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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갈 4:12~15 2021-10-24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이제껏 신앙적 논리로 계속 책망조로 타이르던 바울은 조금 방법을 바꿔서 과거 저들과 함께 있었을 때의 감정에 호소한다.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 당시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지체 장애자를 일으켜 걷게 한 것 때문에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전의 제사장들이 자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려고까지 하였다.

저들의 이런 행동들이 옳지 않음으로 거절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는 전도를 할 수 있었지만 이고니온에서 몰려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돌로 쳐 죽여 성밖에 내치기까지 하였다.

사도행전14장에 나타나는 이러한 일연의 사건들이 일어난 곳이 갈라디아의 남부인 루가오니아에서 있었던 일들이다. 물론 제2차 전도여행 때도 이 갈라디아 남부를 거쳐서 아시아 북부를 지나 유럽으로 넘어가는 과정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바울은 이러한 능력과 승리를 지켜본 저들의 과거 상황을 거론하기 보다는 자신에게 베풀었던 사랑과 호의에 대해 감사하고 그때의 자신의 약함을 상관하지 않고 오히려 천사와 같이 대해 주었던 관심에 호소하고 있다.

신앙의 관계라는 것이 사회적인 관계와는 다르게 서로가 하나님을 깊이 경외함으로 섬기면 그 신앙의 깊이만큼 서로 지체로서의 관계도 두터워지고 교제도 긴밀해지지만 이런 신앙의 관계에 어떤 육신적이거나 세상적인 것이 끼어들면 멀어지고 얕아지는 관계가 되는 것은 자주 경험하는 사실이다.

갈라디아 교회와 바울의 관계가 이런 현상이 두드러짐을 보이고 있다.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서로 하나님의 은혜에 충만해 있었을 때는 자신들의 어떤 귀중한 것이라도 아끼지 않았었던 과거와는 다르게 바울이 떠나온 후 율법주의자들이 부추김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확신이 옅어 지자 그렇게 귀하게 여겼던 바울을 마치 원수같이 생각하고 대항하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런 저들의 감정에 과거에 자신이 갈라디아에 있을 때는 그러지 않았음을 환기시키면서 최고의 대우와 예의로 자신을 귀하게 여겼던 그 과거를 다시 돌아보도록 호소하는 내용이 오늘 다루는 내용이다.

이러한 신앙의 내용은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다르지 않음을 경험하곤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3:2) 라는 호소처럼 언재나 현재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왜냐하면 그것이 나타날 미래의 상황을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라는 요한 사도의 가르침에 마음을 둘 필요가 있다.



Ⅰ. 함께 있을 때는 이러지 않았다(12).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9:21~22)라고 고백한 바 있다.

갈라디아의 교우들이 이방인이건 유대인이건 그곳에 복음을 전하고 기뻐할 때는 서로의 차별을 느끼지 않도록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말한 것처럼 배려하였던 것을 회고한다. 당시 우상숭배자들이 바나바와 자신을 제우스나 헤르메스 신으로까지 여겼지만 바울은 겸손으로 그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고 이 사실은 그들이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이 되셨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2:7) 우리가 주님을 따르고 순종한다면 당연히 같이 낮아짐을 본받을 수 있어야 한다. 낮아졌다고 겸손했다고 무시하면 배은망덕이다.

이방인들은 자신들을 신으로 대우하는 상황이었지만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행14:15f)는 고백은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취했던 행동이었을 것이다.

이런 낮아짐으로 저들에게 내려갔다면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하는 바울의 부탁은 어쩌면 당연한 요구였을 것이고 바울이 그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런 모습이 자연스러웠을 것이지만 지금 바울과 그들 사이에 신앙적 이물질이 끼인 것 같은 안타까움에 바울은 다시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들은 실제로 겸손한 바울의 자세를 무시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세상에서는 이렇게 되면 ‘저나 내나’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겸손은 신앙의 기본이고 그런 겸손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뻐하시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신적인 대우를 받던 자신이 그들과 다름이 없는 자세를 친히 보였고 갈라디아 교우들 역시 그러한 바울에게 당시에는 높은 존경과 감사를 가졌었다면 지금 그들을 떠나와 있다고 그러한 자세가 바뀌는 것은 분명 영적으로 옳지 않은 것임을 지적하고 호소하고 있다.

이렇게 자신과 함께 있을 때의 좋은 자세는 떠나 있을 때도 바뀌어서는 안된다. 신앙이란 어쩔 수 없이 지도를 받는 것이지만 신앙이 자란다고 하는 것은 지도자나 사람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하여 행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조금 뒤에서도 지적하고 있다.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18)

지도자가 있건 없건 영적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 나가고 신앙에 진보를 가져오는 것은 언제나 한결같아야 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빌1:27)



Ⅱ. 육체의 약함이 있어도 업신여기지 않았다(13~14).

