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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8:15~18, 25~27 2021-03-28
나는 아니라,  
모든 기본이 무너져가는 현 시점에서 사람 간의 관계도 허물어져 가고 있음을 본다. 사실 창조주를 부정해 버린 세상이 편할 것 같지만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모든 관계의 출발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로 만들어진 것이 사람이기 때문에 시작이 비뚤어지면 그 다음은 말할 필요가 없이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빌2:15)가 되고 만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다음으로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무가치한 존재는 무엇인가? 그것도 사람일 것이다. 가장 귀하게 창조되었지만 창조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창조주께 찬양이 아니라 안타까움을 끼치는 존재라면 계절 따라 어김없는 역할을 다 하는 이 자연 세계보다도 못한 존재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 이런 극단적인 표현들을 하는가 하면 어찌 보면 오늘 우리가 다루는 본문의 베드로가 그 모형일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베드로는 무가치한 역할을 했던 성령 이전의 사람에서 성령의 사람이 되어서는 창조주요 구세주 이신 하나님께 가장 귀한 역할을 하였다는 데서 무가치에서 가치 있는 존재로 바뀐 사람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한다면 그런 변화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동산에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잡으러 온 군인들과 공회가 보낸 아랫사람들에게 오히려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시고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 할 때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나서시며 “내가 그니라!”(5, 6) 말씀하셨다.

이러한 반응에 물러가 땅에 엎드러지는 군인들에게 다시 “누구를 찾느냐?” 물으신 다음에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8)고 세 번씩이나 “내가 그니라!” 즉 내가 너희들이 지금 찾고 있는 그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부분을 이 장을 시작하면서 상고한 바 있다.

어쩌면 그것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오늘 베드로의 경우를 보는데 주님께서 “내가 그니라!” 하신 반면에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나는 아니라!”는 말과 함께 꽁무니를 빼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였고 그 베드로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이 아닌지 오늘 이 말씀과 더불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분의 신실성과 땅에서 난 사람의 초라한 모습을 비교해 보는 데서 하늘로부터 거듭나지 않은 세상 사람의 의지는 참으로 연약하기 이를 데 없음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표현하기를 “우리는 미쁨이 없을 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2:13) 하였고 적어도 NT에 “하나님은 미쁘시다”라는 표현이 10회이상 나타지만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존재임을 성경에서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이 표현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들의 역할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기를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고전3:5)고 증거하고 있다. 항상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을 믿게 하여 구원 얻게 하시려는 미쁘신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하나님의 일꾼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베드로의 나타나는 초라한 모습은 성령의 세례를 받기 이전이었고 또 성령을 받은 후에도 바울에게 책망을 들은 내용이 갈라디아서에 기록되고 있다.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자 그들과 함께 먹지 않은 척 외식을 한 사건이었다(갈2:11~13).

또 부인한 대상이 군인도 아니고 성인 남자도 아닌 소위 말하는 하녀 즉, 여종들의 물음에 이렇게까지 두려워한 것은 쉽게 납득하기 힘들지만 사람이 공포심을 가지면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에도 놀랄 수 있다는 데서 베드로의 상태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공포는 사실 외부적인 요소도 있지만 내면에서부터 임을 이해해야 하는 데서 믿음이 있고 없고는 대단히 큰 차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Ⅰ. 육신적으로는 주님과 더욱 가까이(15~16)

Peter, Simon 요즘도 영어권의 사람들에게 남자의 이름으로는 상당히 흔한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사실 이런 베드로의 유약함 보다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교회를 세우리라!”(마16:18) 하신 예수님의 약속이나 오순절 이후 교회를 세워가는 베드로의 모습 때문에 이런 이름들을 사용하는 것이지 오늘의 내용처럼 졸렬하고 허약한 베드로의 모습 때문에 그의 이름을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베드로의 유약한 모습은 땅에서 난 모든 사람들의 대표적인 모습이라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고, 나중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을 받은 후에는 자신을 죽이려고까지 하는 꼭 같은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 거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b)는 엄청난 용기는 하늘로부터 거듭난 사람의 변화를 그대로 보는 것이다.

오늘 읽은 첫 절에는 그래도 안타까움을 가지고 심문받으시는 예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베드로를 보게 된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15f) 여기서 베드로 외에 이름을 밝히지 않는 또 다른 제자 한사람을 소개하고 있지만 세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지 않아서 이 사람의 신상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복음서의 기록자인 요한이 자신의 기록에서는 자기 이름을 감추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고 공관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은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배어버린 사람이 베드로라고 하는 사실까지 정확히 말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제자였다면 반드시 이름을 밝혔을 것이라는 이해를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15m)는 부분이 ‘이 대제사장과 아는 제자가 갈릴리 어부출신인 요한이라면 어떻게 아는 관계인가?’라는 또 다른 의문을 가지게 되지만 구체적인 인맥이나 가문의 관계를 모르는 데서 오리려 그럴 가능성도 지나칠 수 없다.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15b) 연결되어지는 내용으로 동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아 묶은 체로 안나스에게 끌어가 예비적 심문을 받으시는 가운데 크게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인들은 돌아가고 안나스 집의 하속들이 뜰에 함께 모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16)

