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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8:33~40 2021-04-11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새벽에 빌라도의 관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끌고 와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30) 라는 막연한 고발에 빌라도는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31f) 하였지만 여기에 대해 유대인들의 반응은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31b)라는 대응이 지난 주의 말씀이었다.

빌라도는 막무가내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형 판결을 해 달라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죄명을 물었지만 막연한 답변에 증거조차 없었으므로 ‘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같은 동족을 로마의 법으로 죽여 달라고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자신의 보기에도 ‘폭력적이거나 거칠지 않은 이 갈릴리 출신의 사람이 과연 로마정부를 대항하여 정치적인 대항이나 반란의 무리들을 이끌 수 있을까!’ 생각하며 들어 가 예수 그리스도를 심문하는 내용이 오늘 이 18장 마지막 본문의 말씀이다.

이 심문의 내용은 하늘의 진리와 생명, 그리고 땅의 어리석음이 분명하게 비교되면서 드러나는데 자신의 총독 자리를 지키기 위한 빌라도의 재판으로 생명이 무엇인지 영생이 무엇인지 천국이 무엇인지 전혀 그런 쪽에는 관심이 없는 이 땅에서의 영광을 구하는 대표자와 우리 주님과의 어울리지 않는 대화를 보게 된다.

또 여기에 나타난 빌라도의 심문 내용은 어찌 보면 조금은 유대인들을 조롱하는 듯한 모습이 짐작되기도 한다. 얌전한 자신의 동포를 죽여 달라고 하는 유대인들의 행동이 총독의 입장에서 볼 때는 단결이 전혀 안되는 피지배국 사람들이 로마에 지배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 같기도 하다.

영적인 진리와 육신적인 욕구는 어디에서나 부딪힐 수밖에 없다. 영과 육의 조화는 그래서 쉽지 않은 것이고 이런 이유에서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영의 사람이 될 것을 당부한다(갈5:16). 이것은 또 영원이냐 순간이냐의 간격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리에 대해 증거하시기 위해서 오셨으며 진리에 속한 자들 만이 그 진리를 들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히브리어에서 진리[אֶמֶת]는 헬라어의 알파와 오메가와 같은 처음과 끝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말이기도 한데서 이 성경이 쓰여진 두 언어가 독특하다.



Ⅰ. 너 자신의 고백이냐 남의 말이냐(33~36)?

빌라도의 주님께 대한 심문은 시작에서부터 조금은 비아냥거리는 투로 묻다가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질문을 되받지만 이러한 응답이 어쩌면 오늘 우리의 믿음의 점검같이 들려서 첫번째 제목을 이렇게 잡은 것이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3) 마가복음에 보는 대로 빌라도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물음은 사실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한 표현이다.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막15:12)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다음 주에 보는 말씀에는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19:12b)라는 내용도 나타난다.

빌라도의 첫번째 질문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였는데 이것은 존경과 경의의 대상으로 묻는 것이기 보다는 유대인들과 더불어 화합하지 못하고 ‘너의 민족으로부터 고발을 당하는 너 같이 초라한 사람이 왕이란 말이냐?’는 투로 사뭇 조롱하듯 심문을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질문에 “그렇다!”거나 또는 “아니다!”라는 답변을 하시기 보다는 다시 되 물으시기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34)고 질문하신다.

먼저는 왜, 이렇게 물으시는가 하는 이해를 가지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빌라도는 계속 묻기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3) “내가 유대인이냐?”(35)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35)고 질문하고 예수님의 답변에 따라서는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37)고 묻기도 한다.

빌라도의 “내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은 물론 다분히 정치적인 질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이유에서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물으신 것인데 이렇게 정치적인 의도에서 유대인들의 왕이냐고 물었다면 당연히 예수님은 “아니다!” 라고 답하셨을 것이다.

유대군중이 벳새다의 언덕에서 기적을 떡을 얻어먹고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6:15)는 모습을 이미 봐 왔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는 것은 다윗의 왕조의 계보로 이 땅에 오실 메시야이신 이스라엘이 오랜 세월동안 기다려 온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냐고 묻는 것이었다면 거기에는 당연히 v37f의 말씀처럼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답변하셨을 것이다.

