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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9:25~34 2021-05-09
다 이루었다!  
제자들은 대부분 도망하듯 주님을 떠나고 연약하다고 하는 여인들이 죽음을 오락으로 삼는 잔인한 군인들과 함께 주님의 운명을 지키고 있고 요한 사도만은 이 광경을 잃지 않고 본 것을 확인하게 되는데 그 절박한 상황에서도 어머니를 부탁하는 안타까움을 본다.

고통과 목마름 속에 수치스러움도 참으시면서 그런 상황에서조차 성경의 예언을 어김없이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이 사실 안타깝다. 성경에 예언된 모든 것을 다 성취시키고 서야 다 이루었음을 확인하시고 운명하신다.

그런 만큼 “다 이루었다!”는 절규 같은 외침은 사실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셨고 어쩌면 주님을 순종하며 따르려는 사람 또한 끊임없이 유혹하는 이 세상에서 자신과의 싸움이겠지만 그럼에도 성령의 위로와 도우심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승리하신 것처럼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찬451:4 예수 부활하셔서 승리하신 것 보고, 나도 승리할 줄을 믿고 싸우리]라는 고백의 찬양을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의인을 죽이는데 온 힘을 쏟은 유대인들은 마치 더럽힘을 받지 않으려고 이방인 빌라도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처럼(18:28) 그 안식일이 다른 안식일과 다르게 유월절을 지키는 큰 날이기 때문에 그 안식일에 시체를 나무에 두어 부정할 것을 두려워하여 아직 살아있는 죄수들의 다리를 몽둥이로 분질러 죽여 치워 달라는 간악한 요구도 여전하다.



Ⅰ. 육신으로도 할 바를 다하심(25~27)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바로 아래에 십자가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가운데 군인의 수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를 포함하여 4사람의 여인들이 그 희생의 주님을 지켜보고 있었음을 요한은 상세히 전달해 주고 있다.

예수께서 나셔서 성결예식을 치르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을 때 시므온이라는 늙은 선지자가 축복하면서 마리아에게 예언하였던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눅2:35)라는 예언이 이렇게 성취 되리라고 는 마리아는 생각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들이 당시의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는 모습은 참으로 자신의 마음이 칼에 찔리듯 힘겨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어머니는 여자보다 강하다’는 모습을 여기서 마리아에게서도 보게 된다. 마리아는 찢어지는 마음에도 십자가에 달린 아들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25) 네 사람의 여인들 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여인은 첫째로 예수님의 어머니와 자신의 운명을 바꿔 주시고 십자가에 달려 계신 것을 또한 안타까워하는 막달라 마리아였을 것이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26) 주님께서는 극렬한 십자가의 고통가운데서도 어머니를 확인하시고 또 요한에게 당부하신다.

이것은 서로가 의사가 통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음을 확인해 볼 수 있고 비록 위와 아래의 차이이지만 서거나 앉아서 마주보며 나누는 대화만큼이나 가까운 마음의 나눔을 볼 수 있다.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26b) 여기서 요한은 보다 어머니와의 간격을 없애는 표현을 쓰고 있다.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사실 여기까지 오는 데만 해도 마리아는 마음에 품어야 만했던 신비함과 안타까움을 경험(눅2:19, 51b)하였고 당시로 보기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가는 것 같은 아들의 죽음에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을 까도 생각해보면 가슴이 미어지는 마음으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는 이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머니를 확인하는데서 그치지 않으셨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27) 여기 [그 제자]는 두말할 필요없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도 요한을 의심할 근거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바꾸면서까지 부모에게 할 바를 하지 않는 유대 바리새인들과 장로들에게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막7:11~13f) 라고 책망하신 바 있다.

자신의 마지막 극단적인 죽음의 고통 가운데서도 어머니를 챙기시는 모습에서 주님의 이러한 가르침이 결코 공차사가 아니셨음을 몸소 실천해 보이심을 배우는 데서도 생명의 교훈을 가르치셨음을 감사하게 된다.

그러나 조금은 의아한 것은 마리아에게는 최소한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마13:55~56; 막3:32, 6:3)라는 네 아들이 그의 누이들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성경에 기록되고 있는데 왜, 굳이 요한에게 어머니를 당부하는가 하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마리아의 배에서 난 형제들은 물론 복음의 완성 후에는 그러지 않았지만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까지도 믿지 못했던 것으로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7:5) 요한의 기록으로 보이고 있다.

심지어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주님을 찾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두시고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3:33~35)고 말씀하신 바 있다.

