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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갈 4:1~7 2021-10-10
때가 차매,  
오늘의 내용도 유대주의에 붙잡혀 다시 율법으로 되돌아 가려는 갈라디아 교우들에 대한 책망을 이어가고 있는데 지난 주 말미(3:29b)에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3:29b)는 내용을 같은 말투로 계속해서 지적한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 율법은 완료되었고 그 율법 아래 율법에 매여 종노릇 하던 보호를 받아야할 유치(幼稚)한 시기는 이미 지났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율법의 저주아래 있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이제는 더 이상 보호를 받아야 될 시기가 아니라 말씀과 성령과 더불어 우리의 앞길을 스스로 열어가야만 장성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갈라디아 교회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살며시 들어온 어두움의 세력의 부추김에 속아 또 다시 그 나왔던 유치한 율법아래 안주하려 하는 안타까움을 보이는 데서 바울은 그럴 때가 이미 지났다고 증거한다. 어쩌면 이 바울의 경계는 오는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의 권면으로 들어야만 할 것 같다.

오늘 말씀에서는 특히 영적인 때에 집중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Ⅰ. 어린 시기에는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이 맞다(1~2).

하나님께서는 창세전부터 모든 인류에게 범죄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회개시켜 천국의 유업을 주실 것을 이미 예정하셨음을 확인하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정하신 대로 아직 그것을 상속할 수 없는 어린아이의 상태에서는 줄 수 없었다는 말씀이다.

특히 여기 “어렸을 때”라는 표현이 좀 독특하다. “어렸을 때[νήπιος, = νέ + ἔπος, 아직 말을 못하는 어린아이]”로 바울은 주로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과 대조하여 미성숙한 영적인 상태를 표현할 때 이 낱말을 사용하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3:1)는 예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여전히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상태라면 하나님의 나라를 실제적으로 누리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믿음으로 장성한 자에게는 음식에서나 어려운 상황에서나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과 함께 그것을 넉넉히 감당한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4)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1b) 장성한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지만 어린아이의 상태에서는 부모의 주는 것을 먹고 시키는 대로 해야 하기 때문에 주인의 명령을 그대로 순종해야 하는 종과 다름이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각자 신앙에 있어서 이것이 점검되어야 만한다.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2) 여기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란 당연히 뒤의 v4에 이어지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때가 차매”와 연결되어지는 것이다.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2) 했는데 “후견인[ἐπίτροπος, 신뢰를 받는 종으로 가정의 지배인, 청지기, 가정교사]”는 앞의 3:24에 “초등교사” 역할을 포함하는 보다 넓은 범위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고 “청지기[οἰκονόμος, 충분한 능력 있는 자로 인정받은 가정관리자]”로서 역할 하는 사람들로 바울 당시에 규모 있는 가정들에 흔히 있었던 직책을 그대로 비유하는 것이다.

바울이 비유하고 있는 배경인 로마법에 의하면 아이가 14살까지는 “후견인” 밑에서 관리를 받고 그 후 25살까지는 “청지기”에게 맡겨졌다고 전한다.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께서 비록 죄 아래 팔렸지만 자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을 절대로 버려 두시거나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심이 다시 확인되는 말씀이다.



Ⅱ.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다(3~5).

지혜의 사람 솔로몬이 “범사가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전3:1~2) 라고 시작하여 v8까지 여러가지 때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섭리안에서 영적인 때를 안다고 하는 것이 사람으로서는 쉽지 않다.

안타까움 뒤에 준비해 두신 하나님 아버지의 역사를 안다면 그나마 견딜 수 있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데 이 안타까움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 때까지 견디는 것이 사람으로서는 힘겨운 것이고 또 영적으로 경성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때를 따라 성장하고 열매 맺는 것도 믿음에 있어서 중요하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볼 때 그런 안타까움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때와 하나님의 때를 비교해서 사용하고 있다. 먼저는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3)

사리 분별이 어려운 어린아이일 때는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인데 여기 “어렸을 때”도 역시 [νήπιος]가 그대로 쓰이고 있다. 갈라디아 교회는 대부분의 이방인들과 그들보다는 작은 수(數)인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라고 하는 것은 이방인들이었을 경우에는 천체(天體)나 자연숭배(deism)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의 다스림을 받았던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계획과 예정에 따라 이러한 유치한 상태의 사람들을 위하여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4) 한 것인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때를 말씀하는 것이 v3과 다르다.

