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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갈 4:16~20 2021-10-31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도 그의 사도권에 도전을 받아서 거기에 대해 해명한 내용들을 고린도 전 후서에서 접할 수가 있다. 아시아 지역인 갈라디아 지역과 유럽의 아가야 지방의 사람들로부터 이런 오해를 당하는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지내지 않았다는 이유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느 사도보다도 귀중한 역할을 해내는 그를 어두움의 세력들은 가만 두지 않았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이간질을 계속했던 이유일 것이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세운 교회들 중에서도 마케도니아의 빌립보 교회만은 자체적인 분란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바울 사도에게는 한번도 오해가 없이 그의 만년에 로마의 감옥에 갇힐 때까지 지속적으로 바울의 선교에 후원한 교회로 나타난다.

과거 갈라디아 교우들과 함께 있었을 때 자신에게 대해 줬던 지난 날의 정감에 호소하던 바울은 이제는 대상을 율법주의 자들로 바꿔 공격하고 그들에게 선동 받아 바른 믿음의 궤도에서 떠나는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안타까움으로 호소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것에는 쉽게 익숙하지 못하지만 잘못되는 데는 그야말로 빠르다. 그런 이유에서도 사람들의 죄성을 지적하기도 하는데 좋은 것은 손에 쥐어 줘도 가지려 하지 않으면서 옳지 못한 것들은 얼마나 빠르게 익숙해 버리는지 모른다.

이것은 어린이들의 인성교육에서도 그렇지만 신앙에서도 다르지 않은 안타까움을 경험하곤 한다. 그렇게 큰 확신으로 열심이던 사람이 잘못되기 시작하면 언제 좋은 믿음의 관계를 가지기나 했느냐는 듯 쉽게 변절 되고 마는 예를 볼 수 있다.

앞에서 바울이 그랬듯이 과거 좋을 때의 관계를 떠올려 보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듯 마음을 쉽게 접는 것들을 보기 때문이다. 오늘의 바울의 경우처럼 좋은 일에 예수 그리스도께 열심내는 것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그런 사람들의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대부분 잘못된 사람에게 라는 데 문제가 있다.

죄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은 바른 말을 하는 것을 절대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좋은 일에 열심이면 얼마나 좋을까 만은 착하고 좋은 일보다는 허황되고 잘못되는데 열심을 갖는 것이 대부분이다. 또 해산하는 수고와 같은 노고로 새로운 삶을 살게 해 놓으면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시작했던 것들조차도 끝으로 가면서 잘못되어 버리는 일이 더 많다.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야 할 신앙의 사람들 조차도 사람들이 보아주지 않아도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서로의 확신보다 끊임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넘치는 희생의 은총과 성령의 교통을 헛되게 하는 의심을 갖을 수밖에 없는 종교의 삶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Ⅰ. 진리의 원수가 되어서는 안된다(16).

참으로 비통한 탄식이면서 안타까움이다. 진리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끼리 그 진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히 한 쪽에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진리의 사자인 바울이 문제가 있을 수는 없을 것이므로 역시 갈라디아 교우들의 문제일 것이다. “참된[ἀληθεύω, 거룩한 삶과 하나님의 진리를 열심을 다해 지키고자 하는 생활 습관을 말함]”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주로 진리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25회)를 반복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인 요한복음 속에서 그 진리의 주님을 배척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8:47)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진리의 교훈을 거절하는 것은 진리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단적으로 말씀하셨다.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오로지 자신의 정치생명만을 늘려가려고 하는 빌라도에게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18:37b) 하심으로써 진리에 속한 자는 당연히 진리를 말하면 듣게 되어 있다고 증거하셨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16) 앞에서 감정에 호소했던 대로 그렇게 귀하고 긴밀한 관계속에 있던 너희가 이렇게까지 바뀔 수 있느냐는 탄식이다.

사실 진실을 말하는 데도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다. 그러나 양치기 소년에게 속았던 사람들은 나중에는 사실을 말해도 ‘저 말도 역시 거짓일 거야!’라고 단정해 버리기 쉽다. 그만큼 죄악의 세상은 진리가 통할 수 없는 거짓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제 휴대전화의 컬러링을 Billy Joel 이란 가수의 “Honesty(정직함)”이란 노래를 사용하고 있다. 대개 신앙의 사람이 이런 노래를 사용하는 것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태에서 정직함이나 진실함을 기대하는 것이 이 노래처럼 쉽지 않다.