이제 여기에 대한 설명은 v36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세히 말씀하심을 볼 수 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이 질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34) 물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질문은 빌라도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다. 이것은 각자의 신앙의 고백으로 구원과 관련된 믿음의 고백으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면 대부분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또는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그리스도”나 “주님”이라는 고백은 그대로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주인 되시는 왕이라는 믿음의 고백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34)는 예수 그리스도의 물으심에 바른 답변을 드릴 수 있어야 하는데 믿음의 고백에 있어서는 반드시 “네가 스스로 하는 말” 즉, 고백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못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 되어서는 구원이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안된다. 즉, 부모님이 들려주시는 고백은 비록 자녀이지만 나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하면 생명에 있어서는 아무 가치를 갖지 못한다.

아내가 혹은 남편이 혹은 친구가 형제가 들려주는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왕”이라는 고백도 나 자신에게는 생명이 되지 못하고 이렇게 처음에는 전해들은 고백일지라도 그것이 최종적으로는 나 자신의 고백이 되어야 만한다.

이것은 우리 모든 믿음생활 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반드시 확인되어야 만 할 영적인 과제이다.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35) 영적인 접근을 하시려는 주님과는 너무나 다르게 로마의 관료 답게 사무적인 취조를 계속하고 있다.

“내가 유대인이냐?” 단순히 보면 범죄를 심문하는 자연스런 보습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 이렇게 묻는 것은 빌라도 나름대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나 측은하게 여기는 듯이 묻고 있다.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죽이라고 넘겼으니”라는 말투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이방인도 아닌 같은 동족이면서 그것도 종교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너를 나에게 죽여 달라고 넘길 수 있느냐?’ ‘도대체 네가 무엇을 했기에 이렇게까지 동족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느냐?’라는 표현이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묻는 것이다.

그럼에도 주님은 불손한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1:11)라고 기록한 대로 그들을 원망하시거나 맛장구를 치는 대신에 자신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니심을 친절히 설명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왕이긴 하지만 이 세상의 정치권력과 같은 세상의 통치자로서 왕이 아니심을 이렇게 설명하시는 것이다. 그 단적인 표현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6f)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것과 같은 세상의 왕이었음을 가정하시기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36m) 말씀하신다.

이 표현을 베드로가 칼로 대제사장 종 말고의 귀를 잘라 버릴 때 좀더 구체적으로 하신 말씀인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약12,000명)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26:53~54) 하신 것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를 좀더 분명히 확인하시는 내용이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6b) 하심에서 나타나고 있다.

또 이 말씀의 확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목표나 바램이 이 세상에 있지 않음을 가르치시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이 주님이요 그리스도요 왕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나 자신에게는 의미가 없고 우리 각자가 자신의 고백으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라고 고백하고 이 고백에 합당한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변화하는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니라 불변하는 진리의 나라임을 확인해 주시는 내용이 두번째로 생각할 내용이다.



Ⅱ. 진리에 속한 자만이 듣는다(37~38).

진리가 무엇인지 관심조차 없고 오로지 어떻게 해서 건 자신의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빌라도에게 우리 주님께서는 안타까움으로 자신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증거하시고 빌라도는 주님께서 강조하시는 그 진리에 대하여 묻지만 답변을 필요로 하지 않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에게 넘겨준 유대인들에게 다시 나아가 예수님으로부터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선언한다.

주님의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설명을 들은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37f)고 묻는 것은 앞에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3b)는 물음과는 다른 입장에서 물은 질문이었을 것이다. 일단 나름대로 자신의 통치에는 문제나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은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런 빌라도의 마음을 들여 다 보신 주님이셨기 때문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37fm) 답변하신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정통 왕의 계보인 다윗의 후손으로 올 것이 예언되었고 그 약속이 차서(갈4:4) 이 땅에 오신 분이시므로 이렇게 답변하시는 것이다.