예수님을 따라서 대문을 지나서 뜰에 들어오는 데까지 한 제자가 대제사장과 알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지만 베드로는 따라 들어갈 수가 없었으므로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16b) 한 것으로 상황을 직접 본 요한 답게 자세히 기록하고 있음에서도 요한은 주님의 움직이심을 직접 본 사람으로 자신의 이름은 숨기고 있지만 모든 것들이 사실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제자로서의 역할을 다해보겠다는 인간적인 결심과 노력으로 주님을 가까이하려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단순히 육신이 가까이 있다고 꼭 가까운 것은 아니며 익숙치 못은 어색한 분위기와 이미 마음은 공포심으로 가득 차 있는 상황에서 문제는 발생되는 모습을 연이어 볼 수 있다.



Ⅱ. 베드로에게 불편한 장소(17~18)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된 것은 사실 절대로 계획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17f) 요즘 말로 엉겁결에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일어난 실수이지만 너무나 안타까운 사람의 유약성의 결과이다.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17b) 칼이나 창을 들고 위협을 하는 군인 앞에서도 아니고 아직 어린 티가 나는 “여종[παιδίσκη, 소녀, 하녀, 여성 노예나 종]”의 말에 이렇게 무너져 버린다.

그것도 제사장과 아는 제자의 부탁으로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가는 가운데 별로 엄중한 상황에서 물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 부인해 버린 데는 문제가 있다. 제자들과의 만찬 석상에서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13:37) 큰소리 치던 베드로의 장담이 어린 하녀 앞에서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베드로를 탓할 수 없는 것은 우리 역시 혈기나 인간적인 노력으로 신앙생활 하려 한다면 베드로 보다 못했으면 못했지 절대로 나을 수 없을 것이라는 짐작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능,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막13:11) 하신 약속은 장래에 성령의 능력으로 행할 때에 비로소 가능한 약속이셨다.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18) 생각치 못하게 문을 열어주는 어린 하녀 앞에 주님을 부인해 버리고 무슨 생각으로 불을 쬐고 있었을까 가 궁금하다. 아무래도 믿음과 확신이 사라져 버린 공포 속에서 육신으로도 더욱 추위(寒氣)를 느꼈을 것 같다.

누가복음의 같은 기록에서는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눅22:55) 아직도 기온이 찬 이유에서 추위를 면하기 위하여 종들은 불을 피워 두었고 그 불가에 함께 앉아서 다음의 진행되는 상황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삼 년 동안 따라다니며 어떤 때는 성미 급하게 설치다가 일을 그르치게 만든 일들도 있었고 그 수많은 기적과 자연을 움직이시고 치료하시고 수많은 군중들에게 기적의 떡을 먹이시던 지난 일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베드로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가운데 익숙치 못한 사람들과 불가에 어색하게 앉아 있는 베드로의 상황이 짐작이 된다.

어쩌면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며 천방지축으로 행하다가 책망을 받고 민망한 경험도 있었겠지만 어느 때보다 힘겹고 껄끄러운 상황이 바로 이때였을 것이다. 우리 역시 주님을 시인하지 못하고 용기를 잃고 얼른 지나가기를 바라는 상황이 가장 견디기 힘들 것인데 당시 베드로의 상황이 그런 입장이 아니었을까 짐작이 된다.

우리가 이런 불편한 상황에 있을 수도 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그것도 자격이 없으면서 주님을 심문하는 안나스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부정적으로 입에 올리는 사람들 가운데 있다보면 참 편치 못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 그럴지라도 주님을 믿고 따라 섬기는 사람이라면 불신에 맞장구를 칠 수 없고; 오히려 성령을 의지하면서 나의 삶 속에 오셔서 많은 것들을 생명으로 변화시키신 주님을 시인할 수 있다면 그런 곳에도 은혜를 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유약하게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는 계속해서 같은 상황을 만들어 갈 수도 있음을 다음의 주제에서 보게 된다. 긍정적인 상황은 계속 믿음으로 갈 수 있지만 부정적인 출발은 역시 부정으로 이끌려 갈 수 있다는 데서 이런 입장에서는 상황의 전환이 빠를수록 좋을 것이다.



