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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갈 3:22~29 2021-10-03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지난 시간에는 이익이 없는 율법을 왜 주셨는가를 생각했었다. 율법의 주신 목적(What purpose then does the law serve?)과 주어진 과정 그리고 유효한 기간까지 대부분을 나누었다. 지금까지는 율법의 부정적인 면을 주로 다루었다면 오늘 3장 마지막에서는 그나마 율법의 긍정적인 역할 즉, 적극적인 역할을 가르치고 있지만 뒤로 갈수록 역시 믿음의 귀중성으로 점점 확대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논리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율법은 믿음이 오기까지 훈계하고 감시하며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키우는 역할을 하였다고 지적한다. 사실 어떤 좋은 것도 사전에 알지 못하면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가지고 괴로워해 본 사람만이 어떻게 그 죄를 용서받고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고, 죄의 압력에서 어두운 삶을 살아 본 사람이라야 사죄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실감하게 된다.

이런 이유에서 인생을 굴곡없이 평탄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들은 죄를 지을 이유가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받다 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복음의 은혜를 증거해도 자신들을 위한 일로 들을 수 없어 받아들이는 것 역시 어렵다.

다윗의 시편51편처럼 어두움의 종 노릇하며 죄의 고통을 느껴본 사람이라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가치를 더욱 실감하고 감격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당연한 것이다.

바울은 다윗이 겪었던 사죄의 감격(시32:1)을 그대로 인용함을 듣는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롬4:6-한글)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7~8)

앞에서도 여러 번 말한 바 있지만 하나님께서 무익하고 의미 없는 어떤 것을 절대로 주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면 왜, 율법을 그의 백성들에게 주셨는가 하는 것을 여기서는 간략하게나마 긍정적인 면으로 다루고 있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 가치를 알 수 있는 데까지는 거기에 대한 지식이 자라기까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주어질 귀한 복음의 가치를 알도록 가르치고 키워가는 초등교사 역할을 율법이 하였다는 것이다.

어떤 왕국의 세자(世子)가 절대권을 가진 왕위를 이을 자이지만 그가 왕권을 바르게 사용해야할 권리를 잘 이해하는 데까지 크기 위해서는 성장에 따라 선택된 스승들에게 훈육을 받는 것과 같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잘 받아드리도록 훈련하는 역할을 율법이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세자가 제법 자랐는데도 대소변을 제대로 가리지 못했다면 궁녀들도 “세자저하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라며 볼기를 치면서 기저기를 갈 수 있지만 그런 왕자일지라도 막상 커서 왕위에 오른 후에는 그의 어떤 명령이든지 고개를 조아리고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복음안에서 성도의 삶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율법에서뿐만 아니라 신앙하는 삶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도록 자라야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벧후3:18)

신앙이 자라지 못하면 참된 사랑의 법 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여 말씀을 잘못 이해하거나 잘못 적용하고 어린아이들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잘 못 대하여 주변의 사람들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라면 더 이상 차별을 둘 수 없는 같은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고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을 통해서 주시고자 했던 인류 모두의 복이라는 것이다. 이왕에 이 복음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면 모두 장성하여 하나님의 허락하신 영광을 풍성히 누리는 …



Ⅰ. 믿음이 오기 전(23~24)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행하는 것을 유치(幼稚)하다는 표현을 곧잘 쓴다. 사실 신앙에 있어서 율법의 지배를 받는 상태는 유치한 상태인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 사리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는 어린아이의 상태, 초라(보잘것없고 변변하지 못하다.)한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바울은 세상의 최고학문이라고 하는 철학까지도 다음 장(4:3, 9)에서나 골로새서(2:8, 20)에서 “초등학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면 인류구원의 단계에서 복음에 비교한다면 “율법”은 역시 초등학문임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을 꾸미는데 있어서 겉으로나 속으로는 랍비들 밑에서 나름대로 율법을 배워 거기에 대한 자긍심이 컸던 것으로 성경에 나타난다. 사람들이 볼 때는 그야말로 그럴싸한 대상이었지만 생명의 근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실 때는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음을 지적하시는 내용을 마태복음23장에서 말씀하신다.

그것은 말로는 그럴싸했지만 삶은 그런 가르침과 다른 이중적인 모습이었던 데서 그들의 가르침은 듣되 행동을 본받지 말 것을 주께서 당부하신다(23:3). 남에게 짐을 지우고 자신은 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칭찬 듣기 위해 온 갓 허세를 부리고 사람들을 실족시키고 돈을 좋아하며 진리에 대해서는 눈 먼 소경과 같으면서 남을 이끌어 가려 한다는 어린아이와 다름이 없음을 책망하셨다.

