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요 18:12~14, 19~24 2021-03-21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로마정부는 정복된 나라들에 총독을 두고 통치를 하였지만 때로는 종교적으로나 민족주의적인 이유로 반란을 일으키는 나라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기도 했기 때문에 지배하고 있는 나라들의 종교지도자들을 타협해야만 했고 그런 이유에서 종교적 소요가 일어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이스라엘은 유일신 신앙으로 로마황제를 주라고 하는 것에 반감을 갖기도 했고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 사람이 모여들어 정치세력이 집결되는 것을 원치 않아서 그런 문제들 때문에 유대의 대제사장제도까지 평생직인 대제사장직을 바꿔가며 수행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유대의 종교세력은 산헤드린 공회를 중심으로 사두개인들로 구성된 제사장 그룹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적당히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가운에 역사에 등장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기존의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자신들의 분파가 약해질까 봐 전전긍긍하여 이런 이유에서는 로마정부와 함께 경계하며 협력하는 처지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에는 유대지도자들이나 로마정부가 함께 우려를 갖고 있는 형편에서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 한 세력의 확산을 막는 것에서는 로마정부와 협력하는 모양새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체포하는 모양에서나 대제사장들과 총독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는 모습에서도 이런 모양새들이 더러 보여지고 있고 성전을 장사터로 삼는다고 책망하고 돈 바꾸는 상을 둘러 엎으실 때 이를 갈고 있었던 안나스는 벼르던 분풀이를 주님께 하려는 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잡으면 먼저 자신에게 끌어올 것을 주문해 두고 있었던 것 같은 감을 오늘 내용에서 보게 된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주님께서(고후5:21) 불법의 세상 법정에서 심문 받으시는 모습을 통해서 진리를 가지신 주님의 자유와 의연하심을 우리 또한 배우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물론 오늘 다루는 내용 가운데 주님께서 예언하셨던 베드로의 예수님께 대한 부인 사실(15~18)이 기록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은 다음 주에 묶어서 상고하도록 하고 먼저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당하시는 심문을 오늘 다루고자 한다.



Ⅰ. 제사장들에게 끌려가심(12~14)

대제사장은 물론 인류의 완전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에 불과하기는 했지만 대제사장은 하나님께 백성들의 허물과 죄를 해결해주시는 참으로 귀중한 직책을 수행하는 하나님을 섬기는 율법이 명령한 특별한 직책이다.

기업이나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 자체를 자신들의 기업으로 삼고 사는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그야말로 성직(聖職)이라고 할 수 있는 지위였고 모세를 통해서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이후로 하나님과 주님의 백성들 간의 중보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귀중한 직책이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기름부음을 받고 수행하는 사람들로 중요한 3가지의 직책으로 전승되어 왔지만 이 대제사장직이 공식적인 직책으로는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직책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입장에서 왕이나 선지자는 결국 대제사장처럼 분명하게 남지는 못했다.

율법시대의 이 대제사장직은 어찌 보면 왕의 자리에 버금가는; 아니 왕조차도 대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었고 죄인의 판결이나 문둥병의 진단조차도 판별하는 것으로 볼 때 참으로 최고의 직책이었다.

대신에 이 대제사장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한다면 이런 중대한 일을 바르게 수행할 수 있었겠지만 조금이라도 경건하지 못하면 그 영향은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안타까움을 끼치고 하나님께는 욕을 돌릴 수도 있는 직위였다.

이사야의 시대에도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모두 타락하여 하나님을 안타깝게 할 때에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3) 탄식하셨다.

나중에는 오히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하시고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고 자신의 백성들에게 권면하셨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당시에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안나스나 가야바 모두가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자신들의 재산을 불리고 세력을 넓히기에 급급해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거룩한 성전을 장사터로 삼아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고 있다가 예수님께 호되게 책망을 받기도 했고 거기에 대한 감정이 오늘 내용에도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대로 경외하면서 행한대로 갚으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식하는 사람들은 이들처럼 권모술수를 부리지 않고 자신의 맡은 직책을 청지기로 알고 바르게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12) 처음부터 연결되는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인데 군대와 천부장이 주도하여 잡아 갔다면 군사적인 모습에서 다뤄져야 할 것임에도 과거의 대제사장이었던 사람에게 로 끌어가는 것 조차가 어울리지 않는다.

