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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갈 5:1, 13~15 2021-11-21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앞에서 복음을 지키기 위한 자신의 사도권 변호와 더불어 신앙의 바른 체계에 대해 설명한 바울은 이제 그 관념적인 신앙은 삶에 실제적이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믿음의 실천을 당부하는 내용이 나머지 5~6장이다.

특히 첫 장인 이 5장에서는 육신의 모양을 내려고 하는 갈라디아의 율법주의자들과 하늘로부터 거듭난 성도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성령의 인도와 순종으로 살 때 신앙은 살아있는 생명이 됨을 가르치면서 육신의 일과 성령의 일을 비교하는 것을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 죄와 어둠으로부터 죄인들을 자유케 하여 육신의 일인 어둠에 붙잡히지 않은 삶이 바른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 나타나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유이다. 그런 이유에서 오늘 v1이 앞의 4장 말미에 붙어있다고 도 보이는 [자유]에 대한 바른 사용과 함께 v13~15 이어지는 자유의 같은 원리를 상고하는 것으로 이 실천편을 시작하고자 한다.

본래적으로 “율법에서 자유하라!”는 것이 이 갈라디아서의 주제이고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를 악용하려고 하는 율법주의자들의 경계를 이미 2:4에서 나눈 바 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어찌 보면 오랜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던 이 인권으로서 “자유[ἐλευθερία, 롬8:21; 약1:25; 벧전2:16]”는 분명 잘못 이해되고 오용될 소지가 분명히 있지만 오늘 우리가 다루는 말씀들이 진정한 자유의 역할을 보다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가 신앙안에서 “자유[ἐλεύθερος]”를 말하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을 먼저 참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ἐλευθερόω] 하리라”(요8:31~32) 역시 수동적이다.

이 가르침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 즉, 주님의 말씀에 거하는 사람이라야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그 알게 된 진리가 자유를 주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지만 이것을 더 깊이 이해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야 말로 자유를 가장 바르게 사용하신 것을 볼 수 있다.

당연히 이것은 자신의 의지보다는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많은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조차도 포기하여 사람이 되셔서 이 역사 속에 내려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야 말로 바른 자유의 표현이고 이를 따라 본받는 제자로서 삶이 사람에게 주어진 자유를 바로 사용하는 것임을 증거하신 것이다.

그럼으로 성경이 말씀하시고 약속하시는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야 말로 천국을 누리는 것이고 영생을 이해하는 것만큼 신앙인들에게 있어 자유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지 못하면 갈라디아의 유대주의자들처럼 잘못 사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자유를 바로 이해하고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허락하신 영생을 현재부터 영원한 때까지 누리는 삶이 되었으면 한다.



Ⅰ. 십자가로 찾아 주신 자유를 지키라! (1)

표현은 간단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 된 우리들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하신 일이 이렇게 간단히 표현할 수 없는 역사였다. 어두움의 영향 아래에서 죄에게 끌려 다니는 모든 인류에게 참된 자유를 주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철학적으로도 불가능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좀더 사실적으로는 1세기 당시에 자유인인 주인을 받들어 섬기는 종의 삶은 사실 거의 동물 상태의 수준이었고 거기서 스스로 자유 할 수 있는 것은 평생 불가능한 상태였지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받고 누릴 수 있는 감격은 사실 생명을 아끼지 않을 정도로 감격적이고 획기적인 경험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러한 사실을 표현하기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고전7:22)고 확인해 주고 있다.

그 종살이하는 노예들이야 말로 자유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마찬가지로 죄의 지배아래 어두움의 종노릇 하던 사람이라야 사죄의 은혜를 얻어 유쾌하게 되는 경험보다 더 큰 인생의 반전은 없을 것이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4:6~8 한글)

비록 바울은 육체적으로는 자유인으로 노예의 자리에 있어본 경험은 없었지만 육신적인 경험보다 영적인 경험을 통해서 사죄의 감격을 다윗의 시로 표현하고 있고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최선을 다했지만 그것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 죄를 짓고 있는 것이었다는 사실과 아나니아를 통해서 침례를 받고 감격했던 다메섹의 경험을 실감하는 고백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1f) 이 약속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든 사람이 체험해 보는 것은 정말 귀하다. 죄의 고통과 노예의 삶의 비참함을 경험해본 사람이라야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희생이 얼마나 크고 귀한 것인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은 단순히 자유를 주셨다는 것보다도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오늘도 자유를 얻었다고 말하는 많은 그리스도인 이란 사람들이 여전히 죄의 노예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이 약속과 함께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다.

