가르쳤던 것도 역시 할례였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 문제는 유대인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있었던 문제였음을 복음의 확산 과정에서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율법의 수하에 있던 유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함께 할례를 받고 율법도 중요한 부분은 지켜야 한다고 이방인 출신의 신앙인들에게 요구했고 이것이 결국 예루살렘에까지 문제가 되어 사도행전15장에 보면 이 일로 많은 논의가 있은 후 거기에 대한 지침을 만들어 교회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오늘 내용에서 지나칠 수 없는 강조점은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2b) 거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4b) 한 것인데 믿음의 바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데 그 그리스도께서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하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면 사실 믿음 자체가 헛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미 2:21에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하였는데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 헛되다는 안타까움을 증거한 바 있다.

유대인들의 자긍심은 자신들 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분명한 증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할례]라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형제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는 것이 가장 구체적인 율법의 요구를 채우는 것이라고 가르쳤던 것 같다. 그런 이유에서 율법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한 것으로 자랑을 삼았던 것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확실하지 못하면 율법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을 것 같고 그런 연약한 약점을 노리는 사람들이 유대주의자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저들의 옳지 못한 행동들에 대해 바울은 과격하리만큼 강한 말투로 그런 유약함을 책망하고 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즉, 선물이다. 어떤 계율의 순종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나를 위한 희생으로 믿고 순종할 때 선물로 마련하신 그 구원은 나의 것이 된다. 어떤 것이든지 이러한 그리스도의 희생의 효력을 잃게 하고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게 하는 소신 없는 노력은 아무 가치가 없다.



Ⅰ. 십자가의 구속을 헛되게 하는 것(2~3)

여기서 바울의 강한 권고를 듣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된 권위를 가지고 거듭난 자신의 이름으로 권면하는 내용을 나타내고 있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2f) 주로 자신의 사도권과 함께 강한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고후10:1; 엡3:1; 골1:23; 살전2:18) 라는 표현을 더러 볼 수 있다.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2m) 할례의 언약은 물론 율법이전에 아브라함 때로부터 명령된 계명으로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의 표를 육신에 새기는 것인데 이스마엘을 비롯해서 남자 아이들은 난 지 8일만에 반드시 할례를 받도록 명령되었고(창17:9~14) OT에서는 모든 하나님 앞에서의 절기제사를 비롯한 중요한 행사들에는 반드시 할례를 받은 자들 만이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OT에서조차 이 육신의 할례보다 마음의 할례를 행할 것을 가르치는 내용들이 많다. 최초의 제사를 위한 법전인 레위기에서부터 이를 볼 수 있다. “나도 그들을 대항하여 그 대적의 땅으로 끌어갔음을 깨닫고 그 할례받지 아니한 마음이 낮아져서 그 죄악의 형벌을 순히 받으면”(26:41) 하였고 율법의 결정판이라고 하는 신명기서에서도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10:1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30:6)라 하셨다.

다시 범죄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이스라엘에게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같은 말씀을 주고 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렘4:4f) “…대저 열방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렘9:26b)

바울 사도는 이를 로마서에서 다시 확인한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롬2:28~29f)고 주님의 언약에 속한 거듭남의 귀중성을 강조한다.

결국 모든 유대인들이 받았던 OT에서조차의 할례도 하나님의 뜻을 충족시키지 못했음을 기록들을 통해서 볼 수 있는데 사실 이런 불완전한 법을 완전케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2b) 바울은 이미 앞에 3:10에서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말한 바 있고 역시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 되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내용이다.

율법은 모두를 지키지 않으면 지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야고보를 통해서도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2:10) 라고 하여 율법의 냉혹함을 그대로 나타내 주고 있다. 모두를 다 지킨다 하더라도 하나라도 어긴다면 그것은 모두를 범한 것과 다름이 없다. 이런 이유에서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인생이 없는 것이다.

다음 v3에 연이어 이러한 내용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많은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주의자들의 말을 듣고 할례만 받으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할례를 받는다면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는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게 됨을 알았을 것이다.

하늘에서 주신 복음은 죄인을 자유케 하여 유쾌한 인생이 되게 하지만 세상에서 나타나는 계율은 그 출처가 어디이든지 끝없는 책임과 의무를 짊어지게 하여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절망시켜 죽이는 것뿐임을 알고 앞에서 거론했던 바울의 권면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골1:23)



Ⅱ. 은혜를 잃는 행위(4)

갈라디아 교우들을 비롯하여 헛된 시도를 하려는 것에 대한 경고를 주고 있는 내용을 본다. 복음의 삶은 적극적이고 소망적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이라면 율법 안에서는 모든 것이 의무 조항이고 부정적인 주문이 더 많은 것은 하나님을 죄로 진노하시게 하지 않아야 하는 부정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1다른 신을 있게 말라, 2우상을 섬기지 말라, 3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 4안식일에 일하지 말라, 6살인하지 말라, 7간음하지 말라, 8도적질하지 말라, 9거짓증거 하지 말라, 10탐내지 말라.]

여기서 바울의 경계는 그의 신앙의 중심이며 기반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반대인 “율법 안에서” 출발하고 있고, 어쩌면 이것은 자신이 사울 때 그렇게 하나님께 충성해 보려고 애썼던 것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진노케 해 드렸던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4f) 사실 이것은 율법을 복음에 빗대어 말한 것이지만 전혀 앞뒤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율법안에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는 것은 물론 어떤 것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는 철저한 스스로의 자기 노력이기 때문이다.

