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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갈 4:21~26 2021-11-07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늘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이 시간마다 시간을 때우거나 사람의 말로 이 시간을 채우는 것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생명의 진리로 이 시간을 채울 수 있기를 늘 기도하고 바란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완전한 언약인 믿음으로 누리게 되는 복음과 복음이 주어지기까지 그 복음을 필요로 하는 죄인된 사람을 알게 하는 정죄의 법인 인간적인 행위와 하나님의 언약으로 주어진 결과를 대조한다.

아브라함의 아내였던 사라와 늦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을 견디지 못하여 인간적인 방법에 의해서 시도되었던 아들 잉태를 위해 한시적으로 주어졌던 이집트 여인 하갈과 이 두여인을 통해서 있게 된 두 아들을 비교하는 것으로 이해시키려는 시도를 본다.

창세기 16장과 21장의 사실을 배경으로 비교하는데 이러한 논의는 예로부터 랍비들의 일반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바울이 처음으로 시도하는 비교가 아니라 예전부터 있어왔던 논의라는 것이다.

로마서에서나 히브리서에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이 칭송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이 부부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음에도 완전한 은혜를 누리기까지는 우리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인간적인 모습을 더러 보게 되고 그런 입장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만 확실히 가진다면 오늘 우리도 아브라함 내외와 같은 믿음의 후예들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도 확인하게 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유브라데스(에덴동산에 흐르던 4개의 강 중 나중까지 그 이름이 거론되는 강-창2:14b) 강을 넘기는 하지만 가나안에 들어오자 말자 만난 가뭄으로 이집트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있었던 안타까운 일은 아내인 사라를 누이라고 속여서까지 자기 생명을 잃지 않으려는 인간적인 애착을 보게 되고 공교롭게도 그 때 바로로부터 얻게 된 종들 가운데 하갈을 얻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창12:16노비).

십여년이 넘도록 가나안에 살면서 일찍 주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된 후사가 없음에 대한 불평도 과거에 거론한 바 있다(창15:2…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17:18…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상속자가 엘리에셀이라는 투정 후에 사라의 권면으로 하갈을 취하게 되었고 이스마엘을 갖게 되는 오히려 너무나 인간적인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언약속에 不協和音을 일으킨 것도 사실이다. 결국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시도를 하는 것이 결코 득이 되지 않음을 배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시 언약의 후사를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인간적으로 있게 된 이스마엘을 거론하는 아브라함의 한계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약속의 성취가 아니었더라면 이삭은 받지도 못했을 것이고 사라 역시 아들이 있으리라는 하나님의 언약에 웃고 마는 자세 역시 사람의 한계를 그대로 나타내는 모습이다.

어찌 보면 율법주의 즉, 인간적인 노력과 하나님의 언약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를 아는 것 역시 이 두 여인의 비교에서 볼 수 있다. v21~31가 한마당이고 같은 내용이지만 편리상 두 부분으로 나눠서 생각하려고 한다.



Ⅰ. 율법을 알지 못하느냐(21)?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복음을 맛보고서도 과거의 율법에 돌아가려 하는 어리석음과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다. 어느 문화이든 미개한 미신 속에 살다가 복음을 제대로 맛본 사람이라면 절대로 과거의 어리석은 미신으로 되돌아가려는 사람은 사실 없을 것이다.

복음으로 누리는 자유와 감격이 너무나 크고 어떤 미신이나 종교에도 비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일반적인 미신의 제약은 사람들의 삶을 참으로 어리석게 만들고 확실치 못한 것들에 종 노릇을 시키는 것은 너무나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꿈자리만 사나워도 고민하고 하늘에 조금 낯선 징조만 나타나도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어리석음에 종노릇 하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맛보았다면 과거의 그런 어리석은 삶에 돌아가려는 사람은 적어도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 자신의 경험은 그것이 확실하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21f) 여기 “율법”에는 원문에 관사가 없어서 특별한 모세의 계명이라든가 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반적인 ‘율법주의’정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아닌 대부분의 종교를 포함한 인간적인 노력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즉, 율법의 다스림을 받고 살고자 하는 자들이지만 지금 그들을 복음에서 끌어내어 자신들의 수하에 두고 종노릇 하게 하려는 율법주의 자들의 의도를 일깨우는 호소이다.

앞에서도 이미 이 “율법 아래”의 상태를 거론한 바 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4)이라고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아래 종노릇 하는 사람들을 그 안타까움에서 끌어내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친히 그 율법의 다스림을 받는 상황에 내려오셨다는 확인이었다.

