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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갈 3:1~5 2021-08-29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앞에서 바울 사도 자신의 복음의 일꾼으로의 역할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으로 복음과 더불어 자신의 사도권의 변호였고 또 조금은 방어적인 모습을 취해 온 것이 사실이지만 이제 본론에 돌입하는 바울의 말투는 대항하는 말투로 상당히 강하게 들린다.

이제 이 3~4장은 이 갈라디아서를 쓰는 그 중심이 되는 내용으로 이 말씀 자체가 로마서와 함께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가장 분명하게 구분해주는 것은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를 통해서 역사 속에 같은 문제에 어려움이 없도록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게 한다.

이 서신의 중심이라고 하는 이 부분의 내용을 먼저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3:1~14 복음과 율법을 대조하고, 3:15~4:7 왜 온전치 못한 율법을 주셨는가? 즉, 율법을 주신 이유와 역할을 말한 다음에 4장 나머지 부분 v8~ 마지막 v31까지는 다시 율법으로 되돌아가려는 저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이보다 좀 더 세분해서 상고하게 될 것이다.

첫번째로 바울은 복음과 율법을 바르게 구분하지 못하는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어리석음을 강하게 책망하고 있다. 이 편지를 받아 읽는 사람들이 조금은 놀랄 만한 표현까지 사용하면서 저들의 소신 없는 신앙의 모호함을 책망하는 내용이 복음과 율법의 서론이다.

진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분명한 복음의 진리를 십자가의 도를 분명히 듣고 경험하였음에도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에 확신을 갖지 못하여 애매모호한 자세를 취하는 갈라디아 교회의 옳지 못한 자세를 통렬히 비난하는 것이다.

오늘도 이것은 마찬가지이다. 어정쩡하게 복음과 세상 사이에 갈등하고 분별하지 못하는 신앙인들은 책망받아 마땅하고 또 진리를 바르게 맛보지 못하고 신앙생활 하다가 다시 세상으로 되돌아간 사람들은 교회를 비난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쩌면 더 간교하기까지 하다.

이런 이유에서도 교회와 믿음의 사람들은 복음의 진리를 바로 분별하고 이론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그 진리에 맡기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세상의 변화나 닥치는 어려움 속에서도 혼란하지 않는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유교나 불교와 함께 신비를 추구하는 샤머니즘이 강한 이 대한민국 속에서 복음은 기존의 종교들과 섞이고 타협되면서 구원의 능력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구원의 능력을 잃은 이름뿐인 빈 껍데기로 남아서 무시당할 수도 있고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욕을 돌릴 수도 있다.

이 첫 부분에서부터 확신을 갖지 못한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율법에서는 불가능하고 있을 수 없는 성령의 능력을 주로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순종함으로 받을 수 있는 성령과 함께하는 능력의 삶을 잃어버리고 결국 복음 받기 이전의 육신의 삶으로 되돌아감을 경계하고 있다.

하여 어리석게 율법주의자들의 꾀임에 유혹되어 십자가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우왕좌왕하는 갈라디아 사람들을 책망하고 성령의 능력을 맛보고 하나님의 은혜의 삶을 맛보았지만 처음에 큰 고난을 감수하면서 받은 이 생명의 복음을 결국에는 헛되게 만들겠는가 라는 답변을 기대하지 않는 질문 투의 책망을 하고 있다.



Ⅰ. 진리와 속임을 구분하라(1)!

대중(大衆) 즉, 다수의 사람들을 공식적으로 또, 법적으로 속여도 죄가 되지 않는; 아니 오리려 법적으로도 보호되는 거짓행위가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마술이다. 그러므로 마술은 공인된 눈속임이다. 분명히 눈속임이라는 것을 이미 인정하면서도 사람들은 그 속는 것을 즐거워하고 또 기꺼이 그것을 위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도 억울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술보다도 사람들을 더 크게 현혹시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거짓종교이다. 그것은 사람의 생명까지 잃게 하는 무서운 마력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의 모든 것을 가지고 빠져들게 해서 생명까지도 바치는 거짓종교들의 영향력을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는 더러 보게 된다. [인민사원의 자살파티, 오대양사건 등등]

바울이 참된 생명의 진리를 전해주어 모든 거짓된 것들을 버리고 복음으로 감격하고 이 생명의 복음을 위하여 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복음에 순종했던 갈라디아의 교우들이었음에도 바울이 그곳을 떠나자 건전치 못한 율법주의자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거짓종으로 매도할 뿐만 아니라 그가 증거한 복음이 온전치 못한 것이라고 치부하게 되었다.