그런 모습이 결국 오늘 바울이 지적하는 모습과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생명의 진리는 사람을 자유케 한다고 말씀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그러나 반대로 율법은 사람을 얽매고 가두어 두었다고 지적한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23)

특히 자신을 포함한 율법을 추종하던 유대인들을 포함해서 그 주체를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되었다고 표현한다. 복음이 주어질 약속의 때까지 사람들을 묶어 두고 복음이 선포될 때까지 가두어 두었다고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다. 매인 것이나 갇힌 것은 모두 자유롭지 못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무엇에 묶이고 가둬 두었는가 하면 죄의 감옥에 잡혀 있었던 즉, 죄인과 같은 포로의 상태였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 매이고 갇힌 상태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가 이어지는데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24) 이다.

아직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아이는 부딪히거나 떨어질 수 있어 위험하기 때문에 행동에 제약을 주는 것(아이가 기어 다니기 시작하면 서랍마다 테이프를 붙이고 모서리마다 완충제를 붙이는)과 같은 의미를 앞에서 봤다면 그 제약이 무엇 때문인가를 말씀하고 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24f) 우리 성경에 “초등교사[παιδαγωγός, παῖς + ἄγω, 아이의 인도자, 보호자]”라고 표현했는데 마치 국민학교였던 교육체계가 바뀌어 초등학교가 되어 초등학교 교사로 이해할 수 있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러나 여기 기록되고 있는 “초등교사” 라고 하는 직책은 그레코-로만 시대의 이 παιδαγωγός 역할은 주인의 어린 자녀를 훈육하여 상위교육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키우고 교육하는 교사를 표현하는 말로 글자의 교육에서부터 인성교육까지 가르치고 잘 못하면 채벌도 할 수 있는 역할이었다.

당시에 이를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은 율법을 이 παιδαγωγός에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반드시 참고해야 하는 한가지는 믿음이 오기 전의 상태를 “아이[παῖς]”에 비유했다면 다음의 [율법이 온 후]의 상태에서는 왕권을 지칭하기도 하고 상속이 가능한 “아들[υἱός, 마4:3; 요3:36; 롬8:14아들; 눅9:22인자]”로 바뀌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24b) 그래도 이 말씀은 같은 율법의 역할이지만 소망적이다. 믿음이라는 확실하고 온전한 약속이 오기전에 율법은 사람들을 죄에 얽매어 가두어 뒀다가 믿음에 인계하여 드디어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게 하려고 그렇게 하였다는 말이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갈라디아와 가까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 v24과 같은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13:39)고 증거한 바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했는데 ‘얻는다’는 표현도 수동적이면서 공로나 노력이 없이 받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증거하는 것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여기서 율법의 조금은 바람직한 역할을 보았다. 사람들로 하여금 매이고 가둬 뒀다가 믿음이 올 때에 인계하기 위한 역할이 율법이라는 것이다.



Ⅱ. 믿음이 온 후(25~27)

물론 역사적인 시간의 간격도 적지 않지만 믿음이 오기 전까지는 매여 있고 갇혀 있던 율법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여기서는 드디어 믿음이 온 후의 상태를 지적하고 있다. 또 아브라함의 혈통의 자녀들 만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자랑했지만 생명의 법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믿음으로 순종하기만 하면 예외 없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고 전한다.

물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로 가능해졌고 이 십자가를 거쳐 거듭난 사람은 더 이상 초등교사인 율법의 간섭과 통제를 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25) 온전한 비유는 될 수 없지만 마치 올챙이가 자라면서 지느러미는 사라지고 다리가 자라서 물속에서 헤엄뿐만 아니라 육지에서도 높이 뛸 수 있는 다리를 가진 것과 같다.

이런 엄청난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아직도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 될 계율로 알고 여전히 그 율법아래 있으려 한다는 사실이다. 아이를 다스리고 관리하는 초등교사 아래에서 벗어나 이제 상속을 받을 만한 “아들[υἱός, 아들, 사람의 아들]”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기저귀를 차고 있는 것처럼 찜찜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25) 라는 증거는 율법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거듭난 사람들을 더 이상 다스릴 수 없다는 교훈이기도 하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과거 율법의 지배아래서 완전히 해방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26) 창세기15:6의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공의로 여기시고” 언약의 대상으로 삼으신 것과 같은 원리이다. 특히 율법에서 해방되어 즉,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모든 사람들은 예외가 없이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라고 확인해 주고 있다.

이러한 확신과 감격을 바울은 교회론이라고 하는 에베소서에서 확인해 주고 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3~6)

여기서도 역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이다. 죄인이 의인으로 다시 나는 장소도,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죄인이 변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장소도 여전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는 방법을 다음 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물론 앞의 v26에서 “다 믿음으로” 라고 했던 표현이 v27서는 “누구든지”로 쓰이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27) 하였는데 사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기 전 육신으로 이 땅에 계실 때에는 가르치신 바 없으시다(우편 강도는 세례를 명령하시기 전의 사람이다). 이 땅에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시고 부활하신 후에 비로소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28:19)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16:16)

그런 후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이 땅에 약속대로 성령이 임하시고 교회가 탄생하기 전에 베드로 사도가 이를 받아서 증거한다. “…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2:38)

그런 후 복음이 땅끝으로 증거되는 사도행전 속에서 구원을 받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이 주님의 명령을 받아들임을 볼 수 있다. 그럼으로 세례는 믿음의 가장 구체적인 순종의 모습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세례 하는 물에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세례를 주는 사람에게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순종하는 하나님의 명령이나 말씀에 능력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 가르침의 그림자 적인 모형을 창세기27장에서 볼 수 있다. 이삭이 눈이 어두어진 상황에서 에서에게 사냥하여 별미를 만들어 주면 마음껏 축복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리브가가 이를 듣고 야곱에게 염소새끼 2마리를 끌어오면 아버지의 즐기는 요리를 해서 에서가 받을 복을 받도록 하겠다고 제안한다.

