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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갈 2:11~16 2021-08-15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울 자신을 통해 증거된 복음이 사람으로부터 받거나 배우거나 난 것이 아니라는 증거를 어쩌면 지나치리만큼 계속하고 있는 것은 자신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거듭난 삶이 결코 헛되거나 기존의 사도들을 통해서 들은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증거하고 있다.

1장 뒷부분에서는 기존의 사도들을 만나지도 못했다고 말했다면 지난 v1~10에서는 사도들이나 예루살렘교회의 중요 인사들이 모두 자신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증거했고 오늘의 내용은 도의적인 입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사도들의 최고 수장이라고 하는 베드로가 소신 없는 자세 때문에 자신이 책망을 하였다는 내용으로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결론을 선언한다.

오늘 날에도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과거 율법과 복음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영생(永生)과 이 땅에서의 기복(祈福) 사이에서 혼란하는 것은 사실 안디옥에서 바울에게 책망받고 있는 베드로와 같이 신앙적 기준을 분명히 갖지못한 지도자들의 책임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믿음의 사람들은 사회적인 규범보다 항상 하나님의 명령이신 말씀이 우선이 되야 하는데, 사실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고 오히려 신앙의 일들조차 사회적인 규범을 먼저 들이대는 경우들이 더 흔한 것이 사실이다.

만약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먹다가 예루살렘에서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나타나자 마치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지 않은 척한 것에 대해 베드로의 얼굴을 보면서 책망했던 오늘의 바울과 베드로의 경우를 두고 말하라고 한다면 오히려 ‘세상에서도 그럴 수는 없다.’ 라고 비판할 만한 경우이지만 이런 경우는 규범과 도덕도 없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적 자세를 바로 가질 것에 대한 책망이다.

베드로의 이런 모습이야 말로 머리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적인 삶과 행동에 있어서는 그 믿음이 아무 역할도 못하는 초라한 모습의 단면인데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삶의 자세를 바울은 다음 v20에서 고백처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 왜, 올바른 신앙적이지 못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를 죽이지 못한 자존심이 먼저가 되기 때문이다. 요즘 흔한 일이지만 어느 집에 주인을 만나러 갔더니 그 집 강아지가 먼저 조르르 나타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항상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각자의 모든 삶에 나 자신의 자아가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시는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반응하는 그런 삶의 모습이 바로 바울과 같은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고 우리 역시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다르지 않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에게 흠 잡히지 않고 소신 있는 신앙을 하기 위해서 오늘의 제목이 필요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뒤에 가서 구체적으로 나누도록 하겠지만 다른 길은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삶과 언어생활을 또 달리 표현하기를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3:10)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배워서 얻는 지식이라고 하기 보다는 모든 알고 행하는 것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

지금까지 자신이 배우고 익힌 학문을 최고로 알고 탐구했던 바울의 변화는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8) 라는 고백이다.

이것이 바로 지식에까지 새로워진 바울의 가장 구체적인 모습이다. 바울같이 많은 학문과 인격을 다져온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 있었다면 오늘 나(우리)야 얼마나 더 그래야 할까를 늘 생각하고 의로운 도전을 할 수 있어야할 것이다.



Ⅰ. 베드로를 책망하는 바울(11~12)

이것은 마태복음16:18의 베드로를 예수 그리스도의 후계자로 임명하고 적어도 그에게는 잘못이나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보인다. 베드로는 잘못이 전혀 있을 수 없는 사람으로 그의 말은 신앙적 법률이고 그의 가르침은 성경과 다르지 않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바울에게 책망을 받았다는 것은 용납하기 쉽지 않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약간 언급한 것이지만 사회적인 지위를 볼 때는 바울의 이러한 행동은 쉽게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시간들과 가르침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에게 최초로 복음을 선포한 베드로였다(행2:14~36).

반면에 그 완성된 복음을 배척하고 반대하다가 객관적으로는 쉽게 인정할 수 없는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명령을 따라 아라비아로 가고 예루살렘에 올라간 바울의 시간적이나 연륜으로 베드로가 잘못했다고 해서 그를 대놓고 책망하는 것은 이해가 쉽지 않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인 바울이 전혀 있지도 않았던 거짓을 말할 수 없었을 것이고 주변의 사람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봐서 충분히 객관성이 있는 사실로 인정된다. 또 신앙에 있어서 칭찬은 쉽지만 책망은 쉽지 않은 것도 경험하는 사실이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11) 계속해서 베드로를 게바라고 표현하는 것도 좀 독특하다. 여기 언급되는 안디옥은 이방 선교의 중심지 역할을 한 이방인 교회의 예루살렘이라고까지 표현하는 수리아 아디옥을 말하는 것이지만 베드로가 어떤 일로 이곳에 왔었는지는 성경의 기록에서는 확인하는 것이 쉽지 않다.