전화를 걸면 들리는 부분은 Honesty is such a lonely word, 정직함 이란 고독한 낱말이지요, Everyone is so untrue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진실하지 못하죠. Honesty is hardly ever heard, 진실함 이란 듣기 어렵다. And mostly what I need from you, 그리고 그것이 당신으로부터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랍니다. 라는 부분이 반복된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거짓된 율법주의 자들의 가르침과 대조하여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바울은 그 생명의 진리를 가르침으로 원수가 되었느냐는 탄식이다. 왜냐하면, 빛의 원수는 어두움인 것처럼 진리의 원수는 당연히 거짓일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여기 “원수[ἐχθρός, 미워하다, 증오하다]”는 단순히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항하고 공격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바울은 영적인 것을 대적하는 것은 육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없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로마서 8장에서 보게 된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함으로서 [육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법]을 대조 시키면서 이 둘은 조화될 수 없는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계실 때도 그분의 진리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진리 인척 하는 종교지도자들이었음을 볼 수 있다. 언제나 진리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보내신 일꾼들은 이 세상의 어두움으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미움을 당했다.

그런 이유에서 어느 누구든지 적어도 진리를 대항하는 자리에 함께 해서는 안된다. 그것 자체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Ⅱ.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을 내라(17~18).

신앙에 언제나 필요한 것은 열심이다. 요한계시록에서 현재형의 교회로 비유되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바로 이런 경계를 받고 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3:15)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17f) 갈라디아의 유대주의 자들이 갈라디아 교우들을 향하여 열심내는 것이 좋은 뜻에서 가지는 열심이 아니라고 바울은 단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사실 모든 열심이 다 좋은 것이거나 옳은 것은 아니다. 바울은 자기 동족 유대인들의 열심에 대해서 오히려 경계를 주고 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10:2~3)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는 열심이어야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데 열심을 가진다면 그것은 오히려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열심을 갖는 사람들이 대개 건전한 사람들이 아니라 옳지 못한 신앙을 하는 사람들이 더 열심임을 보는 것이 안타깝다.

진리를 따라 신앙할 때는 하는 것인지 안 하는 것인지 모르던 사람들이 건전치 못한 곳으로 가서는 뜨거운 열심을 내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올바른 신앙에 있는 사람들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미지근 한지 이해하기 어렵다.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17b) 결국 저들은 바울과 갈라디아 교우들을 이간시켜 멀어지게 하고 마침내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끊게 하여 갈라디아 교우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열심을 내게 하려는 것이라고 바울은 경계하고 있다.

그럼에도 바울은 열심자체를 문제시하는 것은 아님을 다음절에서 가르치고 있다.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18) 이 말씀을 공동번역에서는 “그들이 좋은 동기로 여러분에게 열성을 보인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라고 번역하고 있다.

오늘 우리 시대도 열심을 내게 하는 방법에 주로 동원하는 것이 경쟁의식을 부추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의 방법에 있어서 옳은 것이 못된다. 믿음의 사람들의 열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한 것이 되어야 한다. 믿음에서는 결과보다도 방법 또한 매우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18b) 무엇을 말하는가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가르치고 있고 빌립보 교회를 향한 권면이 이와 다르지 않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빌1:27)

우리의 올해 푯대세움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 즉, 믿음의 사람들이 복음을 삶에 적용하고 나타내는 것은 바울이 옆에 있든지 없든지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는 말씀이다.

그것이 바로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빌1:27b)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을 위한 뜻에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협력하는 것은 어느 시간 어느 곳이라도 성령과 하나님의 종들이 바라는 것이라는 말이다. 인생이나 하나님의 일에 누가 주체인가가 대단히 중요하다.

사실 신앙안에서 좋은 것은 언제든지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은 언제든지 나쁜 것이다. 앞에서 제 컬러링을 소개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정직함이나 솔직함 진실함은 어느 시대 어느 사람들에게나 좋은 것인 것처럼 죄인을 살리는 복음을 위한 헌신이나 열심은 어느 사람이 보던 보지 못하던 하나님 앞에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우들은 사실 바울에게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15)고 증언한 것처럼 열심을 가지고 협력했었는데 지금은 그 열심을 거짓 율법주의 자들의 옳지 못한 열심에 속아 그들에게 사랑받고자 애쓰는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열심을 내게 하는 것은 그 동기가 중요하다. 바른 동기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에 감격시키고 자신이 감격한 그 십자가의 복음에 또 다른 사람들을 감격시키는 것이야 말로 가장 바람직한 열심이고 하나님의 뜻에 협력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확신이며 감사를 바탕으로 한다. 진리와 은혜, 그리고 주님의 사랑으로 거듭난 우리 각자의 인생이 열심내기에 결코 부족하지 않다. 우리의 진리와 구원으로 인한 열심 그것은 또한 선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다른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한 열심으로 나타나야 한다.



Ⅲ. 불신의 관계가 되었다(19~20).