나아가 주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약속과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오셨음을 증거하신다.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37m) 비록 이스라엘의 예언이나 언약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빌라도였지만 우리 주님은 차별없이 진리를 증거하고 계신다.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37b) 변하는 세상의 정치나 문화 사람들과는 다르게 변치 않는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시기 위해 오셨고 그 진리는 최종적으로는 모든 세상으로 듣게 하고 순종하게 하여 죄를 해결하고 변치 않는 진리로 이끄시기를 원하시지만 이 정치에 눈이 먼 사람이 이 생명의 말씀을 가려서 들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이미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선언 하심으로서 자신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진리요 그 진리에 이르는 길이며 생명이심을 증거하셨다. 그러므로 진리를 증거하심은 창조주 되시고 역사가 바뀌어도 바뀔 수 없으신 세상을 향한 사랑의 언약을 변치 않고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님의 증거에 대한 빌라도의 반응은 냉담한 것이었다.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38)고 기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시대의 권위있는 철학자들은 이상국가를 위해 철인정치를 주창하기도 하였지만 정치가들 대부분은 진리에는 별로 과심을 갖지 않는 모습이 빌라도뿐만 아니라 일반적이었던 것이 어찌 보면 역사 속의 정치가들이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38f)는 표현은 ‘진리 따위가 무슨 가치가 있느냐!’는 빈정거림으로 보여지는 이유는 답변을 듣지도 않고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38b)”는 행동에서 나타난다.

어쨌거나 여기까지는 빌라도가 양심적인 선언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는 고백적인 선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바른 판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석방해야 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유대지도자들의 반응은 여전히 싸늘하기 때문에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풀어주고자 하는 자신의 의사를 전례를 들어 타협하는 내용이 세번째의 메시지이다.



Ⅲ. 생명을 버리고 강도를 선택하는 안타까움(39~40)

종교가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면 이성으로도 판단이 불가능한 일을 하는 것은 어느 역사에서나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신앙인들의 삶의 과제이다.

빌라도가 보기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정치적인 어떤 역할을 하거나 로마에 대해서도 반란을 꾸밀 만한 사람이 아님을 직접 대화해본 결과로 알았다. 그럼에도 졸렬한 이 정치가는 자신의 소신을 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잃지 않기 위해서이다.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39)

공관복음에 보는 대로 유월절뿐만 아니라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더니”(마27:15, 막15:6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라고 기록되고 있다. 언제부터 인지는 기록에 없지만 이것도 총독이 백성들과 큰 마찰의 경우를 해경하는 방법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39b) 사실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31b)라고 이미 사형판결을 내려 줄 것을 결정하고 빌라도에게 끌고 온 예수 그리스도를 이런 전례를 들어 놓아주자고 하는 빌라도의 생각 자체가 이미 호소력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에게 합당하게 받아들여질 판결은 오로지 “십자가 형에 처한다!”라는 판결 뿐이었다.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40)는 이성을 잃은 외침도 사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 이미 사주된 것이었음을 마태가 이를 기록하고 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마27:20)

또 빌라도도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막15:10; 마27:18)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어떤 경우에 세상에서는 실제로 큰 소리가 이긴다.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눅23:23)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40)고 요한은 바라바를 [강도]라고만 단순히 기록하고 있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이 바라바야 말로 총독의 입장에서나 유대인들 입장에서도 그냥 놓아줘서는 안될 사람이었음을 마가나 누가가 기록하고 있다.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막15:7; 눅23:19)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40) 이것은 아이러니 중에 아이러니이다.

반란을 꾸미고 폭동을 일으키고 폭동 중에 사람까지 죽인 그야말로 로마 정부가 우려하는 인물이었지만 죄 없으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이심을 당하시기 위하여 이 사람이 놓임을 받는 것은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은혜로 우리가 죄에서 자유를 얻는 상징을 여기에서도 보는 것이다.

이 세상의 권력에는 전혀 관심도 없으시고 범죄나 혼란에는 전혀 관련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죽이기 위해 붙잡고 진정한 로마정부의 반역자이고 유대 사회에 큰 혼란을 일으키는 바라바를 놓아 달라는 백성들의 요구는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들에게도 로마 정부에도 결코 이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믿음 생활에 있어서 행동 그 자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즉, 왕으로 고백하는 데 있어서 남이 들려주는 것이 아닌 나 자신 스스로의 고백과 이유 이어야만 하나님 아버지와 관련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사람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리자체로서 진리를 증거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진리가 죄인을 자유 하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주님께 오는 자만이 이 진리를 듣고 순종할 수 있다고 비록 진리에 관심도 없고 진리를 들을 줄조차 모르는 빌라도에게 까지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바르게 깨어 있지 못하면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선택보다는 손해 되는 그것도 영원히 손해 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한번 우리 구세주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했다면 [물론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15:16b)] 어떤 혼란이나 유혹에서도 변함없이 주님편에 서서 생명과 영생을 변함없이 누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