또 폭력이나 큰 정치범도 아닌 순순히 자신을 끌어가는 것에 대항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제자들의 안위를 부탁하는 평화주의자이셨던 주님을 묶은 상태로 연행할 이유도 없었을 것임에도 마치 살인강도를 채포해가는 것처럼 묶어서 끌어 가시는 부끄러움은 순전히 나와 여러분 그리고 온 인류의 수치를 대신 당하시는 것이다.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13) 여기에 대한 이유나 근거를 충분히 볼 수는 없지만 과거에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를 나중 사도행전에서는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행4:6)라는 표현으로 보면 당시 종교적 실세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성전을 장사터로 이용하여 이를 챙긴 것도 적어도 대제사장 가문이 모두 참여하였고 여기 안나스가 그 우두머리 격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2:13~16의 예수님의 성전 청결에 대한 불만의 보복을 위해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어갔다고 보는 것에 무리가 없다.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는 것으로 봐서 겉으로는 사위를 대제사장으로 세워 두고 뒤에서는 [수렴청정-垂簾聽政] 앞에 둔 사람들을 움직여서 자신의 세력을 넓히고 돈을 모으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일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14) 그러나 안나스가 어떤 심문을 한다고 해도 실권자가 아니기 때문에 다시 당시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 로 보내지는데 이 가야바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11:50) 헛소리 같은 말을 예언으로 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데 내주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우리가 의롭고 선한 일에 마음과 힘을 모으는 것이 이런 이유에서 중요하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 하나님을 등 뒤에 돌려 두고 자신들의 권력이나 이권을 챙기는 일에 하나가 되어 그런 이름으로 역사에 길이길이 남은 사람들로 기록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Ⅱ. 감출 필요가 없는 진리(19~21)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예비 심문이 시작되었지만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대로 어떤 교훈이든지 군중들 가운데서 하셨지 어떤 말씀도 특별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감추거나 몰래 하신 말씀이 없으심을 증거하신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19) 이 심문자에 대해 조금은 혼란이 생긴다. 주님을 안나스에게 끌고 갔는데 대제사장의 심문을 말한 다음에 V24에서는 다시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대로는 예수님을 심문하는 사람이 대제사장이라고 했지만 안나스에게 끌고는 갔다 하였고 대제사장직을 가졌던 사람들은 계속해서 같은 명칭으로 불러지는 것을 앞에서 인용한 사도행전4:6에서도 본 바 있다.

그러므로 물론 최종적인 사법적 판단은 로마의 총독에게 있었겠지만 안나스의 심문은 사법적인 힘은 없고 예비적인 심문을 한 것으로 자신의 권한에 도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 과신이라고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주님께 질문한 것은 두가지였다.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 단순히 이 내용만으로는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지만 나중 공관복음에서 가야바가 묻는 내용과는 성격이 다름을 볼 수 있다.

안나스는 주로 예수의 하신 일들에 관한 질문으로 제자들의 성격과 가르치신 교훈에 대해 물었지만 가야바는 여러 거짓증인들이 와서 증언하는 것과 함께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주로 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26:63b)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막14:61b)라는 것이었고 예수께서 그렇다고 답변하시자 옷을 찢고 사형에 해당하다고 말했다.

아주 점잔을 빼고 앉아 자신을 향해 심문하는 안나스에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20) 사실적인 진리의 성격을 증거하는 것으로 답변하신다.

“진리[ἀλήθεια, ← ἀ(부정)+λήϑω=λανϑάνω(숨기다) ἀληθής]”와 같은 어근을 볼 때 진리는 ‘숨기다’의 반대 개념으로 ‘들어내는, 폭로하는’ 같은 일반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말씀드린 바 있다.

14:6에서 선언하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 자체가 숨길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님을 볼 때 안나스에게 말씀하신 내용 역시 너무나 사실적이고 자연적인 주님의 행하신 모습이었다.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20f) 복음은 생명의 능력이기 때문에 쉬쉬해야만 할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큰소리칠만 한 복되고 아름다운 것으로 모든 사람들이 이 복을 누리게 하시려고 드러내 놓고 세상에 선포하셨다고 증거하신다.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20m) 하나님께서 인류에 구원의 메시야를 보내시기 위하여 먼저 택함을 받은 유대인 즉, 이스라엘이 먼저 그 복음의 혜택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다른 곳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그들이 모여 예배하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쉼없이 기회를 만들어 가르치셨던 것은 주님의 택한 민족에 대한 안타까움이셨을 것이다.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20) 때로 비록 제자들에게 비유의 의미를 따로 풀어 가르치긴 하셨어도 그것은 모든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훈련시키시는 제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었지 역시 몰래 하신 것은 아니셨던 것이 사실이다.

언제나 은밀한 가르침이 문제를 만든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교리를 가르치는 곳이라면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이들은 진리를 위장하지만 결국은 그들의 열매가 드러나고 말 것이다.

