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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갈 3:6~10 2021-09-05
모든 이방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오늘 내용은 지난 시간 말씀의 연장으로 앞에 말했던 것을 과거의 있었던 사실적인 사건을 들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다. 즉,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을 이어받아 지키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과 같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확인이다.

바울은 율법이전의 사람이었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역사를 통해서 오늘 복음 속의 믿음의 사람들을 교훈 하고자 길지 않은 이 갈라디아서에 4번씩이나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용을 하고 있다. 특히 이 믿음과 율법을 대조하는 이 3:6, 8, 16, 4:22에 연거푸 아브라함의 삶을 대조하고 있다.

율법은 복음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고 최초에 사람에게 주신 복음은 원복음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은데 에덴에서 범죄한 후 주신 말씀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그럼으로 다음에 보겠지만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17) 한 것처럼 이스라엘 가족은 칠 년간 계속된 가뭄으로 인하여 이집트로 내려가고 이집트를 탈출해 나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이 430년 후였음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물론 아브라함에게는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창15:13) 라고 대략적으로 말씀하셨고 이것이 정확하게 430년이 된 것이다.

사실 사람들에게는 쉽게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이지만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현재적인 존재들이다. 사람들은 벌써 수 천년이 흘렀다고 하지만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께는 수천년 전의 아브라함이나 오늘 여기에 있는 우리(나)나 언제나 현재적으로 보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이런 이유에서 모세는 그의 기도시에서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시90:4) 라고 고백하였고 예수께서도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눅20:38)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언약적인 복을 약속하신 대상이 바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람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복은 언급되었지만 그것은 범죄하기 이전의 에덴(창1:28)에서부터 범죄 후(창5:2, 9:1)에도 일방적으로 “복을 주시며”라는 표현이 대부분이다.

언약으로서의 복의 통로는 최종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구원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도 아담으로부터 가 아닌“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1:1)고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을 통해서만 본다면 하나님의 선민은 유대인이라고 하는 이스라엘뿐이지만 하나님은 결국 복음으로 모든 인류를 하나님의 복으로 불러들이시려는 계획을 창세전에 가지고 계셨고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전적인 은혜에 의해서임을 에베소서에서 보게 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오늘도 유대인들은 이방인인 우리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다고 하면 코웃음을 칠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적으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직접 말씀하시기를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3:9; 눅3:8) 하셨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신앙의 행위를 말한다면 작은 부족국가 속에서 자신들의 동맹 된 보호의 부족국가(창12:1f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를 떠나 전혀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낯선 가나안으로(창12:1b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삶의 터전을 옮긴 것 자체가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했기 때문이었던 이유에서 아브람의 믿음은 관념적인 믿음이 아니라 생명을 내건 행동하는 믿음이었다.

그런 아브라함이었기 때문에 어찌 보면 나약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지만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런 결단적 믿음을 보신 하나님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공의로 여기시고”(창15:6) 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야고보도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2:21)라고 이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은 머리로만 가진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그대로 믿고 그 믿은 대로 살고 움직이는 실제적인 믿음이다. 그런 이유에서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1:22)고 경계하고 있다.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질 때 역시 복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죄의 능력아래 있을 때 아무 공로 없이 구원을 선물로 받았지만 이제는 우리와 함께 임마누엘을 사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육신으로 불가능했던 능력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면서 여전히 죄의 노예로 세상의 노예로 살고 있다면 엄밀하게 하나님의 백성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6~7)

공교롭게도 본문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6)는 말씀은 창세기 15장에서도 v6이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공의로 여기시고”(창15:6) 다만 이름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큰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람에서 [열국의 아버지]라는 의미의 아브라함으로 17장에서 바뀐다.

사실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가졌을 때는 그의 믿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치 못했던 것 같다. 그런 이유에서 이미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공의로 여기시고”(창15:6)하셨음에도 다시 아브람의 믿음의 흔들림에 대하여 책망하신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

사실 아브라함도 완전한 믿음의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약속의 땅에 와서도 가뭄을 하나님 앞에서 해결 받기보다는 스스로 식솔들을 이끌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하며 생명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허약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당시의 갈데아 우르의 다신교(多神敎)의 땅에서 이끌어 내시고 복을 약속하시는 것은 당시의 어떤 사람들보다도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임에 분명하고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여기 우리들과 다르지 않다.

