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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9:35~42 2021-05-16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어떤 책보다도 분량이 많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사람 사랑이 모두 다 기록된 것은 아니다. 역시 이 요한복음만 보더라도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21:25)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OT의 모든 예언의 화살표는 모두 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맞춰져 있고 그런 이유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성경이 자신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고 이 요한복음에서조차 증거하셨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5:39)

사도 요한은 하나님 독생자의 사람이 되심에서부터 십자가에 사죄의 죽으심과 장사 지냄을 기록하면서 이제 다시 보게 되겠지만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고 증거하였다.

하여 오늘 v35b에 같은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기록을 주고 있는데 이것이 성경 전체를 기록한 목적이요 이 요한복음을 기록하는 목적이라는 것이다.

시편49:12에 범죄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가치를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하였고 다시 v20에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두번씩이나 증거하고 있지만 이 짐승 같이 되어버린 사람을 다시 구원하는 것이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함도 역시 증거하고 있다.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시49:7~8)

그렇기 때문에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이 죄인들의 속량을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이고 그것이 바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역사 속에 쓰임 받은 사람들의 한결 같은 당부는 이렇게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35b)는 요한의 당부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수천년 역사속에 자신의 일꾼들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죄인 된 사람 사랑을 증거하고 예언한 것은 모든 사람으로 믿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초청이다.

오로지 이것을 방해하는 일이 있다면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눅8:12; 마13:19; 막4:15)라는 에덴에서 타락을 부추겼던 존재들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다 이루었다!”라는 선언을 이미 들었다. 하나님께서 이미 다 해 놓으신 일을 우리 각자가 나를 위한 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요 또 구원받는 유일한 길이다.



Ⅰ. 성경의 성취를 증언하는 요한(35~37)

함께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따르던 사도들 중에 마태도 있지만 마태는 이 십자가의 사건을 함께 기록하면서도 이렇게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라는 요한 같은 증거를 하고 있지는 않았다. 요한은 자신이 목격한 모든 사실을 단순히 본 것에서 끝내지 않고 이 본 사실들이 바로 OT성경의 예언의 성취하는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다.

또 요한은 죄성(罪性)을 가진 사람들의 불신의 성품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본 사실들을 증거하고 있다고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표현을 다 사용하여 사람들을 믿음으로 초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35) 요한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만을 본 것이 아니라 성경의 예언의 이루어짐을 봤다고 하는 것이면서 1세기말에 유행했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견해나 생각[Gnosticism, Ἐβιωναῖοι]들을 바로잡는 귀중한 증언이다.

요한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목격자만이 아닌 “이 일을 증언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21:24)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과 삶의 참된 증언자임을 이 서신의 마무리에서도 증거하고 있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36) 이미 앞에서 우리가 인용한 바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양 되심을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확인했다는 증언이다.

요한은 이미 1:29b, 36b에서 침례자 요한을 통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선언되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아야 하는 유월절 양이신 까닭(출12:46; 민12:9)에 그 짧은 시간에 운명 하심으로서 강도들처럼 다리를 꺾어 죽임을 당하지 않으신 것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스가랴12:10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37)는 재림 때에 로마 군인들의 손을 빌어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찌른 유대인들이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영광과 위엄을 보면서 가슴을 칠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증언하고 있다.

영혼의 사람이요 진실된 사람인 요한은 단순히 자신의 육신의 눈으로 본 것을 말하기보다는 자신이 본 이 모든 사실들이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주장이나 만들어 낸 이야기와는 다르게 성경을 이루는 것이었음을 진실되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 역시 육신의 안목으로 보는 것 만이 아닌 그 이면에 감춰져 있는 영적인 이치를 깊이 헤아릴 수 있는 영성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하늘의 사람이요 영적인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됨이 단순한 진실이 아니라 하늘의 진리를 증언하는 진리의 추종자들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삶이 비로소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는 바울 사도의 당부에 합당한 삶이 될 것이다.



Ⅱ. 숨은 제자 두 사람(38~40)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실 때는 주님의 형제들도 그랬지만 유대사회에서 출교를 당하는 불이익이나 사회적 지위를 잃지 않으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던 사람들이 여기에 언급된 사람들 외에도 더러 있었을 것 같다.

