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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갈 3:19~22 2021-09-26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앞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유업은 약속에 의한 것이지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율법은 오히려 저주를 가져왔을 뿐이라는 내용을 나눈 바 있다. 이러한 논리 속에서 율법주의자들이 가질 수 있는 질문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율법을 주셨느냐?’는 의문으로 대항해 올 것을 미리 예상한 바울은 율법을 주신 이유와 목적을 증거하고 있다.

이 갈라디아 교회뿐만 아니라 오늘 날에도 율법의 바른 이해와 처리는 너무나 중요한 이유는 이 율법을 잘 못 적용하는 신앙생활은 삶의 질을 저하시키기 때문이다. 아직도 복음과 율법 사이의 애매한 적용은 진리의 자유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종교의 계율에 매이게 되기 때문이다.

우선은 시대적인 구분과 성경 전체의 바른 이해가 첫째이고 이런 이해의 바탕에서 신앙의 삶이 이루지기 때문에 믿음의 삶의 질을 형성한다고까지 말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모든 저주의 삶에서 우리를 해방하였음에도 여전히 지나간 과거 저주의 법을 두려워하고 염려한다면 완전한 자유 하는 삶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은 무엇보다도 이 율법을 주신 바른 이해와 함께 지나간 모든 헛된 것을 털어버리고 하나님의 완전한 약속인 복음과 함께 새 삶의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서 라도 이런 부분의 혼란이 없는 소신 있는 생명을 찾아 누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오늘은 특별히 율법을 주신 이유와 목적에 집중하고 말미에는 정리나 결론을 내지 않으려 한다.



Ⅰ. 율법을 주신 이유와 한계(19~20)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 이유 없이 주시는 것은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없다고 봐야한다. 무엇이든 반드시 주신 이유를 헤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함으로 소신 있는 믿음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또 하나님께는 시대적인 구분이나 시간이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계명이나 말씀을 받아서 구원의 역사를 구분하고 이해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구원의 계획에 따른 바른 이해를 가지고 구속사를 이해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복을 언약하시고 최종적으로 죄에 있는 인류를 구원하실 계획을 믿음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시지만 어떤 것들은 영구적인 언약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들은 전체 구원의 맥락을 위한 한시적인 계율들이 있기도 한데 그것이 바로 율법 같은 것이다.

이런 구속사를 무시하고 주어진 계율에만 집중하다 보면 한낱 구리조각에 불과한 구리 뱀을 섬김의 대상으로 알고 숭배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도 있었음을 선택된 백성들의 역사에서 보는 아이러니가 되기도 한다. “그가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왕하18:4)

오늘 우리의 신앙을 해석하는 것도 율법적인 기준과 약속의 복음으로 서의 기준은 분명한 차이를 가진다. 주님의 날 예배를 드림에도 아직도 율법적인 기준에서 ‘주일을 지킨다’라는 표현이 더 흔하다. 그러나 주님의 날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복음을 중심하여 이해하면 엄청난 차이를 볼 수 있다.

한 주간을 말씀과 성령으로 지켜 주신 감격과 함께 다시 영원한 영광의 유업을 위하여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감격으로 나누며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로 능력을 충만이 덧입고 죄악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 도전과 용기를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받는 감격의 이벤트가 주님의 날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이런 입장에서 드리는 예배는 당연히 세상 속에서 승리를 감사하게 되고 그 이김의 원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기 때문에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예배일 수 없다. 주님의 날 설교라고 하는 메시지조차도 주님의 희생을 기념하는 거룩한 예식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예배의 중심은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구체적인 사실을 사도행전20:7~11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반드시 주님의 희생의 기념은 그날 강론의 내용으로 확인되어져야만 한다. 매주 드리는 예배의 바른 이해도 이렇게 큰 차이를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율법은 ①범죄로 더하여 진 것이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으로 더하여진 것이라” 기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즉,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로 생명의 유업을 상속하는데 있어서 기존에 포함되었던 부분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사람들의 범죄를 모르신 것은 아니지만 율법은 기존에 하나님께서 창조와 구속의 역사에 과정이 아니라는 말인데 하나님께서 범죄를 원하실 리는 없기 때문에 어쩌면 범죄하게 한 어둠의 세력으로 인하여 더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이다.