그보다 앞서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3:23)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완성된 복음이 주어지기 전에 모든 인류는 예외 없이 정죄의 율법의 다스림을 받는 운명에 매여 있었지만 다행히도 하나님께서 예정된 십자가의 은혜의 때까지 만 허용하셨다는 비극과 은혜를 아울러 증거한 사실이다.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21b) 여기서는 앞의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는 표현과 다르게 관사가 붙어 있어서 특별히 이스라엘에게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질문형식으로 과거의 하나님의 언약과 인간적인 시도를 비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그 율법아래 계셨을 때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향하여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7:49) 라는 말로 율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오히려 복음을 거역하는 이유로 율법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이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 주어졌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오히려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저주받는 자들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었다.

죄와 어리석은 문화, 종교아래 있다가 복음이 주는 엄청난 자유를 맛보았다면 다시 과거의 정죄의 법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아니 복음의 자유를 알지 못해서 여전히 율법아래 있고자 한다면 참으로 가련한 사람일 뿐이다.



Ⅱ.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약속으로 난 자(22~23).

여기서부터는 구체적으로 과거의 종의 아들과 언약으로 얻은 아들 간의 차이를 분명히 비교하고 있다. 어쩌면 이 순서는 바뀌었으면 더욱 자연스러울 것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귀중성이 먼저이고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 순서를 바꾼 것으로도 이해가 된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22f)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이지만 그러나 사람의 생각과 잘못된 판단으로 하나가 더해져서 두 아들이 된 것을 지나쳐서는 안될 것이다. 분명히 두 아들이 다 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은 아들이지만 그 태어난 밭이 다르다.

오직 언약을 따른 자식만이 하나님 약속이라고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롬9:7~9)고 말하고 있다.

결국 탄생의 차이가 이렇게 다르고 어디에서 난 것은 이렇게 귀중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땅에서, 세상에서 난 것과 위로부터 거듭나는 것을 비교할 수 있고 먼저 위로부터 오신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8:23) 말씀하셨고 복음 속에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드시 위로부터 거듭나야 함을 확인할 수 있다(요3:3).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22b)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였지만 그것이 실현되기전에 사람의 노력의 결과가 먼저였고 역사 속에 이런 일은 더러 있어 온 것이 사실이다.

메시아는 사람이 범죄하자 말자 선포되었지만(창3:15) 수많은 거짓 메시아가 나타난 후에 비로소 약속이 이루어졌음도 보게 되는데 그런 이유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선언하시기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요10:8) 말씀하신 바 있다.

“하나는 여종에게서 -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차이는 바로 사람의 생각과 노력의 결과가 먼저여서 때로는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을 방해하고 언약을 의심하게 만들기도 한다. 결국 계속적으로는 함께 할 수 없는 관계가 이 두 아들이다. 예수께서도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요8:35) 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왜, 종이 영원히 거하지 못하는 가를 해설하는 내용이 덧붙여지고 있다.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23) 바울 사도는 로마서 8장에서 육신과 영의 이치를 비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국 보이는 육체는 썩고 쇠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그와는 반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속한 것은 영원한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

“육체를 따라 -약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 하셨지만 10년이 지나도 그 약속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자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 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창16:2) 어찌 보면 인간적인 생각은 이렇게 잘 타협됨을 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요8:15) 말씀하셨듯이 육신으로 난 사람은 당연히 육체를 따라 판단하게 되어 있음을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의 언약을 바탕으로 생각하는 것과 단순히 인간적인 판단은 그 기준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오늘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하는 우리들 역시 판단 기준은 우리 각자가 난대로 판단하고 생각하게 되어 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하는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주고 있는 경계이다. 육신의 판단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이해하지 못하여 오히려 원수가 된다고까지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하늘로부터 거듭난 하늘의 성도와 율법과 같은 세상의 이치로 사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그 태생의 차이가 다른데 그것은 종의 자식과 창세전부터 계획하시고 시행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구원의 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알아야 한다.



Ⅲ. 두 예루살렘(24~26).

OT의 역사 속에 사실적인 역사를 들어서 하나님의 구속사적 역사를 해설하는 중요한 내용으로 이러한 가르침이 유대인들에게는 사실 혁명적인 이해가 될 수 있는 것은 저들이 큰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율법을 복음과 비교될 수 없는 하찮은 것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이 내용은 바로 앞의 v22~23을 다시 해설하는 내용이다.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24f) NT성경에 자주 사용된 “비유”는 주로 “παραβολή”(마13:3, 10, 13; 막3:23 등등)가 쓰였다. 그러나 여기에 사용된 “비유[ἀλληγορέω = ἄλλος(다른) + ἐγείρω(깨우다, 말하다)]는 NT에 이곳에서 만 사용된 낱말이다.