특히 위에 언급되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 니고데모 두 사람은 어떤 사람들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좋아하면서도 자신들의 지위나 다른 이유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하면서도 살아 계실 때에는 보이지 않게 흠모하는 사람들인 것으로 요한은 표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에 오히려 그 시신(屍身)을 달라고 하는 요구를 하는 것을 보면 그냥 건성으로만 주님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었음이 나타난다. 어찌 보면 죽음으로 끝난 것 같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육신적으로만 봤다면 이런 요구를 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38)

이 사람에 대한 다른 설명은 요한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공관복음에서 이 사람의 성격을 참고해 볼 수 있어서 감사가 된다. 마태는 이 사람을 “부자 요셉”(27:57)이라 기록하고 있고 마가는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15:43) 하였고 누가는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23:50)라고 예수님의 제자다운 면모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말하고 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 역시 바로 뒤에 언급되는 니고데모와 같은 지위와 산해드린 공회원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주님께서 육신으로 살아 움직이실 때는 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당시 사회에서는 한결같이 약자들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세상을 뜨고 나니 생각지도 못한 이런 상류층의 두사람에게 장례를 받게 되는데 이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라 OT의 예언의 성취이다. 메시아 예언의 핵심인 이사야53:9에서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전혀 무흠하신, 죽을 죄가 없는 분이셨지만 죽어 장사되는 것이 마치 모든 죄인과 같이 죽임을 당하고 [스올]이라고 하는 무덤에 내려가신 것이지만 가난한 목수의 아들의 육신적인 지위에 어울리지 않게 부자의 무덤에 묻히실 것이라는 예언의 성취인 샘이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39) 요한이 이미 3장에서 귀중한 거듭남의 대화를 언급한 바 있던 그는 니고데모로 마치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라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장막절에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아랫사람들을 보내 예수 그리스도를 체포하러 보냈다가 오히려 주님께 감화를 받고 그냥 돌아온 그 아랫사람들을 책망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판결을 조심할 것을 경계한 바 있다.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요7:50~51) 했다가 오히려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52)고 핀잔을 받은 바 있다.

이 니고데모가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를 위해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39)는 헌신을 기록하고 있다. “몰약과 침향”은 모두 귀한 향료들로 이 니고데모가 가져온 백 리트라는 우리 단위로 계산하면 대략 35Kg 정도가 되는 많은 량이다.

신기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셨을 때 동방의 박사들이 가져왔던 세가지 보물 중에 한가지였다. 특히 이 몰약은 아라비아나 에디오피아가 주산지로 향료일 뿐만 아이라 주로 방부제로 사용되는 것으로 부자들의 장례식에 염을 하는 재료로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이름없는 동방의 박사들이 예물로 가져왔던 몰약, 그리고 바로 그 그리스도의 죽음의 염을 위하여 니고데모가 가져온 유향 몰약 즉, 시작과 끝을 몰약으로 장식하는데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모든 사람들이 죄로 죽어 썩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살려 섞지 않게 하고 향기 나게 변화시키시는 몰약의 역할을 하실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침향도 인도 동부와 코친에서 자라는 향료로 주로 훈증으로 사용하는 향료이지만 몰약과 섞어서 죽은 자의 방부처리에도 역시 사용되는 값진 향료라고 전한다.

사실 니고데모가 가지고 온 이런 분량의 향료는 왕이나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사용하는 많은 량이라고 한다. 결국 숨겨져 있던 니고데모를 통하여 만 왕의 왕이신 우리 주님의 장례식에 계획되지 않았던 왕의 대우를 하게 되었던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닌 것이다.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40) 어느 인종이나 나라든지 죽음 앞에서는 최고의 존엄을 가지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더욱 그랬다. 시신이 정결하게 장례 되지 못하는 것 자체를 저주로 봤던 것을 OT에서 더러 볼 수 있는 사실이다.

또, 유대인들이든지 로마법이든지 교회 역사 속에 비록 적대시하던 사람일지라도 죽은 이의 동료들이 시신을 가져다 장사 지내는 것은 크게 제제를 받지 않았음을 마태복음에서 보는 헤롯이 죽인 세례자 요한의 경우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14:12) 하였는 기록하고 있다.

