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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9:8~16 2021-04-25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빌라도는 나름대로는 자신의 권력에 손상을 받지 않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놓아주고자 해서 채찍질까지 했던 것을 앞에서도 보았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나타난 사실에 대해서 이제는 두려움마저 갖게 되었다.

자주 하는 말이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 즉, 두려움을 가진다면 세상에 대해서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가난하고 권력 없는 사람들이야 두려워할 수도 있지만 당시의 빌라도 같은 총독이 두려움을 갖는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자신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마27:19) 라는 경계를 들었고 유대인들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7b)라는 저들의 말도 빌라도를 두렵게 하는 이유였을 것이다.

사실 사람마다 두려움의 종류는 다르고 또, 빌라도와 같은 권력의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뒤에 로마라는 국가 권력이 있고 당장에는 자신을 호위하고 있는 병사들이 상주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이 상황에서는 빌라도의 두려움을 없앨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 어디서부터 인가를 묻지만 주님은 이 상황에서는 침묵으로 대신하신다. 빌라도는 자기의 권력을 가지고 큰소리 쳐 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위에서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그러나 자신을 죽이려고 선동하는 사람들의 죄는 더 크다고 말씀하신다.

이제 결정적인 빌라도의 약점을 가지고 소리치는 유대인들의 함성에 두려움을 해결하지 못한 체 재판석에 앉게 되고 유대인들의 로마 황제 가이사만이 자신들의 왕이라는 마음에도 없는 거짓 충성을 들으면서 십자가형을 판결하고 만다.

양심에 거리끼고 마음에 두려움을 가지고도 해서는 안될 일을 하는 것은 어느 누구나 사람이면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고 특히 신앙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그렇다. 마음에 내키지 않는 신앙적으로 옳지 않는 일을 마음의 거부감을 억누르며 하게 되면 그 일은 반드시 후회할 수도 있다.



Ⅰ.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8~11)

사람들은 돈이 있고 권력이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지금 이 빌라도를 보라! 로마정부의 파견을 받고 이스라엘의 총독으로 나와 있으면서도 아주 작은 일 즉, 이 땅에 사람 하나를 마음대로 못하고 안절부절하고 있는 것이다.

크게 보면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역사 안에 있는 사건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본다면 피지배국의 죄인이라고 고발당한 한사람을 붙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바로 앞의 v7에서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7)는 고발을 듣고 고민을 넘어서 두려워하는 모습이 오늘 내용의 첫 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8)

물론 여기서 빌라도가 두려워했던 내용은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권리선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연히 유대인들의 입을 통해서 나온 “…그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7b)라는 내용이었 다.

빌라도는 자신의 정치생명에서 여러 가지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지만 이번만큼이나 스스로의 의지를 나타낼 수 없고 그야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어려움이 과거에는 있었을까 싶다.

처음에는 그냥 사람을 선동하다가 기득권을 가진 기성종교 세력에 고발당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아내의 부탁도 예외인데 다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한다”는 저들의 고발이 심상치 않게 빌라도를 무섭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두려움이 결국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9f) 묻게 된 것이다. 빌라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릴리로부터 오신 사실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이렇게 물었던 것은 나름대로 하늘로부터 오셨는가를 묻고 있는 모습이다.

만약 주님께서 하늘로부터라고 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가정(假定)도 해 보지만 역시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주님께서 이 질문에 답변을 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9b)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나아 가시는 과정에 침묵(沈默)이 이번만은 아니셨다. 유대인들이 수없이 많은 죄목으로 고발했지만 거기에 대하여 침묵하시는 주님을 보고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마27:13~14; 막15:4~5)는 기록도 있다.

지금까지 빌라도가 봐왔던 대부분의 죄수들은 되도록이면 자신의 죄를 벗거나 가볍게 하려고 수많은 변명들을 늘어 놓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예수님은 담담히 계시는 것이 오히려 신기한 것보다 더 위엄스러운 모습이었던 것 같다.