Ⅲ. 증인의 말까지 부인하는 유약함(25~27)

앞에서는 문 열어 주는 하녀 앞에서 주님을 부인했지만 이번에는 함께 불가에 앉아있던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두 번씩이나 연거푸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13:38; 마26:34; 눅22:34) 하셨던 예언이 이 안타까운 상황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만다.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25) 이 때 이미 우리 주님은 심문을 받고 계셨고 불빛이 밝은 것도 아니고 불 피운 화로 가에서 이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모르지만 공관복음서에서는 마태나 마가는 첫번째와 두번째 질문한 사람이 모두 여종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마26:69~72; 막14:66~69).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25f) 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면서 안에서 심문을 받고 계시는 주님의 동태를 기웃거리고 있는 가운데 또 한사람이 앞의 여종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정한다는 생각에 깊은 생각을 갖지 않은 거처럼 쉽게 대답하고 만다.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25) 연이어 너무나 쉽게 나오는 이 답변에 오히려 의아할 정도이다. 부정이건 긍정도 그렇지만 한번 하고 나면 다음은 더 쉬울 수 있다.

또 다른 안타까움은 베드로의 부정적인 답변이 거듭 될수록 더 강하게 나갔던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는 내용도 복음서에 나타나고 있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마26:72; 막14:71)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산상보훈에서 이 맹세에 대한 경계를 분명히 주셨음에도 귀한 가르침을 이렇게 져버리는 것으로도 도리가 아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마5:33~36)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동산에서 있었던 사건을 봤던 사람이 나선다.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26)

함께 동산에 갔다가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을 보았는 데도 아니라고 변명하느냐?’는 그야말로 목격자로서의 증언이다. 그러나 이런 증언을 하는 사람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귀를 잘린 종을 곧바로 붙여 낫게 하신 은혜의 역사는 기억하고 있지 못하고 다만 부정적인 증인의 역할만 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안타깝기도 하다.

이런 분명한 증거를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여전히 거절해 버린다.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27m) 베드로의 세번째의 부인이다. 성경 속에서 삼이라는 숫자도 대개의 경우 확정이나 완전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곧 닭이 울더라”(27b) 사도 요한은 이 사실을 이렇게 간략하게 적고 있지만 공관복음에서는 새벽을 알리는 닭의 울음 소리가 베드로를 회개시키고 울게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26:75; 막14:72)

좀더 안타까운 이 상황을 누가는 전하기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22:61~62)고 기록하고 있다.

별로 깊은 생각없이 세 번씩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부인하였는데 안에서 심문받고 계시던 주님께서 홀연히 베드로를 쳐다보시는 것을 뵙고 베드로는 얼마나 미안하고 쑥스러웠을까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결국 베드로의 회개를 위하여 하나님은 닭의 자연적인 행동을 사용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보시는 것으로 베드로를 단속해 주시므로 베드로는 회개할 수 있었고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이 될 수 있다.

때로 우리가 믿는 사람으로서 주님을 부인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상황에 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닭 울음 소리같이 우리를 일깨우신다는 사실이다. 사실 회개도 우리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통회하는 마음 애통하는 심령을 주셔야 가능함을 듣는다.

어쨌든 주님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하심으로서 죄를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으므로 빛과 생명보다는 죄에 더 가까운 자신의 연약함을 탄식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승리할 것을 약속해 주셨다.

언젠가 예전에도 언급한 것으로 아는데 이 베드로의 주님을 부인한 이야기를 공관복음 중에 누가복음이 가장 분명하고 체계적인 기록으로 보인다고 말한 것으로 안다(22:54~62). ①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57) ②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58) ③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60) 고 점진적인 부정의 이야기로 기록하였다. 물론 이 요한복음은 3번다 ②째의 입장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의 도리를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막8:34; 눅9:23) 말씀하신 바 있다. 그러나 자기 부인도 이런 상황에서 해서는 옳지 않은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베드로는 자기를 부인하지 못해서 주님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살겠다고 주님을 죽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꼭 같은 사건의 기록이라도 은혜 주시는 대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의 주님께 대한 부인의 사실조차도 기록한 각자의 독특한 묘사를 통해서도 깨닫는 바가 다르고 감사가 된다.

나 자신이 부정되어 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비록 육신적으로 예수님을 가까이하려고 할지라도 결국은 주님을 부인하게 만들고 마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된다. 주님을 따르는 삶은 자신이 죽고 부정되고 주님으로 사시는 삶이 어야만 하는데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할 때 가능하다.

그것은 육신의 의지보다는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할 때 가능하게 될 것이다. 베드로처럼 자신이 시퍼렇게 살아 있다면 큰소리 치고 장담한다고 할지라도 낱낱이 실패하고 말 것이다.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권세자나 큰 힘을 가진 임금과 같은 대상 앞에서만 힘드는 것이 아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능력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당시의 어린 하녀 같은 사람들 앞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됨을 당당히 선언할 수 없다.

한번 부인하기 시작하면 쉽게 무너지고 진실한 증거조차도 인정치 못하는 초라하고 부끄러운 모습이 되고 말 것이다.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 주님을 부인하였다면 우리 같이 연약한 인생은 얼마나 더 쉬울까 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실수하고 범죄할수록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고 회개의 영이신 성령을 의지하여 즉시 회개하는 모범은 베드로에게서 배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