교회 탄생 후에 첫번째 순교자였던 스데반 역시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행8:2)는 기록에서도 볼 수 있다(렘8:2).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으로 가는 과정은 물론 죽어서 까지도 주변의 사람들이 예상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역사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철저하게 성경의 예언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이 증명되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실 때는 제자됨을 감추고 있었지만 오히려 죽음 앞에서 인정하면 더욱 불리해질 수 있었을 것임에도 빌라도에게 당당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를 달라 하여 장사 지냄으로써 그분의 제자됨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더 바람직한 제자됨의 모습이었다면 살아생전에도 기득권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더라면 더욱 기뻐하실 모습이었겠지만 오히려 숨기고 있다가 더 불리해진 상황에서 드러낸 것도 훌륭한 결단이었다.



Ⅲ. 장사 지냄(41~42)

앞에서 인용했던 대로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라는 이사야53:9f에서의 말씀의 예언이 역시 채워진 내용이다. 죽음과 관련이 없으신 분이시고 죽으실 수 없는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어 장사되심은 죽고 살지 못할 모든 인류의 죽음을 대신 감당하신 것으로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의 모습이 되신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41) 하였는데 물론 이 무덤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소유였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잠시 사흘 동안만 사용될 무덤이었지만 마태복음에 같이 기록되고 있는 것과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마27:60) 라고 기록되고 있다.

누가는 이를 다르게 기록하기를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눅23:53) 라고 증거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막벨라 굴처럼(창25:9) 대대의 후손이 같은 굴 속에 장사 지내는 것은 익숙한 유대인들의 관습이었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도 장사 지낸 적이 없는 새 무덤 속에서 삼일 낮 삼일 밤을 장사 지낸 채로 생명 없는 모습으로 계셨다. 완전한 승리와 능력의 부활을 위하여 침묵하고 계셨던 것이다.

이제 마태복음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비한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염려로 군인들의 파수이야기(27:62~66)는 생략되고 있지만 주님께서 장사 되셨던 모습만은 아주 사실적으로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그 장례의 날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례를 전하고 있다.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42)

앞에서 살짝 언급했던 것처럼 여기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라는 표현이 유월절 준비일이라는 설과 안식일의 준비일이라는 두가지 이해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권위를 둔다면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전승되고 있는 ‘안식일의 준비일’ 이라기 보다는 “유월절의 준비일”이라는 말이 더 타당하게 여겨진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쉽고 일반적인 이론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택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

요한 사도는 자신의 눈으로 본 것보다 중요하게 여긴 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일꾼들을 통하여 주신 예언들의 성취였다. 육신의 눈으로 본, 되어지는 사실보다 귀중하게 확인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에서부터 죽음의 순간까지 일평생의 삶이 예언의 성취였다는 확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살아 계실 때까지는 그 주님을 공경하고 우러러보면서도 자신의 제자됨을 나타내지 못했던 요셉과 니고데모는 오히려 주님의 권위가 끝나버린 것 같은 죽으심 뒤에 자신들의 제자됨을 예수 그리스도를 장사 지냄으로 증거하였다. 보다 바람직한 제자됨의 모습은 우리의 모든 일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선포하고 기도하며 행함으로 더욱 적극적인 신앙의 삶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라는 이사야의 예언의 이루어짐은 이제 죄로 인하여 계속적으로 무덤에 바쳐졌던 모든 인류의 비극을 끝내기 위해서 생명자체 이신 생명의 주님께서 무덤에 장사 되셨다. 그런 이유에서 밤낮 사흘만 장사되어 계셨던 것이다. 그 몹쓸 죽음을 영원히 멸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부활하셔서 사망을 향해 호령하신 것이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5~57) 즉, 율법을 온전히 완성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시면서까지 철저하게 예언된 모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고 죽어 장사 되셨다. 그러나 이 죽음은 일반 사람들의 죽음과 장사됨과는 다른 것은 부활하시기 위한 죽으심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다음 주부터는 침울한 죽으심의 이야기를 털어내고 영광스러운 부활의 역사를 다루게 될 것이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꼭 생각하고 헤아려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위하여 죽으셨듯이 죽지 않으면 부활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여전히 자신을 죽이지 못하고 자기 자신이 굳건히 살아 있으면서도 부활을 욕심 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죽음이 없이는 절대로 부활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부활을 소망한다면 반드시 죽어야만 가능하다는 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