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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20:11~20 2021-05-30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 그리고 요한은 안식 후 첫날 아침에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두 제자는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 갔지만 마리아는 여전히 무덤에 남아서 자신의 눈에는 사라져 버린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이 없는 것으로 인하여 울고 있었다.

이러한 마리아를 본 천사들이 울고 있는 이유를 묻고 있을 때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를 찾으시고 역시 우는 이유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다. 아침내내 울고 있던 마리아였기 때문에 마리아는 정작 예수께서 오시고 물으심에도 그를 묘지 관리인으로 오해한다.

마리아는 그녀의 입장에서 전혀 불가능한 일을 하겠다고 동산관리인으로 오해한 주님께 혹시 다른 곳으로 옮겨 뒀다면 자신이 모셔가겠다고 하소연하고 이러한 주님을 향한 간절함을 알아보신 주님께서 마리아를 부르시자 그때서야 비록 눈은 울어서 흐릿하여 알아볼 수 없었지만 역시 음성만은 분명히 알아듣는다.

그제서야 돌이켜 선생님을 부르며 붙들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승천을 말씀하시면서 그것을 다른 제자들에게 알리라고 말씀하신다. 이제는 천하를 다 얻은 듯 제자들에게 가서 자신에게 명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한다.

안식 후 첫날이 다 되어 갈 때 스승을 잃고 두려워서 문들을 걸어 잠그고 있는 제자들에게 홀연히 오셔서 평강을 기원하시고 자신의 십자가에 달리셔서 못 박히셨을 때 찢기신 손발과 창에 찔리셨던 옆구리를 보여주심으로 자신이 바로 십자가에 죽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확인시키신다.

이것을 보고서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인하고 어두움이 걷히고 기쁨을 되찾는 제자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가 다루는 내용이다. 평상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못했기 때문인지 성령의 빛을 누리지 못해서인지 안타까운 제자들의 모습은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서야 근심이 걷히는 것은 대표적으로 도마와 같은 믿음으로는 한계가 있다.

창조주요 구세주의 말씀이면 상황에 관계없이 확신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자세야 말로 주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제자다운 믿음의 모습이다.



Ⅰ. 미련인가 안타까움 인가(11~12)!

사람들이 용기를 말할 때 [사내 대장부]라는 표현을 곧잘 쓴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가 보는 여자는 그보다 더 용기 있고 강하며 끈질기다. 이런 입장에서 여자들은 미련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지 않는 가도 생각하게 된다.

막달라 마리아야 말로 사나이들이란 제자들은 대부분 다 자신은 살겠다고 꽁무니를 빼고 없는 적막하고 음침한 무덤가에 천사가 말을 걸어도 주님께서 직접 찾아 오셔도 바로 보지 못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바꿔준 그야말로 생명의 은인인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상태로만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만나고 싶어 울며 기다리는 그야말로 순정파 여인이다.

처음부터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확신했다면 이렇게 처절하게 무덤가에 울고 있지는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도 사람의 한계를 벗지 못하고 자신의 운명을 뒤집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여운으로 ‘시체만이라도’ 만나기를 고대하고 예수님께 조차 주님의 시신을 부탁드리고 있으니 주님께서 이 마리아의 모습을 보시면서 어떠하셨을까 생각하게 된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안을 들여다보니”(11)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 만을 확인하고 각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마리아는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헝클어진 머리채를 그대로 둔 체 울다가 빈 무덤을 들여다보다가 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보는 것 같다.

아침 내내 울기만 했기 때문에 눈은 퉁퉁 부어 사물이 희뿌연 체로만 보이고 그럼에도 울다가 빈 무덤안을 들여다보다가 또 다시 밖에 앉아서 우는 그 모습이 측은하기도 하지만 참으로 안 된 모습인 것은 그 빈 무덤이 부활 때문에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망연자실(茫然自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마리아의 믿음은 부족하지만 사랑으로 충만한 모습을 하나님께서도 불쌍히 보셔서 천사들을 통해서 위로하신다.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12) 이것은 분명히 마리아가 본 광경이었을 것이다.