이를 전해들은 바울은 지난 시간까지는 그 복음을 전했던 자신은 그 생명의 복음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았고 모든 복음의 일꾼들도 이것을 인정했다는 자기 변호를 하고 이제는 적극적으로 그들의 전한 율법과 복음의 혼합이 옳지 않은 것임을 지적한다.

바울은 처음 자신에게 복음을 듣고 감격으로 그 복음을 순종했던 갈라디아의 교우들을 마음속에 떠올리면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와 함께 누렸던 그 감격을 무시하고 너무나 쉽게 흔들리고 있는 갈라디아 교우들을 향하여 듣기 거북할 정도의 표현으로 저들을 책망하고 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1f) 이렇게 포문(砲門)을 열고 있는데, 사실 이 표현은 듣기에 그렇게 유쾌한 표현은 아니다. 쓰여진 낱말을 보면 “어리석다[ἀνόητος] 이해할 수 없는, 세상적인, 미련한”이라는 의미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v3에서도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라고 책망하고 있다.

이것을 마술공연을 관람하면서 심취해 있는 사람들에게 쓸 수 있는 표현은 아니다. 만약에 마술공연을 즐기고 있는 관람자들에게 ‘이 어리석은 관람자들아!’ 이런 표현을 쓴다면 오히려 현행범으로 체포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저것은 사실이 아니라 눈속임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못된 믿음은 그런 입장에서는 마술과 완전히 다르고 마술과 비교될 수 없는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 마술은 한번 보고 즐기는 것으로 끝나고 ‘어떻게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눈속임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끝나지만 종교는 때로 거기에 인생을 걸고 생명을 다 바치기 때문에 거짓된 종교적 교훈은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즐기고 있는 마술쇼를 관람보다 더 심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마술을 보는 것과 거짓종교의 차이는 무엇일까? 마술은 자연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신기해하고 또 다른 예상치 못했던 변화를 기대하는 사람의 생각에서 끝날 수 있다.

그러나 거짓종교는 사람의 근본을 악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심각하다.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3:11m)라는 솔로몬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피조물인 사람의 근본적인 부분을 악용하는 것이 거짓 종교이기 때문이다.

아직 복음 이전의 율법에는 ‘3~4대, 수천 대, 또는 대대로’ 라는 긴 기간을 다루고는 있지만 적어도 영혼과 영원에 대한 언급은 아직은 구체적으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은 대대를 걸치는 육신의 계보보다 더 중요한 영원한 가치를 가진 귀중한 존재이고 죄로 말미암아 이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이 영원의 바른 생명의 가치를 찾아 주는 것이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갈라디아 사람들이 비로소 이 가치인 주님의 희생을 깨닫고 감격하게 되었던 것을 바울은 회상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1m) 여기 중요한 것은 “밝히 보이거늘 [προγράφη = πρό ~전에, ~앞에, ~먼저 + γράφω 새기다, 쓰다, 기록하다]”이라는 낱말이다.

마술사의 performance 즉, 마술을 실행하는 것은 순간에 지나고 남지 않는다. 또 누군가가 말한 것도 지나버리지만 여기 사용된 προγράφη는 ‘앞에 쓰여 있지 않느냐!’는 표현으로 십자가에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허상(虛像)이나 거짓으로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기록된 글자를 보는 것처럼 역사적인 사실로 분명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죄를 탄식하고 회개한 사람들의 경험은 나의 그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처참한 모습과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10:12, 14)고 증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은 완료된 제사이면서 영원히 현재적이며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매주님의 날마다 예배를 통하여 주님의 희생을 기념하면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희생의 십자가에 직면(對)하는 것이다.

이런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또 계속 경험하고 있으면서 “…누가 너희를 꾀더냐[βασκαίνω, (본래) 중상하다에서 매혹되다, 홀리다의 과거형인 ἐβάσκανεν]”(1b)이 쓰였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신앙적으로 홀리는 것은 육신에서 끝나지 않고 영원한 고통이 될 수도 있다.

