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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갈 4:8~11 2021-10-17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 보면 계속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반복적으로 가르치지 않으면 쉽게 잊어버리고 가볍게 여기기 쉽다. 또 중요한 것은 세상 것이라도 항상 반복적으로 가르치고 외우게 하기까지 하는 것이 교육의 일상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갈라디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다시 과거의 자연신과 같은 초등학문과 다를 것이 없는 율법으로 되돌아가려는 저들의 태도가 안타까운 것이다.

진리의 맛을 보지 못하고 온 갓 유치한 미신에 종노릇 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맛본 사람이 다시 과거의 불확실한 우상숭배에 돌아가는 것은 사실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불교 승려로 있다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려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허무한 것에 종노릇 하였는가를 되돌아보면서 그러한 전처를 밟지 않아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주님을 전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그들의 역할이 귀하다.

그들은 허무한 것에 종노릇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며 바보짓인가를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그런 열정을 가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러나 반면에 나름대로 교회생활을 하다가 절로 가버리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맛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데서 안타깝기까지 하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마치 불타 죽으려는 상황에서 자신의 온 힘을 다하여 끌어내 놓았는데 다시 그 불속으로 뛰어 들어가려 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표현으로 그들을 위해 희생한 자신의 수고가 헛될까 염려하는 것이지만 자신의 공로의 아쉬움이 아니라 그런 초라한 삶으로 되돌아 가려는 갈라디아의 교우들이 더 안타까운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Ⅰ. 알지 못해서 헛된 것에 종 노릇 하였다(8).

죄로 하나님을 떠난 인류는 경외함으로 섬겨야 할 하나님의 자리에 온 갓 우상을 다 만들어 위하는 음란함이 세계속에 유행하였고 종교적인 것뿐만 아니라 그런 저들의 삶은 자연히 그러한 것들에 매여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고 종살이하는 안타까운 인생이 되어 있는 것이 동서양을 막론한 지구촌의 모습들이다.

바울의 이러한 안타까움은 우리 나라도 예외는 아니고 직접 경험해 봤던 일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꿈 꾼 것을 가지고도 하루가 편치 못하여 유쾌하지 못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 그런 꿈들조차 해석하는 방법을 만들어 놓고 길몽이니 흉몽이니 야단을 떨기도 한다.

사실 꿈에 돼지만 봐도 복권 사는 사람들이 많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조차도 성경의 꿈의 해몽을 이야기하면서 꿈을 해석하려 하는 경향들도 더러 있음을 본다. 늘 하는 말이지만 오늘 우리가 꾸는 꿈은 계시를 위한 성경속의 꿈과는 다름을 알아야 한다.

단순히 꿈을 꾸고 그 꿈에 매여 하루를 사는 사람들을 예로 들었지만 우리의 주변과 일상에 이런 일들은 너무나 흔한 것이 사실이다. ‘~하여 재수 없다.’ 예전에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부두에 들어온 배에 여자들은 올라갈 수도 없었다. 이유는 ‘재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어부들이 사람을 구하지 못해서 아내들과 조업을 함께 하는 일들은 아주 흔한 모습이 되었다. 사람들이 하나님 아닌 것들에 종노릇 하는 일들은 참으로 많고 그런 것들은 그런 사람들의 일상을 이루어 가기 때문에 너무나 안타까운 모습이다. 대부분 각 사람의 정신이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한다.

그런 이유를 오는 본문에서는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8f)라고 아주 일반적인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다음에서 다시 하나님을 아는 것을 증거하겠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삶이 얼마나 초라고 유치한 가는 그것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제주도에 5년 6개월(1988. 12.~1994. 6.) 사역하며 대부분의 제주도 도민들의 일상을 옆에서 보면서 그들이야 말로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복음으로 자유를 얻어야 할 사람들임을 실감하였다. 제주도의 위하는 신이 일만 팔천(壹萬八千)이나 된다고 축제에서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섬기는 신이 많은 만큼 행복이 아니라 비극이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 사람들은 그 자체로 불안하고 두렵기 때문에 무엇인가 자신을 의탁할 절대자를 필요로 하는데 그것이 심지어는 1세기에 최첨단의 문화와 과학을 실현하려던 철학의 토론장이었던 아테네에서 까지도 있었음을 바울이 지적하고 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도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17:23)

자연 현상의 움직임을 보면서 그것에 따라 삶을 결정하고 미래를 선택하는 어리석음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은 이상하게도 과학이나 문화의 발전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데서 사람들의 어리석음은 부정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우리 주님께서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지만 안타깝게도 이 “믿음대로”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실 세상의 사람들에게도 다르지 않은 현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나타내는 믿음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지만 그런 형태로 우상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믿음대로 될 수 있다는 데서 경계를 가져야 한다.

