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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갈 2:17~21 2021-08-22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안디옥에서 베드로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책망함으로써 자신의 사도권이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직접 부르셨던 사도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논리를 여러 방향에서 펼쳤던 바울은 이제 본격적으로 복음과 율법을 비교하기전에 먼저 자신의 삶으로 경험한 복음을 요약한다.

물론 지난 주에 v16에 그 서론적인 부분을 이미 나누었다면 오늘 이 마지막 부분에서는 실제적인 삶 속에 누리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 중심이다. 즉 자신이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그 핵심이다.

어쩌면 오늘 v20은 복음의 절정(絶頂)이며 중심을 이루고 있는 가장 정확한 거듭난 삶의 실제적 모범이다. 그러므로 복음에 산다고 하는 사람은 이러한 고백을 하고 있는 바울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어야 한다.

은사는 각각 다를 수 있지만 이러한 거듭난 삶의 원리는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역시 바울의 삶의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Ⅰ. 복음이 율법을 범하는가? (17~18)

우리가 어렵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율법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고 범하면 반드시 거기에는 형벌이 따른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을 육체가 없고 오직 복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다는 바울의 가르침이 와전(訛傳)되면서 그러면 ‘복음이 율법을 범하게 하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 바울은 이런 가르침을 주고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는 율법의 부정(否定)과 함께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16)는 복음에 대한 확신이 오해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예수께서도 직접 말씀하시기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5:17) 하심으로서 율법의 폐기가 아니라 완성을 위해 오신 것이라 선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죄인 된 인간들이지만 폐기해야만 할 것을 사람들에게 주실 분이 아니다.

이 갈라디아서에 뒤로 가면서 율법의 역할 즉, 하나님께서 율법을 사람들에게 주신 이유를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지만 죄인이 율법을 통해서는 의로워질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적인 이론이 마치 복음이 율법을 범하게 하는 것처럼 오해될 소지가 없지 않다.

같은 이론을 가르치고 있는 로마서에서 이를 보충해주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3:31) 오히려 육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율법은 지킬 수 없는 것이었지만; 거듭난 영으로 행하는 사람들 속에서 율법의 요구가 채워질 수 있다는 말씀을 덧붙인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4)

이런 로마서의 가르침들과 함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17)는 말씀은 어렵지 않게 이해 될 수 있는 말씀이다.

오늘의 주제와는 관련되지 않는 것이라서 깊이 다룰 필요는 없지만 여기에 지나칠 수 없는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ἐν Χριστῷ]”라는 바울 사도의 중요한 생명의 이치와 새 삶의 자리를 감사할 필요가 있다. 이런 표현은 주로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가운데 쓴 옥중서신들에 더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바울은 옥중서신 뿐만 아니라 로마서에서도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는 확신을 주고 있다.

율법밖에 있던 이방인 출신의 신앙인들이 의롭게 되려면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한다면 율법은 버려지는 것이 되고 그렇다면 율법을 버리게 하는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않느냐는 이론인데 바울은 아주 단호하게 도저히 그럴 수 없다고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앞에서 v11~13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경우를 견주어 생각하게 되는데 베드로 역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율법의 금지 조항인 이방인들과 함께 먹다가 율법주의자들이 나타나자 이방이들과 함께 먹지 않은 척했는데 이것을 본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의 보기에는 베드로 역시 죄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자연스럽지 못한 행동을 했을 것으로 본 것이다.

결국 베드로가 이런 소신 없는 행동을 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에 대한 분명한 확신으로 대하지 못한 행동이고 율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지 못한 데서 율법주의자들이 보기에는 죄인으로 보였고 할례자들이 볼 때는 그렇게 만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였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는 죄짓게 하는 자가 되고 만 것이다.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18) 과거에 옳지 못하다고 믿고 하지 않았던 것들을 다시 찾아 행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죄를 짓는 것이 되고 이것을 베드로는 참된 속담이라고 솔로몬의 잠언을 인용하면서 책망하고 있다.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2:21~22; 잠26:11)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과거의 죄에 돌아 간다면 율법이 아닐지라도 사람들에게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져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죄짓게 하는 잘못된 평가를 받을 수 있음도 반드시 생각해야만 한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의 확신이요 중심은 다음 두번째 주제에 있다.



Ⅱ.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심(19~20)

바울은 율법의 정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 자유를 누리며 새로운 삶의 환희를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누리고 있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갈라디아서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모든 생명과 능력의 신비를 소개하고 있는 바울이 기록한 서신들의 핵심이며 기준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2천년이 훌쩍 넘어 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같은 언약을 누리고 사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도 역시 새생명의 실제적인 삶의 기준이기도 하다.

이 두 절 속에는 먼저 과거 죄의 사람이 죽었던 원리가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19f)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20) 라고 두 번 고백 되어 지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새로운 생명이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19)는 기대와 함께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고 그 죽었던 사람속에 어떤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증거하고 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19) 사실 죄의 사람으로 산다면 죽음은 끝이다. 그러나 여기의 죽음은 육신으로 죽는 마지막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소개하고 있다.

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은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 보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롬6:4)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골2:12f)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 복음에 순종하는 시작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순종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믿음의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를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고백하고 있다.

결국 이 v19의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는 말은 강조하기 위하여 말의 순서를 바꾸어 반대로 말하고 있는 것(倒置法)이다. 더 쉽게 이해를 하면 “나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기 위해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여기 특징은 죽은 것은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이고 죽었다고 하는 것은 관계가 끝났다고 하는 것으로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율법과의 관계는 끝났다는 말이다.