이런 분위기를 헤아리지 않고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6)는 인용은 바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독특한 것은 믿음을 강조하는 로마서에도(롬4:3) 그 믿음이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하는 야고보서도(약2:23) 꼭 같이 이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언제나 극단에 치우치는 것보다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 조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 만이 진정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긍하면서 그들의 육신의 조상 아브라함을 자랑하지만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혈통의 자손들 만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아브라함의 할례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브라함은 할례의 언약이 있기 전인 아브람 때에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믿음을 인정받음으로써 같은 믿음을 가지는 무할례자들인 이방인들의 조상도 된다고 확인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보충의 내용이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7)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에 아브람이 가졌던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믿음의 응답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지 아브람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여전히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다르지 않다(엡2:5b, 8~9).



Ⅱ.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받는 믿음의 사람들(8~9)

두번째의 내용은 v5~6의 반복이면서 확인이다. 창세기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역사는 사실에 있어서 후대에 있어질 것에 대한 예시(豫示)라는 것이다. 분명히 율법 이전의 언약은 복음이었다. 그것은 정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을 주시려는 최소한의 약속이었다.

OT은 많은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될 은혜의 역사를 미리 보여주신 것들이다. 그런 입장에서 실체가 아닌 그림자라고 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8f)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 허리(히7:5, 10)에서 이스라엘을 낳게 하시고 다시 그 계보를 통하여 메시아를 주실 것에 대한 창세전에부터 계획하셨던 하나님은 그 일을 은밀히 진행하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선택된 백성들과 이방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계시로 보여주셨다.

이런 이유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유대인들은 이 사실조차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 말씀하신 것이다.

이방인들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인하여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누리게 하시려고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8f) 하신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행17:26)하신 것처럼 최종적으로는 차별없이 하나님의 복을 은혜로 주시고자 먼저는 아브라함을 또는 이스라엘을 먼저 부르셨던 것이다.

이 사실을 모르고 좁은 소견에서 하나님께서 자신들 만을 택하시고 사랑하셨다고 예수님 앞에서조차 큰소리 치던 유대인들은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먼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우리 또한 같은 경계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8f)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안 주체가 독특하게도 사람이나 천사나 선지자 같은 말씀의 도구가 아니라 “성경이 미리 알고” 라고 성경을 의인화하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물론 NT에서 말씀을 “로고스[λόγος]”로 표현하고 이 로고스는 예수 그리스도이시지만 “성경[γραφή]”이라고 쓰고 있고 성경을 같이 의인화한 표현은 v22f에도 나타난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미리 알고” 또는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한 성경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격을 같이 하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하게 한다.

“…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8b) 이 복음을 전하는 주체도 역시 성경이다. 이것은 적어도 장래에 모든 인류가 구원의 복을 누리게 될 것인데 그것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즉, 그의 후손을 통하여 하는 약속이고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빈정대는 유대인들에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고 증거하신 바 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9)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선언하신 복은 보통의 복이 아니라 우리가 읽기로도 엄청난 본이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2~3)

사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갖고 계신다. 욥기에서 직접 선언하시기를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욥41:11)하신 것처럼 언제나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이미 다 준비되어 있다.

어찌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미리 복을 선포하시고 아브람이 이 선포된 복을 누릴 수 있는지 감당할 수 있는지를 보시고 그리고 선언하시는 순서를 아브람을 부르시고 축복하시고 그런 후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공의로 여기시고”(창15:6) 라는 추이에서 볼 수 있다.

오늘 우리에게도 다르지 않다. 이미 영생을 위한 복을 위한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두시고 아브람에게처럼 그것을 우리 각자가 그것을 누릴 만한 믿음이 있는가를 기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9)는 내용이 바로 그런 것이다.