먼저는 “때가 차매[πλήρωμα, 완성, 충만]”라는 중요한 시점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적어도 하나님의 때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람의 때는 형편에 따라 변하지만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시간은 예정된 어떤 것이던지 어김없이 이루어지는 시간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사람으로서 헤아릴 수 없는 은혜의 사건으로 사람들이 해 볼만 한 것을 다 해도 불가능한 죄에서의 자유를 하나님께서 친히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이 역사속에 오신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다.

사람의 범죄로 피폐해지고 고통받는 이 세상에 창조주께서 친히 내려오신 것이다. 제한받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제한받는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 자체도 십자가의 희생의 시작과 같다.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여기에 요점은 동정녀 탄생의 의미 보다는 완전한 사람으로 오신 것을 강조하면서 범죄의 줄기인 남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범죄후에 약속하셨던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는 예언의 완성이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탄생은 역시 믿음없이 인정되기 어려운 부분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이 땅에 보내셨을 때는 하나님이시기 보다는 완전한 사람이다.’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는 말씀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갈3:20)는 말씀을 나눈 바 있고 디모데전서2:5 말씀 자체가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과 사람 모두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런 이유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100% 하나님이시면서 100% 사람이실 필요가 있다.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했는데 당연히 하나님의 언약아래 나게 하신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고 율법을 지킬 수 없었던 사람들과 다르게 그 율법을 100% 지켜야할 당위성을 완성시킨다. 왜냐하면 만약에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으셨다면 사람들로부터 ‘하나님도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왜 주셨는가!’라는 항의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사람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었던 율법을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도 어기심이 없이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b) 하여 완전히 율법을 지키신 유일한 사람이시다.

이제는 사람으로 오시되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목적과 이유를 답하고 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5) 여기는 두가지의 목적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먼저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5f) 한 것인데 앞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할례이전의 믿음의 인정이 할례자들은 물론 무할례자들의 믿음을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한 바 있다(롬4:11~12). 또 여기의 “율법 아래”가 단순히 유대인들의 명문화된 율법만을 의미하기 보다는 앞에서도 다룬 내용이지만 이방인들에게 있어서도 율법과 같은 초등학문아래 있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어쨌든 또 하나의 목적은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5b) 하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들이 되게 하려 함이라’한 것이 아니라 “아들의 명분[υἱοθεσία, 입양, 양아들]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이라고 한 표현이다. 왜 아들이면 그냥 아들이지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다는 것인가? 바로 앞 절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처럼 나면서부터 아들이었다면 그냥 υἱός를 썼을 것인데 당시 로마 시대에 흔했던 입양한 법적인 양아들을 들어서 설명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의 황제들 가운데서도 입양한 양아들이지만 왕의 지위까지 물려 받은 예가 좋은 본보기[초기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가 되 수 있는데 로마의 법에는 양아들은 친아들과 지위상에 전혀 다르지 않게 양부의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까지 물려 받은 예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됨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바울의 흔한 표현이다.

사실 모든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범죄하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 단지 그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일 뿐이다. 그런데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을 통하여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아들의 지위를 얻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엄청난 사랑이다.

아직도 어린아이로 있으려 하는가 이 역사의 마지막 때가 다가오고 있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막13:33)는 경고를 마음에 둘 필요가 있다.

천국이 있음을 사실로 믿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살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음을 나의 눈으로 보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살 수 없다. 천국이 정말 좋고 영원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의 현재의 삶을 위해서 투자하는 것 이상으로 천국을 위해 투자하는가? 안타깝게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아니 우리들의 세상에 자녀들이 살아 남게 하려고 하는 것보다도 천국에 대해서 시간도 물질도 드리지 못한다. 천국을 대가로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고 과연 천국에 들어가려고 한다면 그것은 바른 믿음일 수 없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처럼 바보가 아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그 때를 아셨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다만 우리는 주님처럼 그 때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주님보다 더 경성해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행하지는 않으면서 매일 성경 한 구절을 외우고 성경 몇 장 읽는 것이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마치 예수께서 책망하셨던 탈리트라고 하는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마23:5b) 다니는 바리새인들과 다르지 않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13:11) 참으로 잠자는 신앙의 사람들을 깨울 때가 된 것 같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4:7)는 베드로 사도의 권고를 들어야 한다.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셨는데 언제까지 세상의 종노릇 하려 하는가! 시간의 종, 물질의 종, 명예의 종, 미래의 종, 미움의 종, 질투의 종, 시기의 종이 아니라 이제 아들의 명분을 회복해야 다시 오실 주님 앞에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비참한 종의 운명이 아니라 당당히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으로 삽시다.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셨다. 나를 위해 피 흘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실로 봐야 한다.

앞에서 이미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3:1)한 것처럼 하나님을 사실로 의식해야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 주님의 백성들에게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Ⅲ. 장성해야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수 있다(6~7).

