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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갈 3:11~14 2021-09-12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성경에는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있다. 히브리서기자는 이를 가리켜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히12:1f)라고 표현하고 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한 결과 이런 놀라운 역사를 경험했다.”고 하나님을 믿고 순종한 결과들을 믿음의 후예들인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지난 주에는 믿음으로 살고 행한 아브라함의 예를 들었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하박국과 같은 믿음으로 살자고 격려하는 바울의 권면을 듣는다. 믿음으로 살았던 아브라함의 인생도 결코 평탄치 않았던 것처럼 하박국의 믿음으로 대처하는 상황 역시 인간적으로는 거의 절망의 상황이었음에도 믿음으로 살 것을 다잡는 고백을 볼 수 있고 바울과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역시 거론하는 것은 본다.

하박국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고백은 아브라함 하고는 또 다른 상황이라는 데서 바울은 모든 상황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유다의 말기 여호야김 왕의 포악한 정치와 그런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부르짖음에도 기도는 응답되지 않는 안타까운 상황에서도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기 때문에 믿음의 위대성은 아브라함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하박국의 상황을 보면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합1:2)라는 탄식과 함께 유약할 대로 약해진 예루살렘과 유다에 갈데아 군대가 쳐내려 온다는 그야말로 기대나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서 보는 믿음은 인생을 건 모험과 같은 믿음이었다면 하박국은 해결 받을 수 없는 절망에서도 성도는 믿음으로 그 상황을 받아 드리고 직면하는 자세를 우리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양면이 다 갖춰진 믿음이라야 비로소 구원받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은 율법의 행위와 믿음의 대조보다는 믿음의 실제성과 위대성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1~12)

이미 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결론을 두고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께서 복음을 주셔서 그 복음을 믿으므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과 함께 어느 때 어느 상황에서 어느 사람도 지킬 수 없는 율법은 믿음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임을 증거한다.

이런 입장에서 당연히 믿음은 강조될 수밖에 없는데 오늘은 이 믿음에 강조점을 두고 하박국의 상황과 같은 시간과 상황 속에서 믿음으로 살 각오와 도전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이미 앞에서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2:16b) 라는 율법으로 인정받을 사람은 있을 수가 없다는 내용을 확인한바 있다.

오늘 첫 부분도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11f) 이 사실을 더욱 분명히 확인하고 있다. 여기에 주안점은 “하나님 앞에서”이다. 설령 상대적인 사람들 속에서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율법을 통해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확인이다.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11b) 이 말씀은 갈대아 사람들이 쳐 내려와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초토화시킬 비극적인 소식을 접한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어떻게 악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가 묻고 마치 파수대에 선 보초병처럼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심정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격려를 그대로 표현한 내용이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2:3) 이 약속이 믿음으로 살 수 있는 근거이다. 마치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에게 주시는 약속과 같다.

이 약속에 거역하는 세상과 그럼에도 믿음으로 그 약속을 기다리는 모습의 묘사가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는 말씀을 바울이 인용하는 오늘 본문의 내용이다.

이 말씀이 인용되고 있는 나머지 두 곳의 내용들을 반드시 참고할 필요가 있다. 먼저는 로마서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말씀과 히브리서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는 말씀이다.

여기 먼저 볼 수 있는 것은 두 곳의 말씀 앞에는 하박국 선지자가 쓰지 않은 “오직”이라는 한계적인 표현이다. 당연히 “이것 만이”라는 한정인데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표현이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라는 상황과 함께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수 있는 한가지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많은 믿음의 사람과 그와는 반대로 율법과 같이 자신의 행위로 인생을 성공해보려는 사람들 중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두 사람 이스라엘의 왕을 지냈던 다윗과 사울을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일단 보이는 외형적인 조건에서는 사울이 유리하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유력한 집안의 사람으로 어깨위를 더하는 체격에다가 누구보다도 준수한 모양세를 갖춘 사람이었다(삼상9:1~2).

그러나 반면에 다윗은 유다 집안의 당시로서는 별로 이름이 있는 집안이 아니었던 이새라는 사람의 막내아들로 형들에게 조차도 별로 인정받지 못했던 아버지의 양을 지키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두사람의 삶의 자세나 목표는 완전히 달랐음을 볼 수 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왕의 직책이었음에도 자신의 집안이 대대로 왕위를 이어가고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철저하게 계획적이고 심지어는 자신의 위치에 위협이 될 만한 정적(政敵)으로 여겨지는 다윗조차도 적극적으로 제거하려고 애쓰는 흔적들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그와는 정 반대의 성향인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 약속에 자신의 인생을 건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의 사악한 계획이나 행동조차도 하나님께 맡긴다. 그런 이유에서 다윗은 믿음의 사람이 분명하다.