바울은 자신이 갈라디아에 복음을 전하게 된 경위가 결코 좋은 이유가 아니었음을 다시 회고시킨다. 그럼에도 구체적으로 바울이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길 수도 있었던 육체의 약점이 무엇이었는지는 바울의 서신들이나 함께 했던 누가의 기록에서 발견할 수가 없다.

특히 바울은 이런 약점을 고린도 교회에 편지에서 더러 언급하고 있다. 나타나는 대로의 기록을 몇 군데 보면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2:3) “그들의 말이 그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고후10:10)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12:7)는 내용들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바울의 육체의 약함이 갈라디아에는 복이 되었다. 만약에 바울이 건강하였었다면 갈라디아를 그냥 지나갈 수도 있었음을 그의 기록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13)고 그들이 이미 알고 있었음도 상기시킨다.

오늘 v15에서 증언하는 것처럼 눈이 별로 좋지 않아서 편지나 서신들도 더디오에게 대필을 시킨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롬16:22)

그럼에도 고린도 교회에 거론하고 있는 [약함]이나 [몸의 약함] 그리고 [사단의 가시] 같은 것들을 추정하는 것은 옳지 않고 꼭 그것을 짐작하고 알아야 유익한 것도 분명히 아니다. 다만 바울의 약함이 갈라디아에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복이지 흉봐야 할 것이거나 부끄러움은 아니다.

그리고 이 바울의 약점이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14f)라는 것으로 봐서 세상적으로나 육신적으로 볼 때는 분명한 약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앞에서 루스드라에서 겪은 일로 인하여 바울은 유대인들의 돌을 맞아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루스드라 이후의 행적을 보면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제자들이 둘어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행14:19~21)라는 행로(行路)를 읽어볼 수 있다.

이런 일연의 사건 후였기 때문에 죽을 정도로 돌을 맞은 상태라면 하나님께서 복음 때문에 다시 살게 하긴 하셨지만 바울의 건강은 많이 상한 상태였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런 복음 때문에 돌을 맞아 상한 것이라고 할 때는 이것이 갈라디아 사람들을 시험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이해에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확신해야 할 것 같다.

또 복음을 위해 맞아 죽었다면 그것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영광일 뿐만 아니라 죽었다고 판단될 정도였을지라도 당시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때임에 비추어 하나님께서 낫게 하셨다면 완벽한 치유였을 것이라는 이해를 할 수 있는 데서도 시험하는 부끄러움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14f)라는 것은 분명 복음 때문에 있었던 것은 아님을 확신해도 좋을 것 같다.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14m) 세상에서는 약하고 추한 것들을 업신여기는 것이 사실이고 사용할 가치가 없으면 버리는 것도 너무나 흔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은 다른 사물처럼 쓸모없으면 버려야하는 물건이 아니다. 다행히도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을 업신여길 정도의 약점이 있었음에도 버리지 않았고 이것이 그들의 복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사실 약한 것을 유익하게 하는 것은 복음밖에 없다. 인간적으로나 세상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장애가 있음에도 업신여기지 않고 버리지 않는 것이 귀한 자세이다. 오히려 이런 사람을 천사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대우한다면 분명 복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대한 보응을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약속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마25: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v4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14b) 이것이야 말로 신앙이 아니고 서는 있을 수 없는 대우일 것이다. 앞에서도 거론했지만 죄가 범람하는 세상에서는 절대로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갈라디아 교우들이 복음의 진수를 맛볼 수 있었다면 그 귀한 복음을 자신들에게 전해준 바울을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라고 여겼을 것이고 자신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대우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비록 업신여길 수 있는 약점과 부족함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어느 누구든 나에게 복음을 끼쳤다면 우리 또한 이런 대우를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의 복음을 가지고 가는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마10:40)고 말씀하고 계시다.

다만 문제는 처음에는 그랬는데 바울이 떠나온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의 백성들을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로 대하심과 같이 그 변함없는 사랑을 받아 누리는 우리 또한 그런 하나님의 사랑과 다르지 않아야 함을 확신하게 된다.

복음만이 죄에 죽을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주신 사랑의 묘약이고 그 복음은 어느 누구를 통해서 전해지든지 강화시키든지 사람의 모양새나 계급이나 형편에 상관없이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대우할 수 있는 믿음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Ⅲ. 복되다고 했던 고백은 어떻게 되었는가(15).

