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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8:1~11 2021-03-14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이제까지의 교훈과 이적의 역사들은 사실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주신 메시야 이심을 증거하는 증거였다면 이제 이 18~19장이야말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대속제물로 유월절 양으로 오신 절정이다.

그런 입장에서 이 대속의 십자가로 나아기시는 주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던 요한사도처럼 이 일을 위하여 이 때에 오신 주님의 구속의 역사를 좀더 가까이 그리고 우리 각자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고 이해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오늘부터 상고하게 되는 18:1~19:16까지는 십자가에 이르시기까지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공관복음의 저자들과는 또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고 또 공관복음에서 빠뜨린 부분을 보충하는 데서도 1세기 말엽에 마지막으로 쓰여진 이 요한복음의 진면목을 보게 될 것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시기까지도 로마 정부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해진 많은 사형수들이 있었을 것이다. 국가에 반역이든 사회질서의 파괴의 죄를 졌던 가장 처참한 십자가형에 처해졌던 많은 죄인들과는 우리 주님의 모습은 너무나 달랐다. 때문에 공관복음에서 보는 대로는 사형을 집행한 백부장조차도 감동하여 주님께 대한 신앙을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27:54; 막15:39) 고백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친히 생명을 가지시고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10:18)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확신하게 된다.

주님께서 이미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막13:11) 가르치신 바 있지만 십자가로 걸음걸음 다가가시는 우리 주님의 당하시는 모든 상황을 받아드리는 자세에서도 우리 각자의 같은 입장에 처할 때의 모범이며 귀감이다.

특히 오늘 내용은 산헤드린 공회의 하수인들과 대제사장들의 보낸 군인들에게 자신을 당당하게 밝히시는 모습에서도 분명 일반 사람이 아니심을 보게 된다.



Ⅰ. 잡히실 것을 아시면서도(1~3)

하나님 아버지께 이미 자신이 당해야 할 예정된 일을 아시기 때문에 자신과 제자들과 우리들을 위해 기도로 맡기시고 친히 죽음을 향해 걸어가신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1)

어쩌면 3년동안이나 가르치시고 훈련하실 뿐만 아니라 돈궤를 맡기시기까지 하신 가룟 유다의 배신을 맞으러 가시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 유다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는 것 조차도 우리 일반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생각할 때는 견디기 힘드는 경우였을 것이다.

주님의 이제껏 가르침이나 행동은 맑고 거룩한 빛이셨다면 이 “기드론, Κεδρών(탁한, 흐린)” 시내를 건너시는 것 자체가 압살롬이라는 아들의 반란으로 앞길이 어찌될 줄 모르고 울면서 이 기드론 시내를 건넜던 다윗의 역사처럼(삼하15:23) 어두움을 대하시는 의미가 되기도 하다. 분명치 못한 흐린 기드론을 건너시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1) 이것은 십자가에 죽으심을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아직도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 나선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마태나 마가는 이곳을 “겟세마네”(마26:36; 막14:32) 하였고 누가는 “감람산”(눅22:39)이라 기록하고 있다.

항상 주님과 함께 하였던 요한사도는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2)고 설명함으로써 닥칠 어려움이나 죽음으로부터 전혀 피하시지 않으시려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세를 상황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오늘 우리 자신들이 만약에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야 하는 번지점프 같은 것을 오락으로 한다고 해도 두려워하여 시간을 지연시키고 심한 경우는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혹시 잘못되어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심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주님은 조금도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이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시기 때문이다.

특히 공관복음에서는 이 동산에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제자 셋을 데리고 들어가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세 제자 중에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은 이 요한사도 뿐이라는 데서도 가룟 유다의 나타남을 좀더 사실적인 사건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2f) 제자들과 가끔 오시는 곳으로 누가는 “습관을 따라”(눅22:39) 라는 표현으로 이곳에 모여 기도했던 곳으로 표현하고 있고 이 날도 역시 늘 행하던 대로 이 곳에 들어온 것으로 제자들은 생각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다만 가끔 습관을 따라오는 장소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파는 가룟 유다도 그곳에 예수께서 그 시간 즈음에 계실 것이라는 추측으로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곧장 그곳으로 올 수 있었음을 요한은 기록하고 있다.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2b)

기도하시는 신앙의 행위를 위한 장소를 이렇게 악용하는 것은 당시의 사두개인들이나 제사장들이 성전을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기 위한 장사터로 악용하는 사악함을 상황과 장소는 다르지만 마귀가 들어간 가룟 유다도 역시 다르지 않음을 보게 된다.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3) 한 사람을 잡으러 오는데 군대도 부족하여 산헤드린 공회의 경비대까지 동원하여 나타난 가룟 유다의 배신은 주님의 능력을 항상 봐왔던 계산된 생각 때문일 수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하나님의 계획된 구원의 과정이 아니셨다면 세상의 군대를 다 동원한다고 해도 잡히지 않으실 수도 있었고[19:11,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평상시 전혀 무장을 하지 않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잡는데 무기를 동원하는 것은 물론 공관복음에서 보는 대로는 “칼과 몽치”(마26:47; 막14:43)를 들고 나타났다.