심지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번이나 주어졌음에도 부하들의 부추김에도 불구하고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18) 말씀하신 하나님께 원수 갚는 것조차 맡긴다.

실제로 두번째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삼상26:10~11f)라는 믿음으로 자신은 그의 생명에 손을 대지 않겠다는 믿음이었다.

우리가 역사 속에 보는 결론은 그렇게 철저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행동했던 사울은 망하고 자신을 죽이려는 원수의 보복조차도 하나님께 믿음으로 맡겨드렸던 다윗이 최종적인 승리자였다.

이것은 그냥 역사 속의 이야기로 끝낼 사건이 아니다. 오늘 우리 자신들의 신앙이라는 것도 사실 이 두 사람의 범주에 든다고 볼 수 있다. 다윗의 믿음은 몰라도 ‘설마 사울처럼 믿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에 있어서는 나 자신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명령이나 언약보다는 사울과 같은 자기 중심으로 자신의 꾀와 노력으로 믿음생활 하려고 하는 사람은 사울과 다르지 않은 사람이다.

사울도 명목상으로는 늘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심지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면서까지 자신이 하는 행동은 하나님을 위한 것으로 포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삼상15:15)

오늘날 신앙에 있어 상당 수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믿는 하나님의 권위를 내세워 사람들을 상하게 하는 일들은 사울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상황적으로는 불리한 입장에 있으면서도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고백을 보면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16:2) 고백한다.

찬양을 주 임무로 살았던 아삽도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시73:25) 오늘 우리는 이 천지사이에서 아니 땅에서 하나님보다 의지하는 것이 사실 너무 많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12) 우리는 앞에서 이미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율법보다는 믿음이 먼저였다는 사실을 말한 바 있다. 우리가 짐짓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잊게 된다면 ‘사람의 반응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법을 마련하시는 것 아닌가!’ 라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맨 먼저 주어졌던 믿음에서 율법이 나온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12f)라는 사실 속에서도 확인하는 것이다. 조금 뒤에서 v19f에서 다시 보겠지만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으로 더하여진 것이라…” 한 것처럼 기존에는 없었던 것인데 덧붙여진 것이란 의미를 볼 수 있다. “더하여진[προστίθημι, 더 놓다, 옆자리에 놓다, 부가하다, 반복하다, 덧붙이다, 증가하다, 더 나아가다, 더 이야기하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12b) 이것은 마치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11b)는 말씀과 대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율법을 행하려는 자는 옳고 그름의 법에서 옳게 살아보려고 스스로 부단히 노력하는 자로 절대로 은혜의 복음에 들어올 수 없고 여전히 율법아래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공로 없이 주어진다는 복음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스스로 힘쓰고 애써도 안되는데 그것이 스스로의 노력없이 가능하겠는가!’ 의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의 유혹에 더 쉬운 사람의 한계를 인정한다면 어떤 스스로의 노력으로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음을 인정할 수 있다면 하찮은 스스로의 발버둥치는 노력보다는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방법에 기꺼이 자신을 맡길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앞에서 인용했던 로마서1:17은 믿음으로 행할 때 믿음의 삶이 지속될 수 있다는 교훈과 함께 신앙에 전진하는 믿음의 진보를 보이는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히브리서10:38로 증거하고 있음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론 아직 복음이 주어지지 않은 OT에서 율법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지켰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증거하고 계시시만 너무나 소수의 사람으로 나타난다(겔14:14, 16, 18, 20 노아, 다니엘, 욥). 이들 조차도 주어진 율법을 지키려는 것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신뢰하고 믿음으로 순종했던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이제 완전한 믿음의 법이 주어진 오늘에는 더욱 믿음으로 살 것을 당부하시는 것이다.



Ⅱ. 율법의 저주는 속량되었다.

오늘 두번째의 내용은 믿음으로 살아야만 할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다. 수많은 율법의 항목들은 십자가에 못박히고 이제 인류를 모두 공통적으로 십자가 아래로 부르신 은혜의 법, 하나님의 사랑이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13f)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당하신 수치는 하나님께 있어서 도저히 견디기 힘드셨던 고통이요 수치이셨다. 그렇지만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역사는 적절한 표현이 될 른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영계의 천지개벽(天地開闢)을 일으켰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롬5:16) 다시 v18에서는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하였다.