바울을 통하여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그렇게 초라한 삶을 살게 하려고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닌데!” 하시면서 안타까워하실 것이다. 여기서 “자유롭게 하려고”는 물론 죄에서의 자유를 말씀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3:6)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3:9) 다시 5:18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는 엄청난 약속을 확인해 주고 있다.

이 말씀은 적어도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는 어두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음을 증거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또 이렇게 같은 죄를 범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라는 식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없는 모습이다.

이런 사람들의 유약함을 안타까워하는 베드로 사도는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벧후2:19) 하므로 자유를 받는 자의 실제적인 자세는 이래서 귀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b) 시궁창에서 끓어내 줬다면 다시는 그 시궁창에 들어가지 않아야 하는 것이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자세이다. 또 주님께서 불가능한 것을 그의 백성들에게 절대로 요구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러므로”는 자유를 주셨기 때문이라고 이해한다면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b)”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확인이자 약속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직 복음을 완성하시기 이전이었지만 이 땅에 계실 때 38년동안 중풍병으로 베데스다 못 가에 누워있던 사람을 치료해 주신 후에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5:14) 당부하셨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잡아 죽이려고 올무로 끌고 왔던 간음 중에 붙잡혀 온 여인에게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8:11)하심을 본다.

비록 율법 속에서는 다시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다고 다짐해보지만 그것이 단순한 사람의 각오와 노력에 불과했기 때문에 불가능했지만 이제는 영원한 사죄의 제사를 완성하시고 하나님의 씨인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에 범죄치 않을 것이다.

특히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기 때문에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게 하심으로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을 살도록 성령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심으로 적어도 습관적인 죄를 반복하는 죄의 노예로 살지는 않을 것이다.



Ⅱ. 자유는 방종(放縱)이 아니다. (13)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이미 얻은 자유를 잃지 않도록 지켜가라고 당부하는 말씀이다. 이 말씀 역시 v1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은 표현이다.

여기서도 바울은 자신의 애절한 심정을 전달하기 위하여 보다 가까운 표현으로 당부를 시작하고 있다. “형제들아” 그의 서신들마다 요긴하고 깊은 애정을 가지고 말할 때마다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바울의 서신들에서 자주 보는 내용이다.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사실 죄인이었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초청된 것은 자유 하게 하기 위한 것임은 주님의 초청에서부터 확인하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온 갓 것에 매여서 힘겹게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 그 온 갓 매인 것에서 풀어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셨다.

그럼에도 이 부르심의 초청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또 하나의 종교라는 올무를 더하게 하여 인생을 더욱 힘겹게 할 수 있는 것이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종교인들의 안타까운 모습이다. 신앙하는 것이 힘겹고 어렵다면 그 신앙은 반드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온 갓 얽매인 것에서 우리를 풀어 자유케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역시 육신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음을 1세기의 그리스도인 된 노예들에게서도 보는 사실이다. 그래서 바울은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즉,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이미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그러나”라는 단서를 달고 있다. 그러므로 이 “그러나”는 그 자유가 오용될 소지를 경계하고 어떻게 지켜갈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언제나 좋은 것 옳은 것이 잘못 사용되는 일은 세상에나 교회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특히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우리 신앙정신에 그런 부분들을 더러 보는 사실이다. [환원정신]이 성숙한 사람들에게는 더할 데 없이 좋은 것이지만 악용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든지 잘못 사용될 수 있음을 우리 교회의 과거에서도 볼 수 있는 사실이었다.

베드로 사도가 이에 대한 같은 경계를 주고 있다.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2:16) 이 말씀과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죄를 합리화하는데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래서 여기에 따른 장치가 바로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13b)는 말씀이다. 이미 앞에서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고전7:22)는 말씀을 인용한 바 있다.