이 천사들은 모습으로 뿐만 아니라 음성으로도 마리아에게 묻는다.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13f) 천사들이 과연 몰라서 이렇게 물었을까 싶다. 어찌 보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듯이 울고 앉아있는 마리아의 중심을 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연 어떤 답변을 할지가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아니, 이미 천사들은 마리아의 답변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 순결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을 귀하게 여겨 그녀의 고백을 듣고 싶었을 것이라는 짐작도 된다.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13b) 마리아의 안타까움의 고백 속에는 역시 사람 생각의 한계를 그대로 들어내고 있다. 하나님께서 어떤 특단의 조치를 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한 체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런 마리아의 진심을 주님께서는 아셨기 때문에 직접 마리아에게 찾아오심을 연이어 보게 된다. 오늘 우리 신앙하는 사람들의 한계도 여기에 머무르기 쉽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기 보다는 늘 ‘사람이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한계를 극복해야만 영적인 깊이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지 못하고 사람의 한계에 마음과 생각이 머무르면 여전히 이 마리아처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었다고 탄식을 하고 슬퍼하고 울어 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유에서도 솔로몬을 통한 교훈이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중요하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29:25) 물론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실 수 있지만 사람은 도구일 뿐이고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는 경외감과 기대와 믿음이 관건이다.



Ⅱ. 약속의 실증(14~17)

이렇게 무덤가에 울고 있던 마리아는 개인의 영달이나 안녕, 그리고 무사안일을 바라는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으로 안스러워하는 것이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셨기 때문에 이 마리아를 먼저 찾아 주신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14) 물론 여기에 “이 말을 하고”는 당연히 천사들의 물음에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13b)의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14b) 천사를 부리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에 천사에게 안타까움을 고백하는 마리아의 말을 들으시고 직접 찾아오신 것이다. 마리아는 참으로 시신일지라도 주님을 뵙기를 원했고 그러한 간절한 마음에 주님께서 응답하시는 것이다.

OT에서부터 간절히 주님을 사모하는 심령에게는 만나 주신다는 약속을 주고 계시다.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신4:29)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29:13)

그러나 그렇게 사모하여 보고 싶어하던 주님께서 찾아오셨음에도 알지 못했다는 데는 앞에서 언급했던 대로 너무 울어서 눈이 흐렸을 수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영광을 입으신 변화된 모습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전자의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생각하고 가야하는 것은 너무 어렵고 힘겨울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울고 낙심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찾고 찾은 예수께서 찾아오셨는데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는 안타까움이다.

안타까우셨던 주님께서 먼저 입을 여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15f)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중에서는 부활후의 주님의 첫 음성이셨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음성이지만 평상시처럼 “마리아야!” 부르지 않으신 데다 흐트러져 있는 마음 때문인지 역시 그 음성마저 알아듣지 못하고 만다.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15m) 마리아의 짐작으로는 이 시간에 이 죽음의 동산에 있는 사람이면 이 묘지의 관리인 외에 누가 있을 수 있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이래서 역시 짐작이 앞서면 안된다. 분명히 천사와 응답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동산지기정도로 이해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15b) 참으로 여자의 몸으로 다부진 도전의 답변이다. 그러나 이 질문 역시 너무 인간적이다. 어떻게 묘원지기가 남의 시신을 함부로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데서 믿음에 의한 요청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라는 고백은 주님께서 들으시면서도 대단한 각오임이 분명하다. 여자의 몸으로 남자 장정의 시신을 옮길 수 있다는 생각은 살아있는 사람도 불가능하겠지만 늘어진 시신은 극한의 힘이 아니고는 더욱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이런 것을 각오할 정도로 애절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드디어 평상시 익숙했던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16f) 사실 울기를 오래한 까닭에 눈은 짓물러 바로 볼 수 없었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 결정적으로 마리아의 안타까움을 깨우게 된다. 예수님을 다른 곳에 옮겨졌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죽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마리아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감격스러운 음성이었을 것이다.

음성을 알아들은 마리아는 반사적으로 반응했던 것 같다.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16b) 감격한 나머지 평상시 불렀던 선생님이라는 표현과 함께 주님을 붙들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 반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독특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17)

어쩌면 이 내용을 너무 신비스럽게 이해할 수도 있고 또 대부분이 그런 것 같은데 꼭 그렇게 신령하게만 이해를 해야 할 내용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말씀은 우리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구속의 완료 후이기 때문에 독특하게 표현하고 계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17f)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마28:9)라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을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만이 아닌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의 여자들이 붙잡고 영광을 돌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기록을 볼 때 아직 승천하지 않으신 주님을 붙잡는 것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부정을 타거나 승천이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이 아님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너무 신비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하였다.