육신을 가진 우리는 누구나 사실 유혹에는 약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진리의 성령의 지시에 따라서 거룩한 말씀에 깨어 의를 행함으로 어두움의 유혹이 틈타지 못하게 해야만 한다.



Ⅱ. 성령과 능력을 체험한 출처는(2, 5)?

과거의 율법아래서의 하나님을 섬김과 복음으로 완성된 은혜의 시대의 가장 큰 간격(차이)은 아무래도 성령의 임재일 것이다. 과거 이스라엘 속에서도 성령의 역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단히 제한적이었음을 볼 수 있다. 어떤 일을 위해 쓰실 사람에게 성령은 오셨고 그 직임이나 사역이 끝났을 때는 성령도 거둬 가셨던 경우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구속을 완성하신 후에는 모든 거듭난 사람들 속에 성령의 선물을 분명히 약속하고 계신다. 자신의 의지가 강하게 살아있지 않는 한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을 다스리시고 이끄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절대로 막연하거나 힘겹지 않다. 심지어 우리가 기도하지 못할 때에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대신 간구하신다고 증거하고 있다(롬8:26).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2) 복잡하게 이것 저것 말하지 않아도 이 한가지 만으로도 너희들의 옳지 않음을 알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상대를 설득하는 것은 복잡하게 이것 저것 논리를 펼치는 것보다 상대가 경험한 사실을 통해서 이해시키는 것이 더 쉬울 수 있다. 이 v2과 v5은 같은 표현의 반복이기 때문에 함께 다루는 것이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2),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5)”들은 성령의 선물을 받은 자와 주시는 하나님 입장에서 표현하고 있다. 물론 v5에서는 그 결과까지도 함께 다루고 있다. 즉, ‘성령을 받으므로 그 성령께서 그들 속에서 능력을 행하시는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문제는 출처나 과정보다는 목적과 결과만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출처나 과정은 무시하거나 생략해 버리는 경향에 익숙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에 있어서는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 출처는 물론 과정을 거쳐 결과에 까지다. 좋은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만든 원인이 사람으로부터 인지 하나님으로 즉, 성령으로부터 인지의 구별을 바로 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2:20f) 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의 삶의 명령권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는 고백이다.

성령께서 마음에 좋은 감동을 주셔서 어떤 바람직한 일을 하도록 명령하신다. 그럼에도 나 자신의 육신적으로는 일단 그것을 거절하고 싶어 한다. ‘그것을 왜, 제가 해야 하나요, 나는 그것을 할 만한 형편이 안되지 않나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것을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힘에 부칠지라도 그것을 하고 나면 그 일을 한 것보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더 큰 감격과 보상을 주신다. 그러나 반대로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반드시 ‘아, 그 때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라는 후회를 하게 된다.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의 간격은 그 차이가 결코 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이것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행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이런 경험이 쌓여가면서 나의 자아(自我)는 점점 작아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우리 삶 속에 더 넓은 영역을 다스려 가시고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면서 나 자신도 점점 영적으로 성장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가 탄생하면서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분명한 약속을 주셨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2:28) 이 약속은 OT시대처럼 어떤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신 약속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순종하여 거듭나는 누구에게나 유효한 약속이다. 그리고 성령의 오심은 이제껏 ‘내가 이래야만 했는데, 저랬어야만 했는데!’라는 허약함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더 쉬워진다.

그리고 이렇게 되는 것을 나 자신의 노력이기 보다는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3),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5)”라고 반복적으로 묻고 있다. 이래서 율법이든지 도덕적이든지 자신의 의지로 행하려는 것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약속으로 오신 성령을 순종함으로 가능하게 되는 큰 차이가 있다는 데서 그 출처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각자의 삶의 원동력이 어디로부터 인가 하는 바른 이해는 우리 영원을 결정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아직도 여전히 도덕이나 윤리적인 것처럼 자신이 선을 행해보려고 발버둥치는 것과 나는 죽었고 내 속에 와 계신 성령과 더불어 의를 행하는 능력의 삶을 바로 분별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전자는 여전히 힘겨운 신앙이 되겠지만 후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하신 것과 같다.