에서와 너무나 다른 야곱은 오히려 어머니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의 눈에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창27:12)라고 걱정하지만 리브가는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13) 명령하고 에서의 옷을 입히고 염소털로 에서처럼 꾸미고 요리한 고기를 가지고 아버지인 이삭 앞에 나아가 에서의 흉내를 낸다.

OT에서 장자의 자리는 복을 이어받는 자리로 유산을 받는 것 자체가 다른 자식들과 다르게 재산도 두 몫을 받게 되어 있다. 이 사건 속에서 이삭이 야곱에게 하는 말이 오늘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27b)는 말씀과 더불어 우리가 보고자 하는 내용이다.

비록 이삭 부부는 서로 자식을 편애하는 잘못을 범했고 리브가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에서보다 하나님을 믿고 의식하며 살고 자신을 잘 돕는 야곱이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소원해서 심지어는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라는 각오로 이 일을 감행한다.

사실 여기 야곱이 거짓행동을 했다가 받을 수도 있는 저주를 자신이 받겠다는 리브가의 모습은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저주를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비교될 수 있지만 오늘의 요점은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22)라는 말씀이다.

당시 야곱은 정말 두려움으로 형의 옷을 입고 염소 털로 꾸미고 아버지께 나간 것에 비교하면 우리는 너무나 감사해야 할 이유가 크다. 우리가 감히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 하나님 앞에 선다고 하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는 불가능하고 자격이 없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가능한 언약이다.

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 산다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가 입은 예수 그리스도께 욕을 돌리지 않도록 믿음의 바른 처신을 할 수 있도록 성령과 말씀을 의지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에 관한한 우리의 자의적인 노력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 역사의 마지막날 예수그리스도를 바르게 입고 산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된 약속의 유업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3:4)고 칭찬을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행실을 더럽히는 것은 우리가 입은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Ⅲ. 차별 없는 자격(28~29)

바로 앞의 “누구든지 …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27b)”고 누구든지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범위를 가르치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 살고자 하는 데는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28)하여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은 당시 인종으로서 차이를 크게 이 대별하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 “유대인” 즉, 종교인들이고 “헬라인”이란 참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우상숭배와 비신앙인들을 표현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류전체를 의미하는 한다.

“종이나 자유인”이란 “종”으로 사람들의 수하에 부림을 받는 사람들로 “자유인”은 종과는 다르게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히려 종을 부리는 사람들로 신분의 구분을 말하는 것이고, 성별의 차이는 “남자나 여자”로 우리가 어렵지 않게 구별하는 양성(兩性) 모두를 포함하는 의미로 각각 표현하여 이 믿음의 법에는 지구상에 어떤 사람도 이 은혜에서 제외될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28b) 유대인들의 전유물이었던 율법이 아닌 오직 믿음을 통해서 완벽한 하나가 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차별 없는 통일성을 이룰 수 있다는 표현으로 역시 자신들을 구별시키는 율법주의자들의 옳지 못함을 책망하는 의미도 담고 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29) 이 말씀은 앞에서 하나님의 복의 언약을 받아 누렸던 아브라함의 약속(16)으로 되돌아 가는데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3b) 했던 약속의 결론이 바로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이다.

사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것이 된 사람’이라고 여러 번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던 하나님의 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로소 성취되고 완성됨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내(우리)가 이 같은 은혜에 참여하고 있다면 아브라함의 약속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다.

모든 인류는 믿음이 오기까지는 유대인들의 율법이든 도덕이든 윤리이든 우상이든 모든 것들에 모든 사람이 매이고 갇혀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의 언약을 따라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믿음의 법인 복음에 인계되고 더 이상 종 노릇 하지 않을 자유로운 삶을 얻게 되었다.

이 귀한 생명의 법은 모든 차별을 치우고 신분의 벽을 넘어서 바벨탑에서 흩어졌던 인류를 하나로 묶어 주셨다. 역시 이 하나에도 제한이 없다. 생각과 삶을 열어놓고 나눌 수 있는 화해의 장인 교회를 세워주심으로 완성하셨다. 죄의 사람들이었던 우리에게 다만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만으로 모두에게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입혀 주셨다.

우리에게 차별하지 않고 의의 옷으로 입혀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럽히지 않고 그 영광에 합당하도록 믿음을 키우고 장성하여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없이 설 수 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