“…책망받을 일이 있기로…” 이 표현은 사실 아랫사람을 다룰 때 가르침대로나 지시대로 하지 않는 것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그럼에도 베드로가 바울에게 가 아닌 바울이 베드로에게는 모든 조건이나 상황에서 조금은 자연스럽지 못한 표현이다.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요즘 표현을 그대로 하면 ‘대놓고 야단을 쳤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유는 바로 다음절부터 거론이 되고 있지만 일대일의 대면(對面)이라기 보다는 그 곳에 다른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다는 사실을 v14을 볼 수 있다.

바울은 베드로를 개인적으로만 책망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수사도라는 베드로를 책망하는 모습은 어쩌면 무안하기까지 했을 것 같다. 그러나 베드로의 그러한 행동이 많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줬다는 데서 바울은 단호했던 것이다.

이제 그렇게 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12) 가끔씩 성경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더러 보게 되는데 말의 어려움이기 보다는 상황적인 이해에서 그렇다.

이미 사도행전15장에 이방인에 대한 차별을 예루살렘 교회가 모여 의결하여 서신들을 이방교회들에 보내기까지 하였다(행15:23~29, 16:4, 21:25). 그런 후였다면 베드로가 이렇게 혼란해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 이방인인 백부장 고넬료의 부름을 받기 전에 부정한 짐승이나 곤충을 잡아먹으라고 하시는 지붕에서의 환상을 보며 자신의 성결을 강조하다가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10:15) 하신 계시와 함께 고넬료의 하인들이 찾을 때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행10:19~20)는 음성을 들었다.

나중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 갔을 때 오히려 이 일을 항의하는 할례자들의 비난에도 자신의 경험을 보고하고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행11:17)고 이방인들을 변호한 베드로가 이럴 수 있을까 의문이다.

야고보가 왜, 안디옥에 간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냈는지 또,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하는 표현의 시제를 볼 때 한번만 그들과 먹은 것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먹은 것으로 보이는데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라는 것도 어떤 단호한 행동보다는 점차적으로 나타난 행동이라는 데서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시험은 누구에게나 또 생각치 않게 올 수 있기 때문에 베드로의 미약한 부분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단속해야만 할 것이다. 또 소신 없는 신앙인의 행동은 같은 신앙의 사람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데서 진리에 단호해야만 함을 배운다.



Ⅱ. 책망의 이유(13~14)

베드로의 이러한 행동은 주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나타난다.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13) 여기 “남은 유대인들”이란 안디옥에 나머지 유대인 출신의 신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 사람의 신앙의 지도자의 행동은 실로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συνυποκρίνομαι, 함께 위선적으로 행동하다]” 한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본래 신앙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함께 함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가 아니라 외식을 함께 한다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물론이고 불신자들까지 혀를 차게 만들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적어도 하나님을 의식하여 자신의 재산을 팔아 바치고(행4:37)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의 회심을 의심할 때도 중재를 시켰을 뿐만 아니라(행9:27) 바울과 함께 소신 있게 전도여행을 했던 귀한 바나바 까지도 이 베드로의 외식에 감염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14f) 베드로가 그렇게 한 가장 큰 원인은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앞의 V5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고 지난 시간에도 이를 부연한 바 있는데, 형태는 다르지만 여기 v14에 역시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라는 부정적인 형태를 또 다시 보게 된다.

그럼으로 우리의 삶의 빛으로 삼아야 할 진리가 성경의 어느 부분이냐 하는 것은 각자의 삶의 형태를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인 것을 다시 이해하게 된다. OT의 족장들의 교훈도 아니고 10계명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완성된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한다.

이 사안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내용이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라고 했는데 “따라[πρός, ~을 향해, ~의 쪽에, ~의 곁에]” 라는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이고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이란 곧게, 똑바로 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진리를 생각에만 가지고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할 때 이런 책망받을 행동이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다는 바른 신앙의 자세를 증거해 주고 있다. 첫째는 바른 진리를 찾는 것이 중요하고 찾았다면 그것을 온 마음과 삶으로 바르게 따라 행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OT에서나 NT에서나 늘 강조하는 표현이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10:12, 11:13, 13:3) 표현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직접 이를 말씀하신 바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22:37; 막12:30, 33 )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14)

이 말씀은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면 “네가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살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나지 않은 사람들에게 너도 지킬 수 없는 그 율법을 지키며 살라고 강요를 하는가?” 라는 내용이다. 사실 앞에서도 이미 거론한 바 있지만 이 부분에서 베드로는 욥바의 가죽세공업자인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에 거하면서 정오기도를 하다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로서는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짐승들을 잡아먹으라고 명령하신 것에 자신의 성결을 주장하며 거절했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 대”(행10:14) 그러나 거기에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은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15)는 말씀을 세 번씩이나 연거푸 들으면서 고민했던 부분이다.