사실 답변이 없는 것 자체가 응답일 수도 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기도할 때도 그런 경우를 경험하게 되는 데 우리가 이미 어떤 결정을 해 두고 하나님의 제가를 받으려는 경우 하나님의 응답을 듣지 못한다면 그것 자체를 응답으로 믿고 그 일을 하지 않아야 할 때도 있지만 기도했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승인으로 알고 그 일을 진행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번에는 빌라도가 주님께 급하고 두려운 나머지 협박조로 묻는다.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10) 이 말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권세는 사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이 불신자는 알 리 없었을 것이다.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13:1b) 빌라도에게 총독의 권세를 준 것은 보이는 입장에서는 로마의 총독이나 원로원이겠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시저(Caesar)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빌라도는 자신에게 이스라엘의 총독의 자리를 주신 그 하나님 앞에 자신의 권세를 가지고 협박을 하고 있는 샘이다. 마치 아직 어린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협박하는 것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철없는 총독은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10b)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허락된 것임을 주님께서 답변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11f) 그리고 그렇게 된 과정과 함께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11b) 말씀하시는데 사실 현행법에도 살인자 보다 살인 교사자의 형벌이 더 크다. 그러나 물론 대리 형벌을 집행하는 빌라도는 죄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만큼 소망적인 예언으로 메시아를 언약하셨고 마침내 때가 되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는커녕 죽음으로 내모는 선택된 백성들의 안타까움을 그대로 탄식하시는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눅12:47~48f)신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빌라도는 무엇인가 어렴풋이 자신의 권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신비한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두려움도 가졌지만 그 마음을 억눌려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만다.

오늘 나의 두려움은 과연 무엇이며 그 두려움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하는 것은 내 인생과 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나를 알았던 사람들에게 나의 모습을 두고 갈 이유가 될 것이다.



Ⅱ. 시험당하는 빌라도(12~13)

이제 주님으로부터 경고를 받았음에도 빌라도는 마침내 관정밖으로 나가 십자가형을 선고하는 것으로 주님과 있었던 심문이나 대화의 내용은 별 의미를 두지 않는 불신자다운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12f)

가시관을 머리에 눌러 씌워도 채찍질을 가해도 어떤 대우에도 흔들림이 없으시고 온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과 인자하심을 보면서 빌라도는 더욱 두려워했고 더욱 놓고자 힘썼다. 그러나 사실 힘쓰는 것이 다는 아니다. 세상에 어떤 것도 힘쓰지 않고 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서 힘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지막 결정이다.

신앙이 힘쓰는 데서 끝나면 안된다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결정하고 행하는 것이다. 아무리 선한 의지로 애썼을지라도 그것을 행하지 않았다면 사실 애쓴 보람은 없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믿음에 있어서 과정과 결과가 다 중요하다.

어쨌거나 신비한 인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놓으려고 힘쓰자 거기에 돌아오는 반응은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12m) 빌라도에게 가장 취약할 수 있는 약점을 건드리고 나온다.

논리상으로는 이러한 이론은 사실 호소력을 갖지는 못하지만 어쩌면 빌라도에게는 자신을 유대의 총독으로 보내준 가이사에게 충신역할을 해야 자신의 자리가 보존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피지배국의 국민들의 목소리에 민감할 수 있는 부분 인 것은 맞다.

유대인들이 빌라도의 충신이 아닌 반역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놓아주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소리지르고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형에 처하면 충신이라는 논리로 다그치는데 유대인들의 이러한 공격이 빌라도에게 완벽하게 적중(的中)하고 만다.

그러한 근거는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12b)라는 유대인들의 주장이지만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셨음(18:36)에도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도 안되는 논리로 빌라도를 꼼짝 못하게 만들고 만다.

결국 빌라도의 아킬레스건은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놓아준다면 그의 상전인 가이사에 대한 충신이 아니라는 부추김에 유대인들에게 항복하고 만다. 이렇게 자리에 연연하는 사람에게 대의명분(大義名分)이나 바른 판단은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로마의 황제를 거역하는 반역자로 가정하여 그러한 예수를 놓아준다면 가이사 황제를 같이 반역하는 것이라는 말이 총독자리에 연연하는 빌라도의 마음을 움직이고 만다. 빌라도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인품과 모든 상황을 통해서 죄가 없으신 분이심을 충분히 알았다.

그럼에도 자신의 총독자리를 잃으면서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놓아줄 용기는 없었다. 사실 빌라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도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얼마든지 갖고 있다. 많은 역사 속의 사람들이 자신의 안락한 삶을 잃고 싶지 않아서 그리스도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 (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있더라”(13) 찜찜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빌라도의 마음은 결정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그의 입으로 자신의 결정을 선포하는 일만 남겨두고 있다.