세계를 둘러봐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삶의 질이 다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대개 창조적이고 생산적이며 활기 있고 밝은 삶을 사는 대신 우상숭배를 하는 사람들은 삶이 소극적이고 어두우면서 스스로 제약 받는 것들이 많다.

불신자들의 제약은 시간과 공간 어디에서나 스스로 제약을 받는 것을 보는데 뒤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시간이나 날에 얽매이고 어느 방향이나 특정한 장소는 가서는 안되며 어떤 일에 대해서 가리는 음식조차도 더러 있는 것을 본다[심지어 당산나무가지는 부러져 떨어져도 땔감으로 사용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에 나서 그 안에서만 자라며 사는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참으로 섬겨야 할 것들이 많다.

이런 모든 것들은 사실상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8b) 라는 바울의 안타까움은 사실이다. 성경 중에 사사기를 보면 하나님을 등지고 살다가 주변의 나라로부터 압력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면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다시 사사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건져 주시는 일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솔로몬 후에 르호보암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는 가운데 이집트왕 시삭이 올라와 유다를 치자 하나님께서 “그러나 그들이 시삭의 종이 되어 나를 섬기는 것과 세상 나라들을 섬기는 것이 어떠한지 알게 되리라 하셨더라”(대하12:8; 왕상14:25~28)고 하나님과 세상의 어떤 것을 섬기는 것 중에 어느 것은 좋은지를 직접 맛보게 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헛된 것들에 종노릇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이유가 너무나 크다. 믿음이 큰 사람들이야 모르겠지만 세상에 헛된 것들에 바쳐지는 물질도 하나님께 드리는 것보다는 결코 적지 않음을 볼 수 있다[동티를 만나 심방 한 번 부르면 최소 몇 百萬원이다].



Ⅱ. 이제는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다(9).

앞에서 보았던 대로 자연과 미신에 붙잡혀 종노릇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지나 힘으로는 절대로 그러한 헛되고 어리석은 세력으로부터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다. 그것은 보이는 것보다도 보이지 않는 이면에서 어두움의 세력들이 자신들의 종으로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도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이 되셨고 희생의 대가를 치르시고 십자가 아래로 부르신 것이다. 과거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허황된 짓들을 했던 것들을 생각하면 부끄럽기도 하고 우리를 그런 어리석음과 죄의 저주에서 자유케 해 주신 우리 주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갈라디아 사람들은 과거의 그 어리석음 속으로 다시 되돌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을 어리석음과 죄의 저주에서 끌어내 주기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감당하였던 바울은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9f) 앞에서 살펴본 대로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삶의 질을 달리하기 때문에 너무나 소중하고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사실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두 곳의 말 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하나님께서 비록 죄로 인해 저주에 매여 있는 우리에게 먼저 사랑의 손을 내미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고백하게 되었고 예배하게 되었고 적극적으로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감격하게 되었다.

그러나 감격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9m) 이제는 보다 귀중한 이 우주의 창조자 되신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감격이다.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는 분명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의 사실적인 근거가 되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께 감격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 도시의 시장(市長)이 자신을 안다고 해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자랑하려 한다. 아니 시장이 아니더라도 어떤 조금이라도 이름이 있거나 어떤 직책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안다는 것 만으로도 자랑거리를 삼고 당당해지고 어떤 경우에는 이런 일로 허풍까지 떨기도 함을 본다[술 취해 행패를 부리다가 잡혀만 가도 내가 누굴 안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하물며 ‘이 우주를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바쁘신 분이 나를 아신다.’ 하는 것은 얼마나 큰 자긍심이 되는지 모를 일이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9m)에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이 우주를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분이 내 뒤에 계시는데 두려울 것인 무엇인가! 여러분들은 실제로 이런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가?

성경에서 보는 대로는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아셨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좀 더 감격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암3:2f)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정말 무서울 것이 없다. 물론 하나님께서 아셨기 때문에 “…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암3:2b)라고도 말씀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더욱 가져야 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고 하는 자긍심을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엄청난 상태에서도 부끄러운 행동이 책망 되듯 증거되고 있다.

나 자신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나를 알고 계신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갈라디아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9b) 이것이야 말로 “어찌하여!”라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결국 과거로 돌아가려는 저들의 결과는 부정적인 두 가지 형태가 될 수밖에 없는 모습이다. 또 이미 나온 곳으로 돌아가려 하기 때문에 “다시”, “다시”를 반복하고 있다.

①“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학문에서나 삶의 질에 있어서 더 높은 곳을 바라고 노력하는 것이 지극히 일반적임에도, 사람들이 어리석어 지면 어렵지 않게 이런 반대적으로 떨어지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분명히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다.