언제나 상급을 먼저 준비하시는 하나님 이심을 말씀을 통해서 성경과 역사 속에서 수없이 우리에게 보이시고 알게 하시기 때문에 그럼에도 그것을 거절하는 것은 바보짓이고 어리석은 것이다. 또 미리 보고서도 그것을 잃는 것이야 말로 굴러들어온 복을 차버리는 악한 것이다.

이러한 미리보기가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9)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것은 오히려 아브라함의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그의 후손들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분명히 확인이 되고 있다.



Ⅲ. 왜, 율법아래 있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가? (10)

오늘 이 마지막 v10은 어쩌면 다음 시간에 연결되어지는 내용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누리는 것과는 다르게 복의 반대인 저주를 율법과 함께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중 율법의 역할 즉, 기능을 이야기하겠지만 율법은 기능 자체가 정죄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최종적으로는 죄를 깨닫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복의 개념보다는 저주를 거론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율법을 들이대면 무사할 사람은 이 세상에는 없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19~20) 결국 율법아래 있다는 것은 심판아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율법이 오기 전에는 죄를 알지 못했는데 율법을 통해서 죄를 알게 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고백하였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9)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10f) 율법은 행위의 법으로 행위 없이 받은 은혜의 법인 복음과는 역시 상반되는 법이기도 하다. 사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한 사랑의 절정이라면 율법은 눈곱만큼도 용서가 있을 수 없는 냉정한 법이다.

늘 하는 얘기이지만 사랑의 관계에서는 법이라는 것이 전혀 필요치 않다. 법은 사랑이 바닥나버린 의무의 관계를 정리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역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 범죄한 천사들의 부추김으로 거역하고 대적하는 인류를 회복하기 위해서 죄를 깨닫게 하고 스스로는 죄의 비극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 율법은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율법은 사람의 한계를 극명하게 깨닫게 하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10) 이 말씀을 건성으로 읽을 때는 ‘율법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정도이다.

그럼에도 이 말씀을 수식하고 있는 부사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누구든지, 모든 일,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먼저 율법아래 있는 사람은 예외가 없이 “누구든지” 지켜야 한다. 그럼에도 율법은 “누구든지”를 고사하고 “누구도” 지킬 수 없다.

두번째는 “모든 일” 즉, 모든 삶의 상황에서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종교적인 행위는 물론이고 일상의 어떤 일에서든지 지켜져야만 하고 “항상” 지켜야 하는 것은 시간적인 개념에서 24시간은 물론 매 순간과 일생을 포괄하는 내용이다.

인용된 OT의 본문을 보면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27:26) 하였는데 이를 인용하고 있는 야고보의 기록을 보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2:10) 요즘의 적절한 표현을 빌리면 “도미노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히 한 개 만을 건들었을 뿐인데 모든 것이 그 하나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무너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저주일 수밖에 없다. 누구나 예외 없이 어떤 일에나 사건에서 그리고 언제든지 한가지를 범하면 모든 것을 범하는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율법아래 있는 사람 즉, 율법의 적용을 받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아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받은 은혜의 엄청난 가치를 이해하게 되는데 그 십자가의 저주가 나(우리)를 이 율법의 엄청난 저주에서 빼내어 자유케 했다는 확신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목숨을 걸고 부르심에 응답했음을 바로 알 필요가 있다. 오늘 우리(내)가 아브라함을 복받은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한다면 오늘 나 자신이 또한 아브라함 같은 믿음의 결단을 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창세 후의 율법이 주어지기까지의 하나님의 법은 사랑이지 명문화된 법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율법은 주어지고 결국 사람은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예언하신 메시아를 의지하도록 율법을 주셨을 뿐이다.

율법은 율법아래 있는 누구를 막론하고 어떤 조건이나 형편에서나 항상 지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한 사람은 율법의 정죄를 면할 수 없다. 결국 십자가에서 이 두려운 율법의 저주를 먼저 대신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비로소 율법의 저주에서 자유를 얻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을 이어받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