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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0:11~21 2020-07-26
나는 선한 목자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밖에 없는 문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주님의 증거를 따라 증거했다면 그보다 더 중요하고 가까운 하나님의 양무리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시고 친히 이끄시는 양의 목자로서의 주님의 증언을 듣게 된다.

본문에서 두번씩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선한 목자라!”(11, 14) 선언하시는 말씀을 듣는다. 그리고 왜 자신이 선한 목자인지를 친히 증거하시는 데 중요한 것은 이 선언에 따라 사역을 감당하셨고 이 약속을 지키셨자는 사실에서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한 목자이심을 확인할 수 있다.

세상의 많은 지도자들은 대개의 경우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약속을 했다가도 어려운 입장이나 형편에서 그것을 번복하거나 어기는 경우를 우리는 정치 세계 속에서 너무나 자주 보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의 목자 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약속하시고 그 약속에 자신이 먼저 메이시는 진실한 목자이시다.

많은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은 ‘왜, 지속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느냐?’ 물으면 예수 그리스도는 약속을 말씀하시고 그것을 지키시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데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주님은 그의 양 된 백성들에게 한번도 약속을 어기신 적이 없으시다.

오늘 우리를 이끄는 세상의 지도자들이 그렇게 해 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만은 사람은 자신의 약속에 그렇게 철저하지 못한 것은 사람이라는 한계를 가지기 때문에 사실 지킬 수 있는 약속만을 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어떤 때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약속을 하기도 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더욱 감사하고 감격하는 것은 사실 세상에는 그런 지도자가 없기 때문이다. 이왕에 우리 스스로는 연약하여 계획된 일조차도 때로는 감당하지 못하지만 각자의 인생 속에 영원한 언약을 세워주시고 그것을 어기지 않고 지키시는 우리의 영원하신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실패하지 않는 인생들이 되시기를…



Ⅰ. 선한 목자와 삯꾼의 차이, (11~13)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첫번째로는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를 비교하는 내용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1) 선한 목자는 착한 목자 정도가 아니다. 이것은 많은 이론이 필요하지 않다. 결국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희생까지 가능할 때 비로소 선한 목자라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다윗은 사울 왕 앞에 인도되어 “너 같은 어린 사람이 어려서부터 전쟁터에서 뼈가 굵은 블레셋의 장수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때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삼상17:34~35)라는 고백을 한다.

이것은 한 마디로 목숨 바쳐 놓고 양을 보호했다는 사실적인 경험이고 이러한 다윗이었기 때문 그러한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하면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는 목자 되신 하나님을 또한 찬양하며 고백으로 시를 썼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치는 상대적이지 않은 절대적인 기준이다. 그런 이유에서 선한 목자는 착한 목자정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있는 가장 귀한 생명까지 줄 수 있어야 비로소 선한 목자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1)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에 어그러짐이 없이 하나님의 양들인 그의 백성들을 죄에서 사 주시기 위하여 친히 목숨을 버리셨다. 이러한 희생과 사랑때문에 그의 양 된 백성들은 그 사랑에 잡혀서 그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고용된 삯꾼은 이런 자신의 양의 주인인 선한 목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선한 목자는 양이 중심이지만 삯꾼은 자신의 이익과 생명이 먼저이다.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12) 이런 내용을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는 단순히 품삯을 주고 고용된 목자이기 때문에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13) 한 것처럼 위기가 오면 선한 목자는 양의 생명이 우선인 반면에 삯꾼은 자신의 생명이 우선이다. 자신의 생명보다 그분의 양인 우리의 생명을 우선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로 모시고 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Ⅱ. 선한 목자와 양과 주인과의 교제, (14~16)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이미 양의 문이시라 말씀하신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목자와 양의 교제는 단순한 소통이 아닌 것처럼 서로는 너무나 잘 아는 관계임을 말씀하신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14) 그러므로 선한 목자는 무엇보다도 양과의 긴밀한 교통의 관계임을 두번째로 말씀하신다.

더 쉽게 표현하면 서로의 마음까지도 너무나 깊이 나눌 수 있는 관계임을 증거하신다. 그러한 표현이 “나는 내 양을 알고” 하셨고 거기에서 일방적이지 않은 “양도 나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양쪽의 교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15f) 즉 양과 양의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와도 같은 소통을 가진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깊은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와 갖는 사람이라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을 요한 사도는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1:3)고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심 같이 우리가 서로 지체를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관계여야 함을 배운다.

그런 관계이기 때문에 비로소 그러한 양을 위하여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5b) 고백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와 깊은 사귐의 관계를 가지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이러한 참 목자의 마음은 이미 양 우리에 들어와 있는 자신의 양만으로 만족하지 않으신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6)

아직도 이 깊은 사랑의 관계에 들어와 있지 못한 우리 밖의 자신의 양이 남아 있는데 그들에게도 마음을 두고 계시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16f) 넓은 범위에서 보면 육신적인 이스라엘 즉,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혈육의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닌 이방인들과 시간까지도 세상 끝날까지 자신의 양을 찾고 계심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자신의 양들은 다른 어떤 사람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있게 될 양들이다.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6b) 이 아직 사랑의 우리에 함께 하지 못한 주님의 양들을 찾기 위해서 전도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주심으로 자신의 양들을 사자와 곰같이 양을 삼키려 하는 사탄의 세력에서 구원하셨고 그 희생은 당시의 주님의 양들뿐만 아니라 이 역사가 닫힐 때까지 그 희생을 힘입어 우리에 들어오는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을 위한 것임을 증거하신다.