너무나 이 사실이 안타까우셨던 주님께서 오히려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마26:55; 막14:48; 눅22:52)라고 안타까워하신다.

어두움의 세력은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무력적(武力的)이고 진리를 말살하려는 데까지 물리적인 방법까지도 동원하는 것은 긍휼과 용서나 사랑이 없는 마귀 사탄의 속성 그대로이고 이렇게 어두움의 세력에 잡힌 자들은 그들의 이런 폭력성에서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비무장으로 항상 기도하러 가시는 곳에 군대와 무장 세력을 동원해서 실수없이 예수님을 잡겠다는 어두움의 하수인이 되어 나타난 가룟 유다의 참담한 모습은 언제나 세상 속에 있는 바른 신앙을 지키려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할 수 있는 안타까움 일 수도 있다.



Ⅱ. 내가 그니라(4~8)

그 때나 지금이나 범죄한 사람을 채포하려 하면 ‘나는 아니라’거나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라고 변명하고 행한 모든 범죄의 증거들을 다 찾아 내놓을 때에 서야 시인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나 쉽게 자신을 시인하시고 오히려 주변에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보내줄 것은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죽으실 것까지도 너무나 분명히 아시고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면 피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 오늘의 제목과도 같은 자세이셨다.

그런 이유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막14:36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눅22:42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라고 기도하셨다.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4f) 우리 주님은 창세전부터 정해 놓으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너무나 분명히 아셨기 때문에 그 당할 일을 아심에도 주저하지 않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적극적이셨다.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4b) 자신을 잡으러 온 군인들이 제자들과 함께 계신 주님을 보고 물을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잡으러 온 그들에게 먼저 물으셨다.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5f) 주님께서 먼저 물으심에 대하여 저들도 자신들의 목적을 분명히 밝히는 것으로 답변한다.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별명 중에 하나인 “나사렛 예수”는 예수님을 비웃는 표현이었던 것 같다. 물론 “다윗의 자손 예수”라는 메시야의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셨다.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5m) 앞에서 언급한 대로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할 수만 있으면 현장에서 모면하고 도망치기 위하여 손사래를 치고 도망할 수도 있지만 우리 주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지실 죄인으로서 모면하실 수가 없으셨다.

그리고 여기에 붙여지는 말이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5b)라고 기록되고 있지만 공관복음에서는 가룟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분이라고 확인해 주기 위해서 “입을 맞추니”(마26:49; 막14:45) 하였고 안타까우셨던 주님께서 “…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눅22:48) 라고 탄식하셨다.

이러한 주님의 권위에 위압당한 군인들이 오히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6)는 표현을 본다.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은 이제껏 자신들이 범죄자들을 채포하러 다녔지만 이런 반응을 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잡혀가야 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엎드러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잡으러 왔던 군인들이 엎드러지는 이상한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신 주님께서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7) 이라는 반복된 모습을 보게 된다.

주님께서 자신은 이렇게 변명없이 잡아가도록 말씀하셨지만 여기서도 역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의 안전를 위하여 자신을 잡으러 온 군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본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8)

주님께서는 이미 10:11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는 선언을 하신 바 있다. 그 말씀이 절대로 말에 그치지 않는 참 목자이심을 여기서도 나타내시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제자들의 육신의 안전을 보장하는 데서 끝나지 않으신다.

죽음의 어두움은 자신이 직접 감당하시고 그 희생을 통해서 모든 죄의 하수인들을 놓아주시려는 사랑을 나타내시는 모습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더욱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2:14~15)

여기 무려 세 번씩이나 “내가 그니라”는 말씀을 반복하심으로써 요한사도는 인류의 죄를 지시고 대속을 이루실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과 충성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모든 죄를 지실 분이 누구인가를 물을 때 “내가 그니라” 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들에게 뿐만 아니라 대적 원수들에게도 확실히 선언하시는 것이다.