마치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마17:4; 막9:5; 눅9:33)라고 변화산에서 흥분해 있었던 세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고 기뻐서 붙잡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마리아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 부활을 생각지도 못하고 여전히 근심과 두려움속에 있는 다른 제자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서 그들에게도 낙심한 데서 기쁨을 회복하게 하셔야 할 것을 당부하시는 말씀이다. 또 어찌 보면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여전히 죽기 이전의 육적인 선생으로만 인식하는 마리아의 생각을 바로 잡아 주시고자 하는 이유이기도 하셨을 것이다.

하반절의 내용이나 병행구절인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17b) 하신 것과 마태복음28:10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이 사실을 모두에게 알리고 하나님께로 승천하실 것에 대한 예고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전해야 할 내용 중에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라는 말씀의 바른 이해가 중요하다. 본래 이스라엘 속에서 하나님과 백성들 간의 구조가 주종(主從)의 관계였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성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양자됨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형제관계가 완성된 이치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시면서 이미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3:35) 하셨고 히브리서 기자도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2:11) 라는 내용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복음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즉, 주님께 붙은 자들을 데리러 오실 재림으로 완성되겠지만 이미 사죄의 역사를 완성하시고 주종의 하나님 관계를 아빠, 아버지(롬8:15; 갈4:6)의 관계로 완성하신 사실을 확인하시는 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부활 자체의 엄청난 능력과 신비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변화를 완성하신 것에서 당시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엄청난 은혜의 역사였다.



Ⅲ. 슬픔은 변하여 기쁨이 되고…(18~20)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철저했다. 사실 찬송가442장이 [3밤 깊도록 동산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후렴)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 C. A. Miles] 이 내용을 배경으로 쓰여진 찬송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만이 동산에서 오래도록 주님을 붙들고 싶었겠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것을 기쁘게 즉각적으로 실천에 옮긴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18) 역시 큰 은혜를 맛본 사람이 순종에도 빠르고 철저함을 보는 것이다.

주님의 발을 붙잡고 사흘 동안의 고독과 두려움의 회포를 풀고 싶었지만 주님께서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17m) 라고 마리아를 보냈고 마리아는 자신 혼자만의 기쁨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경험과 당부를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18b) 그대로 전하고 있다.

늘 우리가 생각하고 보는 것이지만 구속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우리에게) 혼자만 은혜에 머물러 있으려 하지 말고 “가라!” 명령하시는 것은 막달라 마리아뿐만 아니라 같은 은혜를 맛본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힘입은 모든 제자들에게 이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8~20)시는 명령과 다름이 없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러한 주님의 명령을 그대로 즉각 행하였고 이제 제자들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요한 사도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 제자들은 이 전해들은 소식만으로는 안심하지 못하고 여전히 모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핍박을 두려워하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전달해 주고 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19f) 하루가 거의 끝나가고 안식 후 첫날 저녁 때가 되었지만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뵙지 못하고 소식만을 들은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하였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자신들의 마음의 문빗장을 걸어 잠그고 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러한 제자들에게 역시 먼저 주님께서 찾아오신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b) 문은 닫혀 있는데 그들의 가운데 오셔서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당부하신다.

물론 이렇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심에도 믿지 못하는 것은 저들의 마음문을 걸어 잠가 뒀기 때문일 것이다. 병행 구절인 누가복음에 보는 대로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눅24:36~37)는 내용에서 볼 수 있다.

마가복음에는 좀더 큰 불신을 기록하고 있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막16:14)

그러나 요한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축복과 함께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20)는 저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는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9)

사실 제자들은 자신들의 평생에 경험하지 못했던 사실을 보면서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을 것이기 때문에 이들의 초라한 믿음을 채우시려는 우리 주님의 배려를 감사할 수 밖에 없다.

어쨌거나 요한은 그렇게 본 결과를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20)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뒤에서 보겠지만 이곳에 함께 있지 못했던 도마는 다른 모든 제자들이 다 증언함에도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5)는 불신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때까지 가지고 있었음을 본다. 이런 입장에서 믿는다는 사실이 그렇게 쉽지 않은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우리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를 제자들에게 보내셔서 증거하라 말씀하시고 자신이 그 증거를 보증하시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셨다. 오늘 우리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증거할 때도 예수 그리스도는 같은 은혜를 주실 것이다.

우리가 “가라!” 하시는 명령에 순종만 한다면 순종하는 자와 오늘도 여전히 함께 하시는 주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