앞에서 봤던 대로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받을 때 그들은 엄청난 감격을 경험했음에도 지금은 왜, 그 감격을 잃어버리고 불만과 안타까움만 가득한가 하는 애처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죄에서 자유를 선포하는 복음 자체가 누가 전하던 충분히 감격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어찌하여 그 감격을 다 잃어버렸는가! 묻는 것이다.

비록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바울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할 수 있었던 그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그 때만 같았 어도 가장 귀한 것 까지도 주었을 것인데 그들의 마음이 모질어 지고 거칠어져서 미움과 원망이 가득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사실 복음은 그 복음을 누리고 사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행복이고 다른 사람들은 맛볼 수도 경험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가 지속적으로 복음 속에 사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부단히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은 다시 세상의 어떤 것에 빠지거나 어떤 경우에는 육신적인 이해로 인하여 영적인 부분이 어두워지고 무디어 지는 것 때문이다.

예를 들면 늘 함께 다니던 주님의 교훈과 이적으로 인하여 감격해 있던 제자들이 주님을 모시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는 중에 주님은 잠이 드셨고 풍랑을 만난 제자들이 놀라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며 살려 달라고 야단일 때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눅8:25f) 물으시며 바람을 잠재우시는 주님을 볼 수 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곳에 두고 자신들만 따로 가는 것도 아닌데 잠시 주무시는 것뿐임에도 제자들은 바람과 풍랑으로 죽겠다고 난리인 것처럼 어쩌면 오늘 우리들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약속에도 세상의 풍파에 우리는 당시의 제자들처럼 허둥대는 때가 분명 있다.

마치 주님을 모시고 가면서도 풍랑으로 두려워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이런 갈라디아 사람들과 오늘 우리를 향하여 바울이 묻고 있는 것이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복[μακαρισμός, 복의 선언, ← μακάριος 복]” 사실 이 표현은 복 그 자체이기 보다는 복되다고 외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데살로니가5:16~18의 말씀을 모두 좋아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16~18f) 이 말씀을 우리가 항상 따라야 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18b) 하신 말씀이다.

‘항상 기뻐, 항상 기도, 항상 감사하라’는 당부가 우리에게 강요처럼 들리면 안된다. 앞의 이 부분만을 생각하면 우리 자신들이 이 세가지를 위해서 애쓰고 힘써야 되는 것 같은 오해를 가질 수 있다. 그러면 오로지 우리의 노력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된다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뒤에 붙여지는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18b)는 말씀이 더 중요하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16~18f)가 결코 강요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항상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누리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의미가 달라진다. 그런 이유에서 이 말씀은 뒤의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18b)는 말씀이 더 중요하고 이 말씀을 빼 버리면 안된다.

바울은 그 때의 상황을 자신 있게 증거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15b) 이 말씀 때문에 사람들은 바울이 눈이 좋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해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몸 중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하나가 눈이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부분이다.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시17:8; 신32:10) “내 계명을 지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잠7:2) 이것은 세상에서도 다르지 앉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산상보훈에서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마6:22~23f)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 인생에 있어 눈의 중요성을 증거하신 바 있다.

이런 이유에서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15b)는 바울의 표현은 어떤 귀한 것이라도 달라고만 하면 주었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실제로 나의 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항상 나의 마음 중심의 가치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다. 이런 입장에서 지금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가장 귀한 대상을 위하여 늘 준비하고 기다리게 되어 있다. 이것으로 도 나의 신앙 상태를 어렵지 않게 진단해볼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부탁하는 것과 같이 자신이 갈라디아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방인들에게 신과 같이 존경을 받는 가운데서도 마치 예수 그리스도처럼 유치한 상태의 저들과 같이 자신을 낮추어 저들과 같이 된 것 같이 자신과 같이 될 것을 부탁하고 있다.

과거 자신의 육체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저들에게 복음을 전한 이유가 되었고 당시로서는 자신을 시험하는 것이 있었음에도 하늘의 천사와 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해 줬던 사실을 기억하기를 부탁하고 있다.

만약에 바울이 요구했다면 당시에 갈라디아 교우들은 어떤 귀한 것도 아끼지 않고 주었을 것임에도 그러한 확신과 신뢰를 왜, 잃어버렸는가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것은 현재 우리의 신앙 상태를 점검하게 하는 그대로의 도전이다. 신앙은 과거의 추억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마음을 같이 하고 서로의 약점을 함께 감당하고 비록 서로 부족함이 많을지라도 하나님의 천사처럼 그리스도 예수처럼 서로를 받아 줘야 하는 행복을 나눠야 한다.

믿음은 항상 현재 진행형이어야 다음 순간에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해도 마라나타를 외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