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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갈 4:27~31 2021-11-14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지난 주 나눈 말씀에서는 아브라함의 두 여인 여종이었던 하갈과 아내였던 사라를 비교하고 이것을 심지어는 땅에 있는 예루살렘과 위에 있는 하늘의 예루살렘으로까지 비유하였다. 이것은 적어도 인간적인 노력과 하나님의 언약의 차이에서 있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시키려는 바울의 가르침이었다.

오늘의 내용은 좀더 적극적으로 이 두여인을 통해서 있게 된 결과인 아들을 통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차이를 지적하고 갈라디아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듭 난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자녀들임을 확인시킨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고후6:14~15) 라고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관계의 청산을 당부한 바 있다.

실제로 진리는 거짓과 함께 할 수 없고 육신의 일과 영적인 일이 조화를 이룰 수 없고 복음과 율법이 공존할 수 없다. 결국 이스마엘과 이삭은 함께 같은 기업을 누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라를 통해 약속이 아닌 육신의 산물인 하갈의 아들을 쫓아내라고 요구하였고 아브라함은 이를 받아 들 수밖에 없었다.

너무 이분법적인 판단이라고 불신의 사람들은 거절할 수 있지만, 이것은 복음의 시대에도 당연히 그렇다. 하나님의 나라와 지옥이 함께 있을 수 없고 교회와 우상숭배가 함께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랑과 미움도 함께 할 수 없다. 그런 이유에서 믿음 속에 수용할 수 없는 것은 내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를 위하여 피 흘리기까지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따라 섬기고 사랑하는데 있어서 장애를 일으키는 모든 어두움의 세력이나 도구들은 그리스도의 신부 된 교회속에서나 각 개인의 신앙의 삶 속에서 내쫓아야만 할 것이다. 만약에 그대로 둔다면 나중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서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22:13, 24:51, 25:30; 눅13:28)는 안타까운 비극의 상태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Ⅰ.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라(27)!

아브라함을 찾아왔던 하나님의 사자가 “…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0) 하였고 그 사실을 사라가 장막 문 뒤에서 들었고 창세기의 저자는 아브라함내외가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육체적 상황을 v11에서 말하고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12)라고 부정하는 것을 기록하였다.

그럼에도 후에 약속대로 이삭을 낳은 사라는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21:6)라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는 비웃음을 웃음으로 바꾸심을 고백하고 있다.

반드시 아들을 낳게 되리라는 천사의 말을 비웃었던 사라에게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4) 하였고, 아직 남자를 가까이 한 일이 없는 마리아에게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믿기 어렵다는 마리아에게도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7)고 증거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바벨론에 포로 되어가 있는 이스라엘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예전보다 더 크게 번성할 것이라는 예언을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54:1)고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하셨다.

바울은 바로 이 사실을 인용하여 혈통을 자랑하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임을 자긍하며 자랑하는 유대주의자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인용하였고 이 예언은 헛되지 않아서 육신적인 유대인들의 후예들보다 세월이 흐를수록 언약의 자녀들인 그리스도인들이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많아 졌음은 이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27f) 이스라엘이나 과거 우리 대한민국은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푸대접을 당하고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던 여인들의 눈물이 많았다. 사람으로 할 수 없는 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로 인하여 기뻐할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적으로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27f)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런 안타까움을 뒤집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감격하는 표현이다.

엘가나의 아내였던 한나는 자식을 둔 것으로 자신의 적수였던 브닌나로부터 조롱을 당했고 눈물로 기도하여 사무엘을 얻고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삼상2:5b)라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람의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한 바 있다.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27b) 이 말씀 역시 상징적인 표현이다. 앞에서 인용한데로 사라가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18:12)라는 표현처럼 분명히 부부는 부부인데 생산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에서 “홀로 사는 자”[ἔρημος, 외로운, 광야의, 버려진]로 비유되고 있다.

여기에 반하여 “남편 있는 자”란 육신적으로 생산이 가능한 하갈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언약보다 인간적인 방법에서 앞의 “홀로 사는 자”인 사라와 비교되고 바울은 이것을 육신적인 이스라엘과 영적인 그리스도인을 비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에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이 될 것이다. 인간적인 노력보다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이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울 것임의 찬양이 될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에서의 절망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기 때문이다.



Ⅱ. 어두움이 빛을 박해한다(28~29).