Ⅲ. 선한 목자의 권위, (17~18)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어쩌면 선한 목자 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양들을 위하여 기꺼이 생명을 주실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생명을 버리고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실 수 있는 영원의 권위 때문에 가능했음을 세번째로 증거하신다.

만약에 생명을 얻어 살고 빌려서 살아서 빼앗길 수 있는 상태였다면 이러한 선하신 마음과 사랑에도 불구하고 양들을 위하여 생명을 주실 수 없었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리고 이러한 권위는 하나님 아버지와 이 권위를 나누실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바로 전에 아버지와 다시 의논하심을 17장에서 볼 수 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24~26)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17) 예수 그리스도의 양들을 위한 생명의 대속은 사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이미 사람의 범죄를 아시고 구속을 계획하고 계셨지만 아담이 범죄한 후에 이를 선포하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여기 여자의 후손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이심은 갈라디아서4:4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다. 이 사실을 바울은 빌리보서2장에서 확인해 주고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은 당연히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셨고 다시 생명을 되돌려주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를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 뿐만 아니라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17b)” 고백하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모두의 모범이시다.

이러한 은혜와 사랑의 역사의 내용을 다시 확인하시는 내용이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18)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의 양들을 위한 희생은 절대로 아버지 하나님의 압력이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자의적인 행동이셨음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18f)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너무나 자연스러운 교통의 모습을 여기에서 엿보게 되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같은 자녀라면 당연히 억지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런 성부와 성자의 관계처럼 자연스러워야만 할 것이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18b)

특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시는 말씀속에서 “계명”은 “사명”으로 이해함이 더 쉬운 이유는 하나님이시면서 인류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을 아버지로부터 감당해야할 사명으로 인식하고 기꺼이 감당하신 것이다.

위에서 두번째 항목으로 나누었던 교통(communication)은 바로 이런 입장에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류의 죄로부터 구원은 성부, 성자, 성령 서로의 신뢰와 의지의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한 사랑의 역사였던 것이다.

서로의 신뢰가 부족한 인간 관계 속에서 어떤 일을 함께 하는 것이 어려운 것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역사에는 깊은 신뢰와 함께 서로의 뜻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맡김으로써 죄의 사람들이 빛을 누리게 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Ⅳ. 구별(나눔)의 이유가 된 진리, (19~21)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이러한 아름다운 생명과 구원의 신비를 나눔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19)라는 내용으로 봐서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역시 양편으로 나눠 짐을 본다. 각각 다른 이해를 한 사람들에게 다른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 같은 말씀을 주셨고 들었는데도 이런 다른 결과를 나타냄도 신비라고 볼 수 있다.

태초부터 하나님의 말씀은 빛과 어두움을 나눴고 어느 장소 어느 때든지 말씀이 선포되는 데는 이렇게 나눔의 역사가 있기 마련이다. 오늘 말씀에 경청하는 여러분들은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긍정하는 사람들이라는 데도 감사할 근거가 된다. 왜냐하면 부정적으로 나눠지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긍정의 사람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20)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말씀에 다수의 더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것은 지금이나 그때나 다르지 않다. 꼭 같이 하나님의 생명의 교훈을 들었음에도 다수의 사람들은 빈정거리고 조롱하는 것이 이 죄악 된 세대의 일반적인 반응이다.

특히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이란 표현은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해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표현이었음을 이미 7:20, 8:48 앞에서도 봐왔다. 침례자 요한에게도 먹고 마시지 않는다는 절제된 삶의 이유로 귀신들렸다고 하였다. (마11:18; 눅7:33)

그렇지만 하나님의 아들을 향한 이런 평가는 자신들이 오히려 귀신의 통제를 받는 사실을 반증하는 표현일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의 주님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어둠의 세력에 사로잡힌 귀신의 하수인들의 반응일 것이기 때문이다.

또 예수님께서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이미 무서운 심판을 선언을 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막3:28~30)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런 표현은 용서받지 못할 성령모독 죄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같이 주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21)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었음을 고백함을 보는데 주님의 표현대로 들을 귀를 가진 하늘의 백성의 모습이다.

이렇게 나누어짐은 언제나 있을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알곡과 타작마당의 나눔이 있을 것인데 이것은 주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심에서 부터 예언된 사실이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12)

586:1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편에 설건가, 주가 주신 새 목표가 우리 앞에 보이니,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리라.

오늘 COVID-19와 불경기와 모든 것이 막혀 있는 어렵고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우리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 주신 생명의 목자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것으로 감사가 넘칠 수 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