자신을 채포하기 위해서 왔던 군인들에게 “내가 그니라!” 선언하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인하여 탄식하며 “내 죄의 비극을 해결해 주실 분이 누구입니까?” 안타까워할 때에도 “내가 그니라!” 답변하실 것이다.

질병으로 소망을 잃고 “참으로 나를 치료해줄 수 있는 이가 누구입니까?” 탄식하는 사람에게도 “내가 그니라!” 답변하시고 인생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갈팡질팡하는 사람이 “어떻게 해야 인생의 맛을 찾고 의미를 바로 알게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탄식할 때도 “내가 그니라!” 답변하실 것이다.

모든 비극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구세주이신 주님으로부터 “내가 그니라!”는 응답을 누리는…



Ⅲ.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9~11)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8b)라는 기도 속에서의 말씀의 성취와 함께 베드로의 급한 성격이 나타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사명을 다시 선언하시는 부분이 오늘 마지막 부분이다.

사도 요한은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8b)라는 목자로서 자신의 양을 잃지 않으시려는 주님의 배려가 바로 아버지께 마지막 드린 제사장적 기도의 성취라고 해설하고 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9) 바로 앞에서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17:12) 라고 아버지와 언약했던 기도를 응하게 하신 것이라고 증거하는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 심지어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에서 까지도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최선을 다하시는 주님을 계속적으로 보게 될 것이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19:28)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19:36)

이렇게 철저한 주님의 말씀의 성취를 위한 희생과 충성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어울리지 않는 일이 베드로를 통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히려 꾸짖으시고 회복시키시는 일까지 하심을 보게 된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10) 제한된 이스라엘만을 위한 복음증거를 위한 제자들의 자세에서는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마10:9~10; 막6:8~9; 눅9:3) 가르치셨던 주님께서 자신이 구속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남겨두고 가실 아직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모한 제자들에게 약간은 다른 교훈을 주신 바 있다.

이것은 오직 누가복음서 만이 기록되 있는 내용으로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눅22:36) 말씀 하시자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눅22:38)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두 절의 사이에는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눅22:37)라는 메시야 예언의 절정인 이사야53:12의 말씀의 인용이다.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라…”는 말씀이 인용되고 있지만 인용된 앞뒤의 말씀은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고 오히려 자기 희생에 관한 내용이다.

베드로의 이 갑작스러운 행동은 누가복음22:38에 언급된 두개의 칼 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나타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붙여 낫게 하시면서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26:52)는 유명한 말씀을 주신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말씀은 물론 바로 다음절의 첫 부분과 같은 내용임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11f) 물론 공관복음에서는 말고라는 대제사장의 종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

오늘 말씀의 가장 귀중한 내용은 마지막절 하반절의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1b)라는 결연하신 주님의 고백의 말씀이다. “잔을 받아 마시다”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속담과 같은 교훈으로 어떤 일이나 과제를 반드시 감당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주님께서 제자들 과의 대화에서도 나타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마태복음20:20~28(어머니)과 마가복음10:35~45(본인들)의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예수께서 영광 중에 오르시면 자신들을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는 요청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20: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막10:38)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1b)시는 말씀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 들려야 한다는 말씀과 함께 잠시 기도하셨던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12:27) 라는 의미와 다르지 않은 하나님 아버지의 인류구원에 예정된 수순을 순종하심의 고백이다.

우리가 바른 신앙의 사람이라면 역시 우리 앞에 무슨 일이 주어지든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1b)라는 고백을 주님처럼 드릴 수 있어야할 것이다. 이것 역시 사람마다 꼭 같지는 안겠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면 그것이 행복한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힘겹고 감당하기 어려운 것일지라도 주님처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1b)시는 자세로 성령을 의지할 때 능히 감당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자리가 비록 죽음의 자리일지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마다하지 않으신 것은 바로 나(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기 위해 가셨다면 이런 일을 행하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또한 예수 그리스도처럼 묵묵히 순종할 때 나에게 구원의 되고 또 다른 사람을 구원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위한 대속 제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잡으러 온 군인들과 배신하는 가룟 유다 앞에서도 자신이 그들이 찾는 사람이라고 당당히 “내가 그니라!” 말씀하셨다. 오늘 주님의 사랑을 인하여 나를 세상에 보내실 때도 진리가 배척당하고 절망하고 식상한 세상 사람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을 때 이제 “내가 그니라!”는 당당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진리를 순종하고 믿음으로 사는…

하나님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는 약속을 주신이상 어떤 형편을 허락하실 지라도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1b)는 결연한 의지로 주어진 믿음의 삶을 감당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