많은 부분에서 역사 속에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짓된 사람들로부터 어려움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는 일은 반복되어왔던 것은 지금 갈라디아 교회에서 참된 진리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주의자들로부터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는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있어 확신이 필요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 살면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맞는가?’라는 회의감이 들 수도 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에게 먼저는 확신을 주기를 원했을 것이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28) 오늘 날에도 많은 사람들과 같이 행하지 않는 것들 때문에 ‘정말 우리가 진리를 따르고 있는 것이 맞는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의 지체들이 더욱 그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성령께서 참된 종인 바울처럼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28) 한다면 얼마나 큰 확신이 되겠는가!

특히 바울의 애칭인 “형제들아!”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창세기나 이사야의 먼 과거의 이야기를 인용하다가 그 과거의 이야기를 지금 바울의 편지를 읽고 있는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직접 옮겨가는 것을 본다.

‘과거에 있었던 이 하나님의 약속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너희]들에게 주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언약이란다.’ 또 과거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주셨던 이 격려는 당연히 같은 이유로 핍박이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확신이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29) 이러한 표현도 창세기에서 인용하고 있는 본문의 내용 하고는 조금은 차이가 있다. 창세기21:8에 보는 대로는 이삭이 자라서 젖을 떼는 날에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9)고 기록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화가 난 사라가 다음 절에 내용처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창21:10) 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세기21:9 원문의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צׇחַק(tsakhak), 웃다 멸시하다, 비웃다, 핍박하다]”는 본래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이 웃었던 표현과(창17:17) 18:13에서는 역시 하나님의 같은 약속에 사라가 웃었다는 표현에 같이 사용된 낱말이고 39:14, 17에는 요셉을 유혹하던 보디발의 아내가 자신에게 겉옷을 남겨두고 도망쳐 나간 요셉이 자신을 희롱했다는 표현에 사용된 낱말이다.

어찌 보면 아브라함 내외가 하나님의 언약을 비웃음으로 받았던 그 조롱을 그 아들 이삭이 받게 하신 것 역시 의미하는 바가 있다고 보여지고 꽤 성장해서 아브라함의 재산을 자신이 상속하리라고 기대했을 이스마엘이 이삭이 태어나고 자라자 그를 핍박하는 것은 믿음 없는 육신적으로 당연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는 당연히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준 이스마엘 일 것이고 “성령을 따라 난 자”는 오늘 본문의 내용과 관련해서 이해하면 ‘약속을 따라 난 자’인 이삭이었다면 이것은 다시 “육체를 따라 난 자”는 갈라디아의 “유대주의자”에 적용되고 “성령을 따라 난 자”는 언약으로 오신 메시야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듭난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을 표현하는데 어색하지 않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29) 아브라함 때에 그러했던 역사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확인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난 자는 박해를 받는다고 해도 결코 육체를 따라 난 자와 같은 모양으로 대항하지 않을 것이다. 성령의 사람은 비록 자신을 박해하는 대상일지라도 스스로 대항하지 않고 그러한 대상 조차도 하나님 아버지께 맡겨 드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환란 당하는 그의 백성들을 위로하신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2~13)

진리를 순종하고 실천한다고 반드시 존경받고 칭찬만 받는 것은 아니다.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처럼 옳지 못한 사람들로부터 오히려 진리를 따르고 순종하는 것 때문에 박해를 받을 수도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상급은 당장에 이 땅에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Ⅲ. 가짜를 내쫓으라(30~31)!

그럼에도 우리 신앙의 삶에 옳지 못한 것들, 진리를 거역하게 하는 것까지 용납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것들은 단호하게 우리의 삶에서 내쫓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에 끌려다니다 보면 결국 진리를 따르지 못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거역하고 잃어버리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30f) 우리는 어떤 것 보다도 성경의 명령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역사가 변해도 누구에게나 동일한 권위와 변치 않는 호소력을 가진 하나님 말씀을 그 때 그곳의 말씀과 오늘 나에게 주시는 명령으로 받들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의 생각이나 판단이 성경을 넘어서는 것은 대단히 경계해야할 믿음의 자세이다.