율법의 종에서 죄의 종에서 놓임을 받은 참된 자유는 사랑의 종이 되는 것이 자유를 찾아 주신 이유라는 것이다. [자유]는 사실 [권리]와 비교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자유를 얻은 사람들은 미워할 권리는 없고 다만 사랑할 권리만 있는 것이다.

또 죄의 종이든지 율법의 종은 불편하고 비극적이지만 어쩔 수 없이 된 것이라서 억울하고 슬퍼하는 것이라면 사랑의 종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스스로 되는 것이고 감사하며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데서 나타날 수 있다(요8:32).



Ⅲ. 율법도 사랑으로 완성된다(14~15).

율법이 결코 악한 것이거나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것처럼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딤전1:8)고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계속 살펴왔던 대로 사람이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데서 오히려 죄인됨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하였다.

앞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13)는 당부로 그리스도인이 사랑으로 종노릇 할 권리만 가졌다는 말씀을 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율법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을 괴롭히고 힘겹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사랑으로 완성하게 되어 있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14) 인용된 말씀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보다 높은 차원의 율법보다는 사람관계의 율법을 인용하신 것으로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18)는 말씀이다.

사람 관계의 사랑 계명을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13:8)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고 증거함으로써 역시 사랑이 율법을 완성한다는 가르침을 함께 주고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증거하셨던 교훈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사람 관계에 있어서 사랑의 종노릇은 그 기준이 “자신 같이” 라고 하였다. 정신이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자신을 스스로 해하거나 미워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안에서 사랑의 종노릇 이란 오히려 자신을 타인보다 사랑해서는 안됨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27) 결국 진정한 사랑의 기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그 모범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 붙여지는 경고가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15)는 말씀이다. 율법주의자들의 특징 중 하나는 그 율법을 자신이 지켜야할 계명으로 보는 것 보다는 상대가 어기는 것을 찾는 데서 사랑을 찾기 어렵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율법주의자들의 자세는 하나 같이 그런 모습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책망하셨다.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마23:4)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눅11:46)

그들은 사랑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의 약점이나 아픔을 보듬으려는 사랑보다는 무엇이든지 허물을 찾아 죽이려는 데 혈안(血眼)이 되어 있었음은 예수님 주변에 나타날 때마다 그들이 보였던 일관된 모습이었다.

사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15)는 말씀은 맹수들이 상대를 죽여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으로 사람에게는 있어서는 안되는 모습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역할을 하지 못하면 사실 이렇게 짐승과 같은 모습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이 경고는 최소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살라고 하는 당부이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15) 짐승의 세계에서는 이런 일이 사람들의 인위적인 개입만 없다면 숫자를 조절하고 개체를 유지해 갈 수 있는 방법이 되겠지만 사람에게는 짐승의 삶의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의 삶의 원리가 따로 있고 그것이 앞에서 살펴본 대로 바로 [사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게 있어서는 짐승의 삶의 논리인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짐승처럼 보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는 경계가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 짐승의 삶의 방식이 적용되면 한편 뿐만 아니라 [피차] 즉, 상대뿐만 아니라 서로 다 멸망할 수 있다는 경계이다.

사실 인류가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콘크리트 밀림 숲의 맹수들을 자처하기 때문이다. 상대야 어떻게 되든지 나는 살아남아야 하겠다는 정글의 삶의 원리가 유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이 세상과 국가를 바르게 다스려야만 할 정치세계에서 보는 형태들이다.

세상에서도 이러면 안 될 것인데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로 세워지고 운영되는 교회에서는 더욱 안될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포함한 이런 이치에 놀아나는 교회들에게 경계를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에서 자유를 찾아 주셨고 그것은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우리 주님께서 적어도 이와 같은 믿음을 기뻐하실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죄의 결과인 죽음을 향하여 큰소리 칠 수 있을 것이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15:55~56 한글)

주님께서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자유는 육신의 자유가 아니다. 그런 이유에서 [권리]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하고싶은 대로 행하는 방종(放縱)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행할 권리이며 미워할 권리는 아님을 알아야 한다.

비록 죄인 된 사람이 지킬 수 없는 율법도 근본은 사랑이다. 모든 것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나 아닌 대상을 죽여서 라도 자신이 살고자 하는 동물의 근성으로 살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가 아니라 자신을 항상 희생의 자리에 내놓는 자세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 부끄러움이 없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