영어로 allegory가 이 단어에서 번역되었는데 지식백과사전은 이 알레고리를 “어떤 추상적 관념을 드러내기 위하여 구체적인 사물에 비유하여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하여 바르게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24f) 여종 하갈과 여주인 사라를 율법과 복음을 바로 이해시키기 위한 비유로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더 쉽게 말하면 하갈을 OT, 그리고 자유 하는 여인인 사라를 NT에 비유하여 옛 언약과 새언약을 비유하는 것이다. 물론 율법이나 복음은 보이지 않는 “약속” 또는 “언약”이기 때문에 추상적인 것이라면 하갈과 사라는 역사 속에 실제 했던 인물들이다.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24b) 그 첫번째가 십계명을 받았던 시내산과 같은 종의 법으로 자유 하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앞에서 말한 초등교사(3:24~25)와 같이 사람들의 죄를 알게 하여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율법의 역할이라 했다.

비유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25f) 라고 하여 땅에 있는 시온인 예루살렘과 하늘의 새 예루살렘 즉, 진정한 시온을 비유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의 간격을 하늘과 땅처럼 비교하는 곳에서 유대인들은 이 이해를 결코 좋아하지 않을 내용이지만 하나님의 예정과 구원의 역사에서 바른 이해이다.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25b)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과 더불어 하늘의 백성이라는 자긍심을 갖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복음의 핵심인 메시아를 나게 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종노릇 한 것이 분명하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26) 시간과 공간 속에 머무르는 한계를 가진 아래 땅에 있는 예루살렘과 비교하여 무한하신 하나님과 영원히 존재할 위의 예루살렘을 확인하면서 종노릇 하지 않고 비교될 수 없는; 사람이나 죄가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과 그분께 붙은 성도들의 영광과 진리의 자유를 사실적으로 누릴 하늘의 성소를 말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그곳에는 성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성전이 되시기 때문에 별다른 성전이나 빛이 필요치 않다고 증거해 주고 있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계21:22~23)

히브리서 기자는 OT 하나님 백성들이 시내산에 임재 하셨던 하나님의 위엄을 두려워했던 내용을 히브리서12:18~21에서 말한 다음에 그러나 복음 속에 성도들에게는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22~24)고 증거하고 있다.

이런 내용과 더불어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두번째 오셔서 완성되겠지만 우리의 시민권도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3:20) 라고 확인해 주고 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26) 우리 신앙의 사람들은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상징적으로는 교회를 어머니로 이해하는 것은 교회를 통해서 성도를 잉태하고 키우는 일이 교회안에서 이루어지기 지기 때문에 그렇게 이해한다.

그럼에도 이런 이치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v26의 내용을 들어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이해까지 하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것들을 보면서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본래적인 질서에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실감하게 된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26)는 말씀만 따로 떼어서 하나님의 여성형 즉, 모성인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분명히 이미 어떤 전제를 가지고 성경을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론을 세우기 위한 다른 한 구절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라는 말씀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남자와 여자 양성으로 지으셨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어머니 하나님도 되신다.”는 어처구니없는 교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성경이 쓰여진 히브리어나 그리스어가 우리 한글과는 다르게 분명한 성을 가지는 관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 만으로도 이런 오류를 판단할 수 있다. 성경 어디를 봐도 하나님을 여성형의 관사로 쓰여진 데가 없다는 것은 성경을 어느정도 아는 사람들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특히 그들이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근거로 제시하는 v26의 “어머니”를 칭하는 “μήτηρ” 앞에 여성관사는 물론이고 아무 관사도 사용되고 있지 않음을 본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버지로서의 부성(父性)은 사람의 기준에서 생각할 성격의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한 생명 진리의 자유를 맛보고도 과거의 옛 구습에 돌아가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와 성령의 능력을 맛보지 못하면 여전히 자신의 노력에 의존할 수 있는 것이 신앙의 안타까움이다.

언제나 육체를 따르는 일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스르고 하늘의 이치를 어둡게 한다.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사람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지혜이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과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신앙한다는 사람의 목표의 차이이다. 어느 곳에 눈을 두느냐에 따라 각자의 삶의 모습은 달라질 것이다. 쉽게 말하면 현재와 영원, 세상과 미래의 삶을 현재부터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