오늘도 어떤 일이든지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30f)는 사람의 입장과 판단은 이렇다 할지라도 성경이 이것에 대해서 무엇을 말씀하시는 가에 귀 기울이고 순종해야 할 절대적인 권위이다.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30f) 이 명령은 사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이른 말이었다(창12:10). 이렇게 말하는 사라는 어찌 보면 대단히 몰인정한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하갈과 이스마엘은 전적으로 사라의 요청에 의해서 이루어진 결과이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볼 때 자신에게서 아들이 낳다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 하는 것은 인간관계로서는 옳지 못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가로막는 것이라면 사사로운 인정에 끌리는 것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서 때로는 사사로운 우리의 감정은 접어야 할 때도 있고 이것이 세상의 윤리나 도덕적으로 판단할 때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신앙의 사람이라면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만 한다.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30f) 이 말씀은 또 다른 측면에서는 종의 근성을 가지는 수동적이고 비 생산적인 것들을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버려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아들(딸)로서의 권위를 잃어버리고 마치 탕자의 형과 같이 있는 듯 없는 듯한 은혜를 잃어버린 그런 삶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안타까웠던 탕자의 아버지는 그 큰 아들에게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눅15:31) 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버지의 것이 자신의 것이라는 확신이나 자신감이 전혀 없는 종과 다름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30)는 매몰찬 말은 사랑의 하나님께도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것이 바로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30b)는 것에서이다.

우리는 분명 공중권세 잡은(엡2:2) 어두움의 세상주관자들(엡6:12)로 말미암아 죄가 관영 하는 세상에 있고 우리 힘으로는 이 세상 속에서의 어두움은 완전히 쫓아낼 수 없다. 그럼에도 이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전한 제사로 죄를 대속하심으로 이 세상 밖으로 불러내신 우리 영혼과 마음 속에 빛을 허락하셨다.

그렇다면 더 이상 빛의 다스리심을 받는 우리의 삶에서 빛을 가리고 은혜를 잃게 하는 어두움은 머무르지 못하도록 매 순간 내쫓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두움은 하나님의 언약을 가리고 잃게 하여 우리로 하나님의 영원한 유업을 얻지 못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유업을 받지 못하도록 가리는 것들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당장 내쫓아버려야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언약과 유업이 더욱 분명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유케 하시려고 모세로 하여금 이집트의 왕 바로에게 열 가지 정도의 형벌을 내리셨다.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는 것 같은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그 내리시는 형벌을 멈추게 해 달라 할 때 “내가 왕과 왕의 신하와 왕의 백성을 위하여 이 개구리를 왕과 왕궁에서 끊어 나일 강에만 있도록 언제 간구하는 것이 좋을는지 내게 분부하소서”(출8:9)라고 물을 때 바로는 “그가 이르되 내일이니라…”(10) 하는데 사실 ‘바로(당장) 지금부터’라고 했으면 더 좋을 듯한데 바로는 역시 어리석은 군주였음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 속에 빛과 함께 두어서는 안될 하나님의 언약을 잃게 만드는 어두움의 도구들은 빨리 내쫓는 것이 잘하는 것이다. 절대로 이집트 왕 바로처럼 내일까지 둘 필요가 없다. 바로 다음 장인 5:19~21에서 바울은 “육체의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라고 증거하고 있다.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30b) 이것을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율법주의나 사람들의 육체적인 노력은 하나님의 완전한 언약인 복음과 함께 유업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몰인정할 정도로 내쫓아야 하나님의 약속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교훈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안타까운 것은 복음 속에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율법을 내쫓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같이 다루고 있는 모습들을 보는데 이것은 성경이 분명히 금하신 모습임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31) 이 말씀은 지난 주부터 나누었던 v21~30까지의 결론이면서 다음 5:~의 실천편의 도입부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거듭난 복음 속의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 삶의 법칙이며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영을 좇아 사는 사람이고 지상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위에 있는 예루살렘의 가족으로 여기 표현대로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들이라는 확신과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를 순종하기만 한다면 언제나 환경과 입장에 관계없이 찬양을 주시는 승리의 이유가 되는 분이시다. 그런 이유에서 다윗과 같이 찬송의 고백을 받으시는 분이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그럼에도 어느 시대이든지 참된 언약의 백성들은 어두움의 세력으로부터 어려움을 당하지만 그것은 미래에 받을 상급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느니라”(롬8:18)

각 사람은 향하는 목표에 따라 자신의 삶 속에서 내쫓는 것이 다른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언약에 방해가 되는 어두움과 종의 근성 같은 것들을 단호히 내쫓으라 명령하시는 데 그런 것들과 함께 약속된 유업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싶다면 우리 삶에 깃들이려는 미움도 시기도 원망도 내일이나 다음이 아닌 미련없이 바로 당장 내쫓으라! 당부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