최종적인 판결을 할 때 마치 의사봉을 세번 치는 것이 국회나 법기관의 결정하는 모습이라면 당시 빌라도는 이 “가바다”에 앉아서 선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던 전례를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해 주고 있다. 결국 빌라도의 유대인들의 시험에 정의감을 잃고 지고 만다.



Ⅲ. 가이사 외에 왕이 없다는 고백(14~16)

이제 유대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던 것처럼 빌라도도 양심에 거리낌이 남고 두려움이 있지만 자신의 총독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길이 이것밖에 없다는 판단을 하고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너희 왕이로다!”라고 선언한다.

이 말은 어쩌면 ‘내가 너희 왕을 죽음에 넘기는 것이다!’라는 약간은 저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지만 역시 자신도 소신대로 바른 결정을 하지 못하는 수치를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 큰 문제는 여기에 대한 대제사장들의 반응이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일반 유대인들도 로마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로마를 좋아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들의 정신 세계를 이끌어가고 자신들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이끄는 대제사장들의 이러한 고백은 모양에서 라도 있을 수 없는 행동이다.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14) 여기에 나타나는 날이나 시간들이 공관복음과 다른 표현으로 나타나지만 깊이 다뤄야할 가치를 느끼지 않는다. 다시 v31에 가서 한 번 다루게 되겠지만 조금 다르게 보는 날이나 시간보다 중요한 것은 죄에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가 중심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의 지식이나 예언에 무지한 빌라도의 “보라 너희 왕이로다!”라는 선언이다. 아브라함부터 예언되어온 이 땅에 오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였음에도 저들은 알아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죽이려고 반역하였는데 하나님은 이방의 총독을 통하여 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선언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눅19:37b~38) 라고 찬양하였다.

이를 본 바리새인들이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항의를 하자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눅19:40)고 주님께서 답변하셨다.

또 이미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1~12)라는 표현과도 다르지 않다. 당연히 영광을 돌려야 할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돌들과 자연들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대신 찬양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중요한 교훈이다.

예수님께서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마8:8)라는 로마의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도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8:12)는 두려운 말씀을 하시기도 하셨다. 이런 입장에서 오늘 우리의 자리를 잘 감당해야만 한다.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15f) 자신들을 최종적으로는 로마의 학정에서뿐만 아니라 죄에서 구원해 주시려는 구세주를 두고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부르짖는 어리석음이 극에 달했다.

그것도 가장 참혹한 극형인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는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에서 나올 표현은 아니었다. 이들의 반응에 너무나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없었던 총독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15m)고 묻는다.

대제사장들의 선동을 받은 유대 군중들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왕 되심을 잊어버리지는 않았을 것인데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은 체 거짓 고백을 또 하고 만다.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15b)

OT의 역사에서 이스라엘이 주변의 국가들처럼 적군과 싸우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자신들에게도 왕이 있어야 한다는 그럴싸한 말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의 왕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하겠다”(삼상12:12) 고 책망하셨다.

자신들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완악한 저들의 심령에 메시아가 제대로 보일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 만이 아니라 우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 세상의 어떤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사람에게는 역시 왕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지고 만다.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16)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을 잃어버린 그 하나님의 백성들의 삐뚤어진 생각과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자리를 잃지 않으려는 정치꾼이 함께 만들어낸 가장 추악한 역사였다.

선악의 기준을 함께 잃어버린 유대인들과 빌라도, 양심의 가책을 짓밟아버리고 자신의 소신을 잃어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지위를 잃지 않으려는 빌라도의 욕망의 죄성(罪性)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보다 심각한 문제는 당시의 하나님께 섬기며 제사하는 대제사장들의 무리들이다.

우리는 멀리 떨어져 이 상황을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지만 당시에 자신들의 권위나 이권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없었는데 홀연히 나타나 도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서야 자신들의 권위와 이권이 지켜질 수 있다는 참으로 더러운 종교꾼들의 욕심이야 말로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얼마든지 저를 비롯한 오늘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는 안타까운 위험이라는 데서 우리가 경성하고 깨어 있지 못한다면 오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하신다 하여도 같은 범죄를 반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음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죄에 대한 경계로 주시는 두려움은 밟아버리면 안된다. 바른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이 있을 때 오히려 범죄의 자리에서 두려움의 경계를 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자리나 이권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 우리 일상의 삶에서 우선이어야 그것이 바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모습이 될 것이다.

하나님 외에는 우리가 목숨 바칠 충성의 대상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 이런 확신과 각오가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6:6b)는 일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