바울은 루스드라와 같은 곳에서 실제로 자신이 죽음에 던져지는 해산(解産)과 같은 희생을 통하여 갈라디아에 교회를 탄생시켰고 그럼에도 바울이 떠나온 갈라디아 교회는 다시 유치한 상태로 돌아가 복음이 아닌 율법에 다시 종노릇 하는 데로 돌아가 저들을 복음으로 다시 잉태해야 할 희생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15b)는 자신이 요구하면 가장 귀한 것이라도 아끼지 않았을 만큼까지 자신에게 확신과 감사를 끼쳤던 갈라디아 교회는 이제 와서는 저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의심을 가지도록 도무지 신뢰를 주지 못하는 안타까운 불신의 의혹을 떨쳐버릴 수 없는 바울의 심정이 표현되고 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19) 여기서 바울은 마치 요한일서에서 요한 사도가 사용하는 호칭처럼 아주 정감 넘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사실 바울은 이러한 표현을 다른 곳에서는 사용한 것을 볼 수 없다.

다만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4:15) 하였고 실제로 갈라디아 교우들 역시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데서 바울이 “나의 자녀들아[τεκνίον, 사랑스러운 사람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고 해도 전혀 지나치지 않은 호칭이다.

육신의 자식 하나를 얻기까지는 10달의 불편한 삶과 해산의 아픔 그리고 스스로 인생의 삶을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키우는 수고는 한 인생을 이 땅에 살게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부모들의 희생이다.

이것은 영적인 이치에서도 전혀 다르지 않다. 한 죄인 된 인생에게 말씀의 씨를 뿌려 싹이 나고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성령의 역사와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수고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이 이렇게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죄의 성품을 가지고 범죄하며 사는 한 인생의 영혼속에 영생의 씨앗이 뿌려지고 움트고 자라는 것은 절대로 저절로 되지 않는다. 이것은 본인에게도 마치 병사로서의 고난과 같은 싸움이 있고 운동선수의 피나는 훈련과 그러는 가운데서도 법대로라는 원칙과 함께 농부가 농사를 짓는 것에 비유되기도 한다(딤후2:3~6).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19) 물론 사람들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고는 하지만 범죄 후의 사람에게 있어서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그리스도의 형상” 즉, 생명의 형상이 이루기까지는 누구의 해산하는 고통이든지 반드시 있어야 하고 이것은 기존 죄의 어두운 형상이 죽어지고 장례되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이 시대에는 믿음의 가정들 조차도 부모들이 자녀들을 육신적으로는 낳아 키우면서 이런 영적인 해산의 고통을 포기하기 때문에 자녀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보이고 있다. 한 영혼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 지는 것이 짧은 인생에 영원을 살게 하는 귀중하고 어려운 과제이다.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20f) 지금까지 책망하는 투의 강한 표현들을 써서 갈라디아 교우들의 잘못을 지적하였고 다시 그들의 감정에 호소해 보기도 하였지만 저들의 상태는 변하지 않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말투를 바꾸고 더 강하게 질책할 수도 있고 아니면 부드러운 어머니처럼 타이를 수도 있다는 고백이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은 그침이 없느니라”(잠29:9)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아무리 바른 진리를 가르쳐줘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언성이 높아지기도 하지만 사실은 듣지 않는 말은 언성을 높인다고 듣지는 않는다.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20b) 일반적인 상식이 통하지 않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라는 표현을 쓴다. 과거에 있는 것 없는 것 바울이라면 하늘의 천사처럼 그렇게 대하던 갈라디아 사람들이 그와는 정 반대의 반응이 나오는 것을 바울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음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사실 신앙 속에서 같은 믿음과 같은 방향을 함께 가던 사람이 정반대의 방향을 선택하여 간다면 그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갈라디아 교우들이 무엇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기에 이런 전혀 다른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바울의 안타까움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신앙은 혈연이 아니라 믿음의 관계이다. 주님께서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3) 하신 것처럼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믿고 같은 성령을 의지하는 관계인데 서로 믿음이 아니라 의심이 시작되면 그 관계는 지속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세상의 모든 관계도 믿음이 필요하지만(父母 子息, 夫婦) 하나님의 백성 상호간을 이어주는 것은 믿음뿐이다. 다음 시간의 말씀에서 바울은 진짜와 가짜를 비교하는 것으로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와 여종이었던 하갈을 그녀들이 낳은 아들을 비교하면서 육체와 영적인 차이를 예로 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 4장 말미에서는 결국 영적인 약속을 누리기 위해서는 육적으로 생겨난 것을 내쫓으라고 이 두 여인의 자식의 선택을 율법과 복음에 비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경우도 진실을 말하는 데 거부하거나 원수가 되어서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 참된 말은 들을 때 아플지라도 반드시 들어야 살 수 있다.

우리가 세상일에 열심을 내는 것 이상으로 천국의 일에 열심을 내야한다. 경쟁심이거나 부추김이 아니라 죄 많은 나를 위하여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심을 인하여 열심 내도록 받은 은혜를 늘 헤아려야 할 것이다.

서로의 관계에 의심이 들어서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의 심령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완전히 이루어지고 또 다른 생명 특히 자녀들을 위하여 세상에서 살게 하려고 애쓰는 것 이상으로 해산하는 수고와 신뢰와 사랑으로 협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