왜, 죽었느냐 하면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해서 죽었다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살려고 한다면 바울의 고린도전서15:31 고백처럼 지속적으로 매일 죽어야만 산다.

v20은 좀더 구체적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을 지속적으로 묵상하면서도 사실에 있어서는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문제가 계속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생각이나 관념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인데 이 교훈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

먼저는 여기에 과거의 것은 부정되면서 새것으로 인정되고 있는 각각 세가지의 변화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내)가 아닌 그리스도; (율법) 대신에 믿음; (옛사람)이 아닌 새사람이 그것이다.

또 이 말씀은 세부분으로 나눠 생각할 필요가 있다. ①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 말씀은 바로 앞 절의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라는 죽음의 구체적인 방법이다.

우리 스스로만 죽으면 (생명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지만) 골백번 죽는다고 해도 거기에 생명이나 약속은 있을 수 없다. 그런 이유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죽음이어야만 한다. 이것은 사람이 만든 방법이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마련하신 생명을 위한 죽음이었다.

②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죽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다. 죽긴 죽었는데 약속을 따라 생명안에 감춰지는 죽음이기 때문에 자신이 죽은 그 육체에 자신은 더 이상 없지만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라고 고백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③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는 좀더 결과적인 고백이다. 죽었다고 고백하였지만 그럼에도 끝나버린 죽음이 아니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이라고 하여 어떤 신비한 삶을 말하기 보다도 여전히 죄의 도구인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을 말하고 있다.

죽었음에도 여전히 살아 있음을 말하는데 그 살아있는 나는 더 이상 과거 죄의 사람인 자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하나된 새로운 생명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5)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2:12b)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먼저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나를 극진히 사랑하신 사랑 때문에 사는 삶이다(요3:16). 이것은 역시 과거 죄로 인하여 육신의 생각으로 살던 하나님과 원수 된(롬8:7) 미움의 삶과는 정 반대된 삶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앞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여기서는 다시 하나님의 뜻과 방법으로 그 하나님의 의를 누릴 수 있는 “믿음 안에서[ἐν πίστιϛ]” 산다고 고백한다.

바울은 복음과 율법을 대조하는 바로 뒤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3:27)고 확인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죽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때나 마귀 사탄은 물론이고 사람들이 나를 볼 때도 나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숨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신비한 생명의 원리를 과거 선지자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닌 어리석은 남편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말한 것은 분명 육신의 판단이 아니라 신령한 성령으로 통하여 한 고백이었음에 틀림없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삼상25:29)

그리스도인에게 자신이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감춰진 생명의 원리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이러한 거듭남이 분명하다면 사람들은 물론 하나님께서도 나의 육체속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다.

당연히 나 자신 속에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 나의 원하고 즐기던 것들 보다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성령의 지배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사람들에게도 유익을 끼치는 생명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런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는 권면이 부담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또 이런 사람이라면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본분을 다했다는 잘못된 생각 보다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b)는 삶도 기쁘게 감당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여전히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못하고 과거의 사람으로 남아 육신의 법에 끌려 다니는 우리 각자의 초라한 모습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는 죽어 마땅한 과거의 사람에 대해 우리는 너무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다.

이 약속은 바울 같은 사람만이 고백하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분명한 언약이다.



Ⅲ. 하나님의 은혜를 폐할 수 없다(21).

이 말씀은 이 2장 뒷부분의 결론이 되는 말씀이다. 율법이 사람의 노력이나 행위에 속한다면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죄의 대속물로 주시고 모든 이방인들까지도 여기에 참여시키신 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선물 즉, 은혜이다.

그럼에도 갈라디아를 포함한 교회들에서 율법을 주장하고 가르치는 율법 주의자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율법은 물론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폐한다고 바울을 공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을 지킴으로 말미암는다면 그것은 공로이지 은혜일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21f) 바울을 비롯해서 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하다는 사람도 결코 하나님의 계획을 폐하거나 그분의 뜻이나 역사를 거역할 수는 없다. 아니 바울은 하나님을 거역하려 다가 오히려 어려움을 당하고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1b)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21f)와 대치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이다.

여기 “만일”이라는 가정이 쓰이고 있지만 당연한 이치이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으로 더하여진 것이라…”(3:19f) 즉, 기본에 들어있었던 것이기 보다는 더하여 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만으로는 불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고 완전한 것의 필요를 요구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럼에도 율법의 가치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이 율법의 요구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할 수 없었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안타까움으로 이 사실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죄인된 사람이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의 기준에 이를 수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는 고통을 감당하지 않으셔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과정이셨던 것이다. 뒤에 율법의 역할이 나타나겠지만 율법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죄를 몰랐을 것이고 궁극적으로 죄인으로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의식하면서 비로소 구세주의 필요를 알게 되었다.

율법은 죄인됨을 알게 하고 그 죄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인데 이 구속을 부정하는 것이야 말로 최종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을 불리하거나 손해나게 하실 분이 아니시다. 우리에게 주시는 어떤 것도 결코 모순되거나 어려움을 주시는 분이 아니심을 확신해도 손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믿음은 나는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육체를 통해서 사셔야만 한다. 이것은 결코 사변적이거나 이론적인 것이 아닌 사실적으로 삶 속에 나타나야만 한다. 그래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고 경계를 주고 있다. 비록 육신 속에 살지만 성령으로 우리 속에 사시며 나를 명령하시고 호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서 사실적으로 사셔야만 한다.

어떤 경우도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나의 적극적이지 못한 믿음으로 다른 지체가 열심을 잃게 해서도 안된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죽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삶에 사시는 것을 의식한다면 언제 어디서나 어떤 조건에서나 내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을 인정하고 의식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늘 함께 있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 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이며 보이지 않는 주님이라고 해도 적어도 그분을 업신여기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