사람의 마음까지 꿰뚫어 보시는 주님이셨기 때문에 깊은 믿음과 사랑의 사람인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했던 것 같고 요한은 다른 일도 그렇지만 이 십자가상에서 부탁하신 어머니 마리아도 여러가지 설은 있지만 극진히 모신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Ⅱ. 다 이루었다(28~30)

예수 그리스도의 삽자가상에서 말씀하신 일곱마디(가상칠언)는 너무나 유명하고 믿음의 사람들은 대부분 들어본 말씀일 것이다. 특히 잠시나마 하나님 아버지와의 단절의 안타까움을 표현하셨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막15:34)는 육신의 고통만이 아닌 영혼의 탄식을 표현하시는 것이라는 데서도 어느 사형수의 십자가형의 그것 과도 비교될 수 없는 아픔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기에 기록되고 있는 공관복음이 쓰여진 훨씬 후의 요한의 보충적인 십자가 상의 선언이야 말로 구속의 절정을 표현하는 주님의 십자가상의 말씀이셨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28) 주님께서는 가시관을 머리에 눌러 씌우고 모진 채찍질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끝까지 자신이 해야 할 마지막까지의 사명을 너무나 또렷이 알고 계셨음을 본다.

마가나 누가 모두가 성령의 감동으로 그들의 복음서를 기록한 것이 분명하지만 그 사건의 현장에서 상황을 지켜봤고 또 성령의 인도를 받은 요한 사도야 말로 그들이 빠뜨린 부분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주변의 상황을 중계하듯이 우리들에게 전달해 주고 있음을 본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28f) 어떤 경우 우리는 선한 일 조차도 벼르다가 놓지는 경우들도 더러 있어서 순간을 지나치고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하는 일들이 더러 있었음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경우도 놓지는 경우가 없으신 데서 역시 분명한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더욱 확신하게 된다. 진행되는 시간 속에 적당한 때를 어느 경우도 놓지신 경우가 없으시다.

심지어 그의 탄생에 조차도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갈4:4)이라는 표현에서부터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 조차도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라는 요한의 섬세한 주님의 마음의 이해까지도 전달해주고 있다.

물론 이것도 당시 현장에 있을 때는 의식하지 못한 것이었지만 나중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이해된 것이었을 것이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2:22)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29)

시편 69:21을 응하게 하시면서도 물론 마태복음27:34의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막15:23)는 말씀으로 볼 때 그것이 진통제임을 아시고 거절하신 것으로 나타난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그러실 수 있으셨겠지만 모든 인류의 죄를 홀로 지시고 십자가의 그 모든 죄로 인한 저주의 수치와 고통과 슬픔을 영육으로 모두 감당하시려고 피를 다 흘리시고 타는 목마름으로 달려 계셨다.

십자가형을 당하는 사형수에게 최후의 동정이라고 하는 고통을 조금은 감할 수 있는 마취제를 탄 포도즙 조차도 맛보시긴 하셨지만 마시지 않으신 것이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30) 마지막 죽음의 공포감이 다가오는 직전에 외치셨던 “다 이루었다!”는 어떤 사람도 불가능한 인생의 마무리였다.

이 역사 속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 과연 인생을 마치면서 “다 이루었다!”는 선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을까 의문이다. 대부분의 죽음 앞에서 인생을 체념하면서도 ‘그것은 꼭 했었어야 했는데!’ 라거나 ‘내가 하던 일을 너희들이 이루어 주길 바란다!’는 자녀들에게 유언(遺言)도 더러 있다.

무엇보다도 “다 이루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은 죄의 영향아래 나서 죄를 짓고 일생을 살지만 누구도 그 죄에서 자유 할 수 없었던 인류의 모든 사람들에게 죄로부터 자유를 완벽하게 선언하는 말씀이다.

여태까지는 사람의 노력과 어떤 방법으로도 전혀 불가능했던 죄의 저주와 죽음으로부터 이제는 누구든지 죄의 굴레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 완벽한 길을 완성해 놓으셨다는 증거가 “다 이루었다!”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다 이루었다!”는 약속에도 사람 측의 믿음과 순종이 없다면 이 약속이 그러한 사람에게는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도 생각해야만 한다.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30b) 사실 죽으실 수 없는 분의 죽음이시기에 안타깝고 당시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안타까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생명의 주님께서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10:18) 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버리신 것이다.