성경에 이런 내용이 많지만 한 예를 들면 열왕기하25:22~26과 예레미야40:7~43:7에 기록된 내용으로 유다 왕국이 대부분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간 후에 바벨론왕이 그곳에 남을 사람들을 위해 세운 그다랴라는 사람을 유대의 극우익이었던 이스마엘이 죽이고 8사람과 함께 암몬으로 도망한다. 이 일로 바벨론을 두려워하게 된 요하난이 군대의 지휘관들과 남은 백성을 이끌고 애굽으로 가려 한다.

이미 애굽으로 내려 가려고 결정은 하였지만 예레미야에게 “…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렘42:5~6)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가나안 땅에 남는다면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에게서도 구원해 주시겠다고 애굽으로 내려간다면 오히려 잘 못 되리라(10~22)는 응답하시지만; 이들은 애굽으로 가려하던 자신들의 계획과 다른 응답이 나오자 처음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

“…요하난과 모든 오만한 자가 예레미야에게 말하기를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는 애굽에 살려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너를 보내어 말하게 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는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너를 부추겨서 우리를 대적하여 갈대아 사람의 손에 넘겨 죽이며 바벨론으로 붙잡아가게 하려 함이라”(렘43:2~3)고 거절한다.

오히려 한 술 더 떠서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그 때에는 우리가 먹을 것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니,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궁핍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렘44:17~18)고 자신들의 우상 숭배를 정당화한다. 사실 사람들의 죄성(罪性)이 이렇다.

오늘 우리도 이미 모든 것을 결정해 두고 하나님께 결재를 받으려는 사람들의 태도가 이럴 수 있는데 대단히 조심해야할 자세이다. 하나님께 기도로 물으려면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여쭤야 하는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요하난의 일행과 같은 것은 역시 죄에 더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범법함으로 더하여진 것이라”한 말씀을 공동번역에서는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고 덧붙여 주신 것입니다.”라고 번역하고 있는 내용이 좀 더 이해가 쉽다. 로마서4:15b에서는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는 선언처럼 율법이 오기 전에 죄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죄를 죄로 인식할 수 없었는데 율법이 그 죄를 죄로 알게 하려고 율법이 주어졌다는 논리다.

오늘 현 사회 속에서도 분명히 사회에 해가 되는 범죄임에도 그것을 처벌한 법이 없어서 처벌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는데 율법이전을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이를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9)라고 탄식하는 내용속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자신들의 결정과 같을 때는 순종하는 것처럼 하지만 말씀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고 힘겨우면 거절해 버리는 것이 알량한 믿음이고 순종임을 쉽게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불순종이나 범죄조차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이런 사악한 죄악을 깨닫게 하시려고 율법을 더하신 것이라 말씀하고 있다.

시간적으로 한계가 있음을 다음 내용에서 보겠지만 이 율법을 주신 통로를 말씀하고 계시다. ②중보자의 손을 통해서 베푸신 것이다.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라고 말씀하고 있다. 영원한 언약인 복음을 주신 중보자와는 다른 율법의 중보자는 천사를 통해 모세에게 전달하게 하셨다. 온 인류를 완전한 구원으로 계획하신 복음과의 완전한 차이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율법의 유효기간을 한정하고 있는 것이 세번째이다. ③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만이다.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이 말씀에 빼놓을 수 없는 말씀이 누가를 통한 확인이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16:16) 했는데 침례자 요한은 율법시대의 마지막 선지자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보다 약 6개월 늦게 탄생하셨고 물론 요한과 함께 율법아래 나게 하신 것은 뒤에가서 보게 되겠지만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갈4:4b~5f)라는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약속으로 오신 자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까지만 율법은 효력을 가졌고 약속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 죄의 비극으로 신음하며 괴로워하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는 무한한 능력 즉,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힐 때까지 효력을 발휘했다. 아니, 율법이 모든 사람의 죄를 친히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율법은 십자가에서 함께 못박혀 정죄의 효력이 끝났다.

같은 중보자라고 하는 명칭이 사용되고는 있지만 이제까지의 말씀과는 어울리지 않는 어쩌면 이 갈라디아서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바로 다음 v20이다.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20)

사실 이 “중보자[μεσίτης, 중개인, 화해자, 조정자, 중재자]”는 구태여 원어를 거론하지 앓더라도 결혼의 성사를 위해 양 집안을 연결시키는 중매쟁이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그렇게 어려운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단어배열이 이해를 어렵게 한다.