복음에 빗대어 말한 것이란 이유는 이 표현의 반대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이라는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고 그것은 스스로의 어떤 노력보다도 주님의 하신 일을 믿고 순종하여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나머지는 성령께서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4b) 이것은 바울을 통한 복음을 듣고 이미 믿음 속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에 더 심각하다. 예수께서 이미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이미 의롭다 함을 얻었는데 이렇게 복음을 순종한 사람들이 오히려 벌써 확보한 생명을 팽개치고 폐기된 율법을 통해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것은 오히려 다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선물로 얻었던 은혜를 잃게 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두가지 형태의 비극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 마치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과 같은 안타까움을 본다. 이런 갈라디아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을 두고 하는 표현이 그것이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6:4~6)

히브리서 같은 6장 뒷부분이지만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약속, 맹세 v13, 17)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히6:18~19)라고 복음으로 얻은 약속의 튼튼함을 확인해 주고 있다.

믿음의 사람들의 중요한 과제는 어떤 형편이나 경우에서도 잃지 말아야 할 귀중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짓을 해서는 안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떨어지는 일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모든 것을 심지어 생명까지 빼앗긴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만 붙잡으면 되고 주님의 은혜만 잃지 않으면 확실히 승리하는 것이고 성공하는 인생인 것이다. 믿으시기를…



Ⅲ. 가장 효력 있는 믿음(5~6)

의를 찾아보기 힘든 이 현실의 세상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감사하고 기뻐하고 소망하며 낙심치 않을 이유와 함께 그것을 위해서 어떻게 살고 행해야 할 것인가를 마지막으로 증거해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힘입어 사죄를 받고 죄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것은 여전히 죄가 넘쳐나는 현실 속에서 의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진실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귀한 약속이 변치 않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고 비록 죄가 범람하는 세상이지만 우리 연약한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의롭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게 하시는 성령의 임마누엘을 누리며 산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5) 이것은 역시 앞에서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4f)이라고 한 저들의 어리석음에 비교되는 사도 바울과 함께 하는 사람들의 확신이며 고백이다. 이미 패기 되어버린 율법을 붙들고 무엇인가를 성취해 보겠다고 하는 저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한 바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람들의 평가에 관계없이 죄를 이미 용서받고 하늘의 형상을 힘입기 위해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의 사람들로 다듬어져 가며 악이 완전히 소멸되어 죄의 욕망이 사라진 완전한 의의 통치가 실현되는 천국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이다. 맞습니까?

즉, 성도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그 의가 완전히 이루어질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기대와 소망은 이 땅에서 있다가 사라질 부귀와 영화를 바라는 것 보다는 의의 완전한 통치가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면서 그 나라에 또한 자신이 합당하도록 변화되어 가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율법주의자들은 이 완전한 의의 통치가 오게 될 때 그들의 꾸몄던 가치와 생명은 끝나는 비극의 주인공들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5) 라는 말씀을 다시 배열해 보면 ‘믿음을 따라 성령의 인도를 받고 의의 때를 기다리는 소망으로 산다.’는 자연스러운 믿음의 천로역정의 길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의 노정에서 가장 필요하고 확실한 것을 연이어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6)이다. 바로 의가 통치하는 영원한 영광에 이를 수 있는 효력 있는 믿음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서4:5에서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라고 하여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수 있는 믿음도 하나뿐임을 증거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믿음이 거론되고 있고 사람들의 생각하기에는 다 그 믿음이 그 믿음 같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인정하실 수 있는 그 하나의 믿음을 가진 자라야 의의 소망을 기다릴 수 있다.

오늘 말씀과 더불어 비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계시해주신 말씀과 성령을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은 인정된 믿음이라면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그런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허황된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6f) 이것은 적어도 쓸모없는 믿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육신의 계보나 말씀이나 성령을 의지하는 것이 아닌 인간적인 노력과 모양을 내려고 하는 그런 믿음은 전혀 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에는 이를 수 없는 효력 없는 믿음인 것이다.

야고보를 통한 경고도 마찬가지이다. 2:14에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믿음이라고 했지만 v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 하면서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22)고 하였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4)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상고한 바 있다. 그런 입장에서 이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이라고 하는 것이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그런 행위를 강조했다고 볼 수 없다.

여기에 대한 해답이 바로 오늘 마지막 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바울의 논지와 같다고 이해할 수 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6b)

신앙의 3각 기둥을 고린도전서13장 마지막 절에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13) 하였다. 여기 믿음과 소망은 완성될 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는 꼭 필요한 것이지만 의의 왕국이 완전히 이루어진 후에는 필요 없는 것일 것이기 때문에 그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 하였다고 본다.

온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칭찬 듣는 모범 된 교회였던 데살로니가 교회(살전1:7~8)에서 실천되고 있는 신앙의 3각 기둥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살전1:3)

결국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6b) 한 바울의 증거는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확인하는 대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가 함께 어우러지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에베소서6:23에서는 “믿음을 겸한 사랑”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렇다, 의의 천국이 이루어질 때까지 지키고 계속 키워가야 하는 효력 있는 믿음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이면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지 율법의 행위처럼 자의적인 노력이나 머리속에만 가지고 있는 관념적인 믿음이 아니다.

야고보는 이런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만을 갖는 믿음을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9)고 경계하고 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날도 어떤 사람들은 무엇이건 사실적으로 보이는 육신적이거나 어떤 흔적들을 가지고 나타내려고 하는 경향들이 더러 나타난다.

그러나 어떤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말씀이나 성령이 아닌 사사로운 스스로의 노력으로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에는 별 가치가 없다. 설령 그것이 육신적으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하는 것일지라도 그렇다.

오히려 이러한 시도를 하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결과에서 오는 것이라고까지 경계하고 있다.

오히려 성령을 의지하며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성경밖에서의 노력보다는 사랑과 함께 역사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가려는 경건의 훈련에 더욱 매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