모든 가르침이 이미 공개된 객관화된 사실이기 때문에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불러서 여쭐 필요도 없이 들은 사람들에게 편견이나 치우침이 없는 사람이라면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말해 줄 것이라고 덧붙이시는 말씀이 바로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21) 하신 것이다.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1:16) 자랑할 만한 생명의 약속이라고 증거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라면 들은 대로 말할 것이므로 진실을 알고자 한다면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더 분명할 것이라는 주님의 증거는 충분히 호소력이 있는 증언이셨다.

그러나 이미 뒤틀린 생각을 가지고 주님을 문책하는 그들에게 이러한 사실이 호소력 있게 들릴 리가 없었던 것 같다. 권력이 있으면 그 권력을 힘입어 출세하고자 하는 간신배들은 어디에나 또 있기 마련인 것을 이어지는 말씀에서 보게 된다.



Ⅲ. 대제사장의 경배를 받으시는 분(22~24)

대제사장에게 아부하려는 아랫사람의 말에 제사와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권위를 분명하게 선언하신다. 안나스가 물어서 대답하셨고 과장되거나 반항적인 답변이 아니었음에도 어리석은 이 아랫사람은 창조주요 구세주 이신 주님께 손찌검까지 하면서 안나스에게 아부를 하고 있다.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22f) 유대 랍비의 법이나 로마법에서도 죄가 증명되지 않은 사람을 구타하는 것은 법률적으로도 금기시하는 행동이라고 한다. 하물며 바른 눈을 뜨지 못한 이 가련한 인생은 범죄하고 사람들을 속이는 이 과거의 대제사장을 두둔하고 의로우신 주님을 매질하는 엄청난 실수를 범하고 있다.

우리 또한 어떤 이념에 붙잡히게 되면 오히려 범죄집단을 두둔하고 편들 수도 있다는 데서 영적인 바른 통찰력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거기에 대한 상당한 대가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경고가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1:7)이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말보다는 손이 먼저 나가는 사람은 실제적으로 그 인품에 문제가 있고 이것은 비록 어린아이에게 일지라도 좋지 않은 행동일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께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것을 보면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인품의 사람은 아닌 성싶다.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22b) 자기들 보기에나 대제사장이지 주님께서 그 속을 들여다보실 때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위인에 불과한 사람이지만 겉에 걸친 모습으로 판단하는 이 사람은 진정으로 위해야 할 대상을 볼 수 없는 육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께 이런 맹랑한 대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옳지 못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경고를 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23)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항을 묶어 놓고 심문하는 대제사장 집단의 옳지 못한 행동을 말씀하신 우리 주님께 오히려 불량한 그런 사람에게 항의하시는 것은 결코 그 상황을 벗어나시려는 주님의 의도가 아니시지만 의로우신 주님께서 진리를 거스르는 거짓된 것을 참아 보실 수 없으셨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비슷한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그 주님의 사도였던 바울의 대항하는 자세를 비교해 보는 것도 분명히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22~23장에서 마게도니아와 아가야에서 유대인들을 위한 연보를 거두어 예루살렘에 왔다가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의 소요로 잡히게 되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바울 사도도 비슷한 경험을 하는 것을 비교해 보는 것이다.

자신의 여태까지의 상황을 그대로 말하며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하는 바울을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행23:2)

여기에 바울은 오늘 주님보다 강한 대응을 한다.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행23:3)

바울이 이렇게 말하자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행23:4)는 항의를 받는다. 그러자 바울은 출애굽기22:28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행23:5)고 즉각 사과를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의 반응과 자세는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과 율법을 비롯한 모든 것을 친히 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자신을 섬겨야 당연한 대제사장에게 사과할 필요가 없었지만 바울은 그 창조주의 종이요 일꾼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주님의 만드신 질서에 순복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24) 안나스는 보다 실제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자신의 사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는 것으로 역할의 한계를 보이고 있다.

평화의 왕이요 의의 왕이시며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로지 나(우리)를 위하여 불법의 심문을 받기 위해 묶인 체로 끌려가셨다. 이것이 또 세상이다. 오늘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하나님의 일꾼들도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으로 인하여 이런 어려움을 당한다면 역시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마5:11~12).

진리와 생명은 감추어야 할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자랑할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이를 누릴 수 있도록 나타내고 증거해야 할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삶의 자세요 과제임을 심문받으시면서도 나타내시는 주님께로부터 배운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순종과 섬김을 드려야 할 하나님과 그 주님께서 주신 말씀의 법에 복종해야 할 자세도 본다. 바울처럼, 불합리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법이라면 그대로 순복하는 피조물로서 구세주와 조물주 되시는 하나님과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겸손을 배운다. 이런 자세로 섬길 때 질서는 바로 서고 복음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효력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