마지막 말씀은 갈라디아 교우들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 지체들 역시 하나님의 아들 딸 된 의식을 바로 가져야 할 이유를 말씀하고 있다. 우리 각자는 지금의 상태로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수 있는지를 점검하는 말씀이 되어야 한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6) 하나님의 아들이라야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고백할 수 있게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이 말씀은 로마서8:14~16의 말씀과 다르지 않다.

v14~15만 인용하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되어 있다. 차이가 있다면 오늘 말씀과 순서가 바뀌어 있다. 그러나 크게 다른 의미는 아니다.

살펴볼 것은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는 내용이다. 먼저 “아빠”는 아람어가 히브리어에 온 형태로 그대로 “아바[אָב, Ἀββᾶ]”의 음역(音譯)이고 “아버지”[πατήρ]는 바울 당시 공통적으로 사용하던 헬라어이다. 그러므로 신, 구약 모두의 표현으로 하나님을 친 아버지처럼 부르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에 마치 까마귀가 짖어 대는 것과 같은 당당함으로 부르게 하신 입장에서 “부르짖느니라[κράζω, (까마귀처럼) 소리지르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까마귀가 눈치보며 깍깍거리는 것을 본 일이 있는가! 없다.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아도 어디서나 어느때나 깍깍깍 노래한다.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정도 당당하게 아버지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7)

갈라디아 교회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 있는 모든 교회에게 주시는 확신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3인칭이 아닌 2인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고 개개인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 된 모두를 향하여 “네가”라고 마치 바로 앞에 앉혀 두고 훈계하는 투로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7f) 하나님께서는 우리(나)를 약속대로 거듭났기 때문에 이미 아들로 인정하시는 데 정작 나(우리)는 아직도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어린아이에 머무르고 있다면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자녀 된 모습을 가질 수 있어야 하고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다.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7b) 죄의 종으로 산다면 거기에는 보장이나 약속이 없다. 반드시 아들로 자녀로 살아야 약속을 유업으로 받게 되는 데 이것이 자의적인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라는 단서를 달고 있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죄인을 거듭나게 하는 방법이 불을 지나게 하는 것이나 다른 것이 아닌 물 속에 장사되고 올라오는 침례일까 하는 것을 요나를 물고기에게 먹혀 깊은 바다 속에 들어가 회개하게 하신 것과 함께 다시 생각하게 된다.

물론 침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죽고 부활에 하나가 되는 기본적인 원리는 가장 귀중하고 바꿀 수 없는 원리는 당연한 것이고 부가적으로 생각해 보는 것이다. 또 이런 이론이 세례의 본질을 약화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물은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 빛과 함께 가장 귀한 창조물이면서 우리가 그 귀함을 쉽게 잊어버리기 쉬운 것이다. 물은 모든 생명을 살리고 씻기면서도 낮은 곳만 찾아 흐른다. 사람들을 그 물속에 충만하게 잠기게 하고 다시 나오게 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하는 것이다.

물에 충만 히 잠기고 올라와 죄 씻음 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면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에서 물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할 의무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 곧 물처럼 죄인들의 죄를 씻기고 살리는 일을 하면서도 물처럼 낮은 곳을 찾아 겸손 하라는 명령이 있다고 보아지는 것이다[참고: 요나].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라면 물처럼 섬기면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과거 복음이 오기 전에는 율법과 같은 세상 초등학문의 지배를 받으면서 온 갓 것들에 종노릇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예정하신 때가 차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힘입어 이런 유치한 형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자녀들이 되었다.

우리 모두는 그러한 유치함에서 일어섰다면 나를 나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항상 현실적으로 바라봐야만 한다. 성경은 인자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지만 그 눈을 표현하기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계2:18b)이라고 묘사한다. 여기에 표현된 의미는 마치 불륜을 저지르는 사랑하는 아내를 향하여 분노하는 남편의 눈과 같은 의미이다.

바울의 논지는 더이상 종노릇 하는 신앙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언제까지 수동적으로 시켜야 일을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노예근성으로 신앙생활 하려고 하느냐, 당당한 하나님의 아들로 살라는 권면이다. 가진 권리로 일하고 사랑으로 용납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삽시다. 어린아이와 같은 세상의 유치함을 그대로 행하며 여전히 종노릇 하는 모습은 더이상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은 아니다.

임마누엘을 관념적으로 만 생각치 말고, 옆에서 항상 불꽃 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계신 하나님으로 의식하는 우리의 삶이 지속된다면 하나님의 언약의 유업은 당연한 것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