Ⅲ. 진리를 위한 고난을 헛되게 하지 말라(3~4)

우리 많은 사람들은 흔히 어떤 일의 흐름을 보면서 ‘시작은 참 좋았는데!’ 라며 안타까워하는 경우들이 더러 있다. 또 흔히 쓰는 사자성어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말이 있다. 신앙의 모습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로 바울은 안타까워하는 부분이 마지막 세번째의 말씀이다.

앞에서 이 3장을 시작하면서도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1f) 하였지만 여기서 역시 듣기에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이 말을 반복하고 있는데 왜, 어리석다고 하는 지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앞에서는 출처와 과정을 중요하게 다뤄 왔다면 여기서는 그 결과를 염려하는 책망이다.

야구경기는 9회말이 되기 전에는 예측할 수 없다고 하지만 신앙은 그 삶의 모습에 따라서 다음과 마지막까지도 어느정도 예측이 가능하고 어떤 문제를 발견했다면 그것을 바로잡음으로 비극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는 것도 대단히 감사해야 할 이유가 된다.

그러나 불쌍한 것은 문제를 발견했음에도 그것을 개선하지 못한다면 결과는 안타깝지만 비극으로 갈 수밖에 없다. 신앙은 우리 삶의 영적인 것이 분명하지만 건전하지 못한 유혹에 빠지게 되면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 육적인 것이 무엇인지조차 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경우가 되기도 한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 더 쉽게 표현하면 광대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으로 시작하였다가 초라하고 부끄러운 인간 본성으로 끝내는 것이므로 이보다 바보짓은 있을 수 없다는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것은 언제나 완벽하고 복되게 이루시는 것은 당연하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1:6) 그러나 이 완벽하신 하나님의 역사에 언제나 인간적 요소가 개입되는 것이 문제가 되고 갈라디아 교회는 하나님의 놀라운 성령의 능력으로 시작하였음에도 율법주의가 다시 끼어들면서 문제를 만들었다.

이런 일은 당시의 갈라디아 교회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령한 역사를 일으킨다고 자랑하고 은사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로 몰아부치면서 시작하는 건전치 못한 종교들은 결국에 가서는 물질은 다 쓸데없는 것이라면서 그 무익한 물질은 모두 바치게 한 후에 영도 육신도 다 의지가지 없게 만드는 불건전한 교회들은 오늘날에도 더러 나타나고 있다.

최소한 신앙의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는 책망은 바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로부터는 물론이고 사람들에게도 들어서는 안될 안타까움이다. 신앙이 처음에는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감동하고 그 주님을 순종함으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럼에도 시간이 가면서 순수함에서 점점 멀어지고 타성에 젖고 이것 저것을 계산하며 종교생활로 만족하게 되는 안타까운 수순이 된다면 비극이다. 이런 이유에서 처음 믿음은 세상의 첫사랑보다 중요하고 그런 하나님의 생명의 진리에 단순히 순종하는 처음 믿음에서 점점 영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마치 요한계시록2:4~5f에서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책망하시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언제나 계산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단순히 순종하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어리석은 것 같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지혜로운 사람의 선택이요 행위인 것이다.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4) 대부분의 신앙의 사람들은 믿음생활을 하게 되면서 여러가지의 것들을 포기하게 된다. 그것은 사실 영원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하고 또 그래야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그들의 이런 사실을 격려함을 들을 수 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살전1:6)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살전2:14)

또 이것이 결코 가치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는 것이라고까지 위로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살후1:5)

그러나 마지막이 다시 죄악으로 헛된 것이 된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위한 희생이나 고난과 환란이 모두 가치를 잃게 된다는 경계가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4)라는 책망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신적으로도 ‘지금 좀 힘겹고 어려울지라도 미래가 나아진다면 그래도 견딜 만하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까지 믿음을 지키고 어렵지만 하나님을 순종한다면 일평생의 모든 환란이나 괴로움은 완전히 보상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의 끈을 놓아버린다면 믿음 생활하면서 당한 불이익이나 모든 고난은 가치를 잃을 수밖에 없다. 바울과 함께 갈라디아 교우들이 유대인들로부터 당했던 과거의 고난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변함없이 십자가에 고난당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자신들을 율법아래로 끌어들이려는 유혹하는 이겨야만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