반지하방에 살면서 어쩌면 이 곰팡이 피고 퀴퀴한 냄새나는 곳에서 더 나은 곳으로 이사할 수 있을까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정상이지 쾌적한 환경에 살다가 그런 곳으로 내려가 살려고 하는 사람은 없음에도 사람이 무지하면 일반적으로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이런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이런 일은 학문의 진보에서도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정신세계에서는 안타깝게도 이런 일들이 흔하고 갈라디아 교회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의 정신 세계에서나 영적인 일들에서는 이런 현상을 자주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객관적으로 보기에는 대략 봐도 옳지 않은 일들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데 아무리 바른 진리를 외쳐도 외면하는 것을 볼 때 역시 사람들의 죄성과 허약함을 실감할 수 있고 이런 입장에서 바른 믿음위에 있는 것 만으로도 감사할 충분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②“어찌하여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과 앞으로의 삶을 스스로 열어가고 개척해 가기 보다는 어떤 대상이 이끌어 주기를 바라고 기대하는 것 또한 죄에 종노릇 하던 습성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할 것이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영생에 이르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여전히 좀더 가까이 이끌어 줄 대상을 찾고 의지하려는 사람들의 성향도 역시 과거 종노릇 하던 습성의 잔재이다.

이미 우리를 자신의 양으로 삼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약속하시는 영원한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심에도 또 다른 것들의 종노릇 하려는 어리석은 속성에서 자유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왕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맛본 사람이라면 이렇게 주님께서 “어찌하여, 어찌하여” 라고 탄식하시지 않도록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고 어떤 상황이나 시간 속에서 이제는 영원히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진리의 언약에 기꺼이 자신을 맡길 수 있는…



Ⅲ. 헛되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10~11).

사실 가장 유치한 종교의 형태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비롯해서 절기를 지키는 형태이다. 유대종교에서 안식일을 비롯한 금식일 같은 날을 귀중하게 여겼고 달의 시작(사66:23; 골2:16)이나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같은 절기나 안식년이나 희년(禧年, jubilee) 같은 시간 속에서의 특별한 기념할 날과 절기들은 일반적이지만 이런 관습은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도 흔한 모습들이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10) 이런 기념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보다 더 정성이 들어가는 것을 표현하여 “삼가 지키니[παρατηρέω, 비교하며 꼼꼼하게, 세심하게]”함으로서 어찌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도 더 정성을 드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는 여기서도 도전 받는 것이 생명도 없고 언약도 없는 우상이나 허황된 것을 섬기는데도 이렇게 정성을 다한다면 우리를 피 값을 지불하시고 생명으로 사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도 섬기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스러움이다[정성에는 무쇠도 녹는다-무당].

복음 속에 들어와서도 바른 이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막연히 이런 정성과 관습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바울은 로마서에서 증거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롬14:5~6)

이것은 날을 중히 여기는 것을 칭찬하기보다는 그런 선택자체가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고 섬기려는 것에 대한 가르침을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분명히 성숙한 상태가 아니라 역시 하나님을 위하고 섬기되 연약한 상태에서 이긴 하지만 “주를 위하여, 주를 위하여, 주를 위하여” 라는 중심을 칭찬하고 있다.

어떤 계율에 매여 행위를 하는 것은 같은 행위일지라도 역시 종노릇 하는 것과 같다. 가까운 예를 들면 우리 복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십계명(十誡命)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십계명은 지켜야할 계명이 아니라 이미 지켜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11) 어떤 것이든지 유익해야 할 것을 헛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빌2:16m)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 까 함이니”(살전3:5b)

이렇게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헌신한 사람들의 수고를 헛되게 해서는 안되는 것은 최종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1:17b) 더 높은 가치를 떨어뜨리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당부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b)는 경계도 듣게 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3:17b)고 이미 앞에서 확신한 바 있지만 바울은 계속해서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2:2b)거나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3:4)고 안타까워한다.

참된 하나님의 종인 바울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11)는 안타까움은 자신의 공로를 잃을까 봐 힘들어하는 것이기보다는 갈라디아 교우들의 믿음이 잘 못되어 구원의 은총을 잃게 되는 것에 대한 탄식이다.

진리를 알지 못하면 당연히 속이는 거짓에 종노릇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진리가 아닌 종교에 종노릇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위장한 거짓 것에 종노릇 하기 때문이다.

이제 진리 이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아신 바 되었다면 이 생명의 이치를 절대로 잃어서는 안될 것이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을 의지하여 현재부터 영생을 누리는 삶이 되어야할 것이다.

복음이 전파되고 오늘 우리 각자가 그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다면 여기까지 이르게 하신 하나님의 어떤 역사도 헛되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의 희생과 생명의 약속과 이를 위해서 수고한 진리의 종들의 수고와 희생을 헛된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복음으로의 헌신이 보다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서 나의 구원을 더욱 튼튼히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불러드리는 복된 역할을 감당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