그런 이유에서 같은 말이 쓰여진 한 곳을 참고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한 것인데 이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요 사람이시기 때문에 서로를 화해하시는 중보자로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20f) 라는 말씀은 너무나 당연하고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데 거기에 붙여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20b)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덧붙이고 있는 내용이 이 구절의 이해를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 말씀이 율법과 약속을 다루고 있는 내용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런 범주에서 이해를 해야 할 것이고 앞에서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19)이라고 하였지만 “약속” 즉, “언약”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자의적인 사랑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이 땅에 내려오신 것 자체가 주권적이고 조건이 아닌 은혜임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율법을 지키면 산다’는 조건이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인 믿음은 믿고 순종하면 누릴 수 있는 조건이나 협상이기 보다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물일 수밖에 없는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죄로 알 수 있도록 천사(행7:53)와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역할로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2:14)라는 바울의 선언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운명하심으로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마27:51; 막15:38)는 사건이 보여주듯이 의문(義文)이라고 하는 율법의 역할은 끝났다.

정죄하는 율법의 역할이 끝났다면 당연히 율법과 관련된 OT의 종교계율들도 끝난 것이기 때문에 이 복음의 시대에 OT 절기 중심의 종교계율도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7:6)는 바울의 확신을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Ⅱ. 그렇다고 율법이 약속에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율법이 죄를 알게 하려고 주어졌다면 약속과 반대되는 것인가?”라는 의구심(疑懼心)에 답변을 주고 있다. 둘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하는 것이 같고, 비록 약속은 영구한 것이지만 율법은 구속의 역사가 완성되기까지 라는 한시적인 법이긴 하지만 이 둘은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하여 죄인들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하여 그리스도께로 가게 하여 구원을 받게 하는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21f)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신 즉, 전능하신 분으로서 사람과는 다르게 절대로 모순되는 일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모든 상황과 시간과 대상을 알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계획에 있어서 절대로 실수하실 수 없는 분으로 사람처럼 후회할 일을 절대로 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이미 율법에서부터 이를 선언하였고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23:19) 하여 하나님을 믿음직하다고 표현한다. 바울도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11:29) 증거한다.

이러한 믿음직하신 하나님을 성경 도처에 증거하고 있지만 대표적인 두 곳을 보면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1:9) “우리는 미쁨이 없을 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2:13)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다.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21b) 사람들이 보기에는 구체적인 법을 주신 것이 율법이기 때문에 율법이 죄를 비롯한 모든 사람의 문제들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미 율법에 익숙한 사람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고; 어쩌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같다. 이런 이유에서 갈라디아 교회에서도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단순한 이해일 뿐이지 사실 저들이 생각치 못했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더하신 율법을 전체로 생각했던 것은 완전한 구원의 경륜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오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21b)는 표현은 사람의 입장에서의 이해를 위한 표현이다. 중간에 더해진 율법이 완전한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믿음의 약속을 주시지 않고 율법으로 이루셨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Ⅲ. 믿는 자들에게 약속을 주기 위한 것이다.

앞에서 계속 말하고 있는 사람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표현을 모든 사람을 정죄하는 율법을 말한 후에 증거하는 것이 마지막 내용이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22f) 율법의 기능은 모든 죄를 들어내는 정죄하기 위해서 주어진 법이라는 데서 이런 표현이 가능하지만 여기 “성경”은 물론 “율법”을 대신하는 말씀이고 쉽지 않은 이해는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라는 데서 “모든 것”이 어떤 것들을 의미하는가이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 즉, 사람의 범죄는 모든 피조물에 변화를 가져왔다.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땅이 네게 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3:18f)하신 하나님의 선언을 볼 때도 태초의 창조에는 자연에 사람을 괴롭히는 가시와 같은 존재는 없었던 것이라고 확신해도 그르지 않을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을 비유하던 로마서 8장에서도 자연의 탄식을 거론하는 것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8:22) 그러므로 율법은 범죄한 인류로 인한 모든 부조화를 정죄한다는 본연의 임무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하반절은 완전한 반전을 선언하고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22b) 약속의 유효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지만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는 은혜의 선언이다.

여기서도 지나칠 수 없는 한가지는 “율법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다는 모든 것에 비극을 가져와 버린 율법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역시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는 데도 역시 “모든”을 넣어 “약속을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라고 해야 더 확실한 의미를 살릴 수 있다.

그리스도 이전에 율법으로는 은총을 입지 못하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긍휼을 입은 사람들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2:10)는 엄청난 반전을 고백하고 있다.

율법은 모든 것을 정죄로 죄의 감옥에 가두어 버렸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의 약속을 입을 수 있게 하였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