Ⅲ.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31~34)

전 항목의 마지막에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30b) 기록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운명하셨음에도 좌우에 함께 못박혔던 강도들은 아직도 살아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아무래도 가시 면류관이 씌워지고 채찍질하여 유대인들의 분노를 잠재우려 했던 빌라도의 십자가 전의 형벌에 이미 피를 많이 흘리시고 탈진하여 운명이 빠르게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로마의 십자가 형벌은 죽을 때까지 십자가에 달아 두는 것은 물론이고 죽은 후에도 본보기로 그대로 달아 두기도 하는 것이 십자가형 후에 있는 일들이었지만, 또다시 유월절 절기를 나름대로 편하게 지내기 위한 유대인들의 요청으로 일찍 죽여서 시체를 치워 달라는 요청을 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31) 여기에는 또 하나의 사악한 종교꾼들의 간악함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는 것은 또 한번의 무자비였다고 할 수 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이 죽지 않아 시체를 치울 수 없을 때는 나무 몽둥이로 그들의 다리를 부러질 만큼 치게 되는데 이것 또한 십자가에 달려 있는 것과 비교될 수 없는 아픔의 가중이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약에 운명하시지 않은 체로 계셨더라면 이 유대인들의 간계로 인하여 한번 더 죽임을 당하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는 무한한 자비를 구하면서 자신들의 성결과 평안을 위하여 이런 일을 주문하는 저들이 종교 지도자들이라는 사실이 하나님 보실 때 진노하실 수밖에 없는 자비를 잃어버린 모습이다.

또 하나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실은 주님을 장사한 날을 대부분의 교회역사속에서는 의심없이 금요일저녁 때 즉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으로 못 밖아 두고 그렇게 듣고 배우고 전승되어 왔다. 그러나 이 부분도 주님의 예언과 어울리지 않는 획일적인 가르침이다.

우리가 그것을 정확하게 모두 여기서 다룰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에 장사되어 계신 기간이 위와 같은 기준으로 계산하면 이틀 밤과 하루 낮 그리고 하루가 시작되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럴 때 생기는 문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 하신 말씀의 훼손이다. 주님께서 어떤 것을 말씀하셔도 과장하시거나 줄여서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 일은 그냥 받아들일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행히도 요한의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31f) 라는 기록이다. 이 기간은 일반적으로 맞게 되는 보통의 안식일이 아니라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을 앞둔 그 안식일이 큰 날이라는 언급이 이 문제를 풀어갈 단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뭐 중요한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더 많은 성경이해가 있어야 하겠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셨을 때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이 몇인가 했을 때 의심없이 셋이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너무 건성으로 지나가는 이해가 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요구는 역시 그대로 받아들여진다.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32)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의 죽음을 맞는 시간은 사람마다 달라서 사흘정도를 가는 것은 일반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단번에 피를 흘리는 것도 아니고 못 자국에서 조금씩 피가 새어 나오는 상태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피를 많이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와는 양편의 강도들은 달랐던 것이다. 그 모진 고통을 참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다리를 깨뜨려 단번에 죽이는 것은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또 하나의 형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33) 한 것에서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만 이것 역시 우연한 일이 아니라 성경의 예언의 성취 때문이라는 사실을 지나칠 수 없다.

바울 사도는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5:7)고 우리의 새로운 삶에 대하여 도전을 주고 있다.

우리는 과거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종 노릇하다가 유월절을 계기로 자유를 얻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세상과 죄에 종 노릇하다가 유월절 양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유 함을 얻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유월절 양의 독특한 점은 불로 구워 먹는 것과 함께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36) 바로 다음 주의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첫번째 유월절이었던 출12:46과 이를 광야에서 다시 확인하는 [민9:12,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는 말씀과 시34:20에 기록된 사실이다.

그러므로 양쪽의 강도들의 다리를 꺾고 예수 그리스도께 왔을 때 이미 운명하셔서 다리를 꺾을 필요가 없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양으로 이 땅에 보내진 존재라는 사실을 그대로 확인하는 귀중한 또 하나의 확인이었다.

그리고 오늘 읽는 마지막 말씀은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34)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확인사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미 죽어 있는 사람의 심장에서 나올 수 있는 분비물이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사람의 심장에서는 피는 나올 수 있지만 물은 나올 수 없다.

여기에도 많은 상징을 부여하려는 시도가 있지만 그런 것들보다도 이 일에 대해서도 주어지는 예언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OT의 스가랴12:10은 유월절과 관련한 또 다른 예언이 주어지고 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결국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이루어질 사실을 요한계시록1:7에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인류에게 유월절 양으로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믿지 않으므로 당하게 될 안타까움을 말하면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하고 창으로 옆구리를 찌른 군인조차도 탄식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모든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각자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각자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십자가상에서 대속의 죽음을 마치시면서 “다 이루었다!”는 선언이 각 사람의 구원을 완벽하게 이루신 것이라는 고백으로 그를 따르는 자에게 영생은 완벽하게 주어질 거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사실적인 사랑의 역사를 거절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다만 어두운데 던져저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22:13, 마24:51, 마25:30; 눅13:28)는 두렵고 안타까운 영원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각자의 선택일 뿐이다.

나는 과연 어느 편에 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