죄 아래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의 값은 이 세상의 가치로는 불가능함을 고라의 자손들은 증거하였다.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시49:8) 돈이나 값을 주고 죽음을 물릴 수 있는가! 갚을 수 있는 것을 갚아 주는 것은 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히 갚을 수 없는 죄의 값을 갚아 주셨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저주로 완성하신 구원을 영계의 천지개벽이라고 하는 것은 영계의 법칙을 완전히 되돌려 놓은 엄청난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이왕에 율법의 저주 아래 당연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모든 죄인들을 그 죽음에서 값을 치르고 건져 내셨기 때문이다.

역사의 중심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의 죽음의 이후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사람들 까지도 당연한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셨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9:14) 완전한 속죄를 증거한다.

그에 따른 결과를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9:15)고 하므로 OT의 성도들조차도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구원받게 되고, 혹 복음을 듣지 못하고 구원을 받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죄를 알지 못하고 죽는 어린아이가 구원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 되기 때문에 영계의 천지개벽이라는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런 구체적인 표현이 구속으로 세워진 교회 이후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라고 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다른 방법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율법에서 선언된 나무에 달려 죽는 저주를 충족시키셨음도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13b)는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은 오늘 나를 그리고 우리를 인류의 영적 역사를 다시 쓰게 하신 놀라운 변화가 됨을 이해한다면 그 귀한 희생으로 인한 구원의 선물을 거절하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있다고 믿는 나(우리) 자신도 전혀 자랑할 것이 없이 오직 은혜를 누리는 것뿐임을 감격하며 더욱 믿음으로 살아야 함이 당연할 것이다.



Ⅲ. 예수 안에서 성령을 받게 하셨다.

이 엄청난 은혜를 누리는 자리도 세상의 어떤 곳도 아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요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가능케하는 능력으로 성령을 약속 받은 것을 마지막으로 보게 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14f) 죄의 사람이 누구든지 저주의 비극이 아닌 아브라함의 복을 이어받게 하신 자리는 예외 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제한된 조건이 주어지고 있다.

사람들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복을 누리는 자리, 하나님과 화해의 자리, 각자가 흩어진 것을 하나되게 하는 자리도 역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뿐이다. 물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것은 그의 몸 된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거듭난 우리 각자의 심령 속에 선물로 와 계시는 성령의 약속에서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라는 말을 옥중서신 뿐만 아니라 특히 요한복음 속에 여러 번 언급하고 있는데 오늘의 내용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15:4f) 하셨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6:56)라는 말씀으로도 확인하신다.

우리가 매주님의 날 주님의 희생을 기념하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도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을 확인한다는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저주와 상관없고 복을 누리는 구체적인 이유이기도 하지만 역시 여기에 더하여 주시는 엄청난 은혜는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14b)는 약속이다.

왜, 예전에는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살 수 있었음에도 그것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했는가 하면 우리의 영이 죽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육신으로만 사는 우리의 지성(知性)·감정(感情)·의지(意志)라는 인격을 다 동원한다고 할지라도 율법을 지킬 수 없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불가능했던 일이 가능케 된 것은 과거 육신의 사람으로는 율법을 지킬 수 없었는데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속에 와 계심으로 그 불가능했던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바로 성령이 오시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4)

일반적인 신앙의 사람들 속에서 성령의 임재나 역사를 너무 신비한 쪽으로만 이해하고 해석하려 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성령의 오심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인격의 변화를 가져오고 죄의 열매가 아닌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데 성령의 열매도 표면적으로는 사실 신비보다는 도덕적인 변화의 모습이기도 하다.

영이 회복되는 사람 본연의 회복도 믿음으로 가능하게 됨을 볼 때 믿음이야 말로 신앙의 전부임을 확인하게 된다.

오늘 의인으로 사는 사람은 믿음으로 라는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을 통해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와 비교를 하면서 말씀을 나누었는데 상황이나 조건 시간에 관계없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 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을 하박국은 찬양하고 있는 내용을 볼 수 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또, 이 고백이야 말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 만이 이 세상 속에서 드릴 수 있는 고백이요 찬양인 것이다. 이 세상의 삶의 가치를 모두 잃는다고 할지라도 나를 영원한 율법의 저주에서 희생으로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계시다면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이 근거는 세상의 어떤 변화에서도 빼앗길 수 없는 근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