이 환상의 내용인 즉 자신의 성결을 내세우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율법으로는 부정한 것들을 거절하는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부정하게 여기지 말라시는 주님의 일깨우심 덕택에 고민은 했지만 이방인인 고넬료의 초청에 응할 수 있었고 거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베드로였음을 볼 때 안디옥에서 그의 처신은 과거의 율법과 복음의 간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설픈 모습이었기 때문에 바울로부터 다른 사람들 앞에서 책망을 받게 된 것이다. 어찌 보면 바울의 모습이 다소 당돌하게 보이지만 신앙 속에 이중적인 외식은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경계를 주기 위해서 이렇게 단호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오늘도 이런 복음의 진리에 흠 가게 하는 행동에는 역시 단호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자신이 먼저 복음의 진리대로 행하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질책하는 바울과 같은 자세가 되지 못하면 그야말로 서로에게 전체에게 유익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Ⅲ.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를 믿음(15~16)

당시에도 여전히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어떤 율법항목을 지키는 것으로 가능한 것이 아님을 그들의 사용하는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15f) 바울 사도 자신도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유대인임을 증거한다. 바울의 다른 서신에도 이런 표현이 쓰이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빌립보서3: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15b) 유대인들의 잘못된 생각은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이라는 것 자체를 경멸하여 죄인 취급을 하여 그들의 말투 그대로를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개종한 유대인이거나 이방인의 입장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면 호소력이 없겠지만 앞에 말한 대로 자신이 더욱 분명한 유대인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반박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16)

비록 유대인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이방인을 무조건 죄인취급 하는 유대인들이지만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특권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는 말씀이다. 이제 이 2장의 나머지 부분에서 복음을 요약하면서 자신의 거듭남과 더불어 증거하지만 그런 입장에서 이 v16은 나머지 부분의 서론과도 같은 말씀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예수님의 성전의 기도 비유에서도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2) 라고 자신의 율법준수를 하나님 앞에 자랑하던 바리세인의 기도는 거절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3:11에서도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라고 증거하고 있지만 사도행전13:39f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강론에서도 바울은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이라 하였다.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16b)는 표현은 본래 시편143:2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라는 다윗의 시에서 인용된 표현이고 같은 정신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이라고 증거를 하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시편에서는 “모든 인생”으로 쓰인 반면에 로마서에서는 “모든 육체”로 기록되고 있는데 로마서를 비롯한 NT에서는 시편에는 표현되지 않은 “율법의 행위로”가 더해진 것이다.

여기 3번씩이나 반복되는 표현이 “율법의 행위로[ἐξ ἔργων νόμου,]” 정확하게 표현하면 ‘율법의 행위로부터’이다. 또 세번 다 부정이 되고 있다.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는 표현이다.

여기에 반하여 긍정되는 내용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διὰ πίστ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ἐκ πίστεως Χριστοῦ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부터]”라는 표현들이다.

여기서도 조심해야 하는 이해는 “율법의 행위”는 어떤 실천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는 행위와 관련 없는 관념으로만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조되는 내용은 모두 삶을 표현하는 출처라는 데서 행위와 관념으로 구별해서는 안된다는 경계이다.

희랍어의 [ἐκ, ἐξ]는 둘 다 출처를 표시하는 기본전치사로 원인을 일으키는 출처나 원인을 의미하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에 있어서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는 삶의 이유를 밝히는 것에서 역시 그렇게 구분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5:6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살전1:3; 살후1:11)는 말씀과 더불어 바른 이해를 할 수 있다.

많은 신앙의 사람들에게 쓴 뿌리와 같이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히12:15) 옳지못한 신앙의 자세는 책망받아야 한다. 특히 신앙의 지도자일지라도 파급되는 부정적 역할을 생각해서 징계되어야만 한다.

성경의 교훈을 가르침에 있어서도 시대적 구분이 되지 못하는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은 바른 신앙을 부패하게 만들기 때문에 책망의 이유가 되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복음의 진리”의 기준을 분명하고 바르게 가르칠 필요가 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1~22)는 권면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최후의 기회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이 진리에 삶으로 하나님께나 어떤 사람에게도 부끄러움이 없는 소신 있는 믿음의 삶을 감당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