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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9:24~34 2020-07-05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이 부분에서 중요한 중심은 시각장애자였던 사람과 바리새인들의 신앙의 논쟁인데 비록 바리새인들은 그를 정죄하지만 이 사람은 너무나 논리 정연한 진리를 어렵지 않게 그들에게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다음 시간에는 비로소 주님께서 이 시각장애자였던 사람을 만나 격려하는 부분을 나누게 될 것이다.

각자가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들어서 아는 신앙의 차이도 이부분에서 볼 수 있다. 자신이 주님의 사랑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판단에 개의치 않고 평안과 생명을 누리지만 전해듣기만 한 단순한 지식적 믿음이 오히려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도 이 대화에서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다른 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복음 속에 산다고 하면서 복음의 역사나 진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여전히 모세의 제자로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정죄하고 판단하는 율법적인 바리새인으로 살 수 있는 위험성도 이 말씀은 경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힘입어 죄인이 의인 되는 하나님의 역사는 복음 속에 분명히 드러나지만 죄인과 의인의 간격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인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는 본문의 바리새인들과 이 눈 띄움을 받고 주님편에 서서 말하지만 정죄 받을 수 있는 안타까움을 겪을 수도 있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천국시민이라고 하지만 결국 이러한 부분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 것인가 사람들의 판단에 휘둘릴 것인가 스스로 바른 선택이 필요하다.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의식하며 행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당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억울해할 필요가 없지만 바른 천국백성의 삶을 감당하지 못해서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두려워해야 할 신앙인의 모습이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종교지도자들의 일방적인 종교와 사회의 제도권 아래에서 이 맹인이었던 사람은 육신으로는 아직 한번도 예수 그리스도를 본적이 없지만 너무나 자신 있게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변호하고 있는 모습은 같은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우리가 본 받아야할 신앙적 자세이다.

오늘 같은 믿음으로 인한 불이익이 분명한데 이런 권력으로 우리 자신들을 위협하고 협박한다면 과연 나는 이 사람만큼이나 자신 있게 주님을 증거할 수 있을까 스스로를 돌아보았으면 한다.

차이는 단 한가지라고 여겨진다. 시각장애자로 난 자신이 눈을 떠서 천지를 분명히 보게 된 경험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기죽지 않고 자신을 새롭게 해 주신 주님을 증거할 수 있었다면 우리 각자 또한 나의 인생에서 주님때문에 “한 가지 아는 것”이 분명하다면 같은 확신과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인데 그 한가지는 나에게 무엇인가!



Ⅰ. 신앙의 확신은 경험에서, (24~25)

의심으로만 접근하던 바리새인들은 그의 부모를 통해서 이 사람의 형편을 듣고자 했지만 당시의 유대지도자들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강압적인 분위기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려는 이 사람의 부모의 반응으로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들의 불신이 옳음을 입증하지 못하자 이들은 이 시각장애자였던 사람을 다시 부른다.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24f)

그들의 첫번째 주문은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24m)는 것이었다. 표현은 이렇지만 그 의도하는 말투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라는 명령이었다. 믿음의 사람들은 되어지는 모든 좋은 일들을 하나님의 역사로 받아 드리는 것은 옳지만 이런 경우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24m)는 표현은 마치 자신들이 마음에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을 증언하라는 또 다른 협박이다. 뒤따라오는 표현인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24b)는 저들의 판단을 볼 때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다.

앞에서는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17m)고 은근히 이 사람의 속마음을 떠보려 했지만 이 때에도 “선지자니이다.”라고 답변했었다. 바리새인들의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24b)는 표현이야 말로 오히려 적반하장(賊反荷杖)격이라고 해야 할 것이고 옳지 못한 사람들이 옳은 사람들을 향하여 정죄하는 것은 주님때로부터 아마 이 역사의 마지막까지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바리새인과는 다르게 이 시각장애자였던 사람은 오히려 의연하게 주님을 증거한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25f) ‘당신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뭐라하든지 분명한 것 한가지가 있다.’는 표현이다.

오늘 우리 또한 신앙하면서 최소한 이런 한가지 확신은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경험한 것이야 말로 가장 든든한 신앙의 버팀목이 될 것이다. 특히 이와 같이 다른 사람들이 나를 흔든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놓지 않을 이유가 된다. 나에게는 이런 고백이 있는가!

그 한가지 아는 것이 바로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25b) 라는 고백이다. 믿음의 사람뿐만 아니라 신앙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익숙한 찬송이 305장이다. 1절의 두번째 소절이 우리 찬송에는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번역되고 있지만 본래 본 저자인 John Newton이 쓴 내용은 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I was blind, but now I see 로 [나는 맹인이었었는데 지금은 보게 되었다]라는 의미로 이 요한복음 9장의 의미를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여러분 모두 이런 감격으로 이 찬송을 부르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과거 죄악으로 인하여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었다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씻김을 받았다는 실로암의 경험과 고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른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라면 이 시각장애자였던 사람과 같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25b) 라는 고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오늘 이 사실을 확인하는 우리 모두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25b) 라는 고백을 자신의 것으로 드리는 …



Ⅱ. 누구의 제자인가! (26~29)

이 내용을 보면 상당히 재미난 마치 주객이 전도된 서로의 반응을 보게 된다. 초기 예루살렘에 교회가 탄생하고 복음이 확산되는 것을 보면서 종교지도자들이 사도들에게 요구했던 내용과도 비슷한 모양을 볼 수 있다.

사도행전3장을 보면 베드로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고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을 걷게 한 것과 함께 많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복음에 관심을 보이자 사도들을 때리고 위협하면서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협박하지만 오히려 당당하게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라고 말하는 사도들의 논쟁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이 시각장애자였던 사람의 확신에 찬 고백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믿지 못하고 거절하려 애쓰고 있으면서도 이 사람의 너무나 분명한 경험의 고백이 궁금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26) 이미 v15에서나 부모에게 물었던 사실을 다시 묻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던지 여기에 대한 답변이 이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던 것 같다.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27f) 이 사람은 어떤 계산이나 생각없이 단순하게 그들의 반응에 대해 말하는 것이었지만 이미 여러가지 계산을 깔고 말하고 있는 이 바리새인들이 오히려 살짝 놀라는 반응이다.

거기다가 결정적으로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은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27b)라는 말이었다. 이 말에는 맹인이었던 자신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 있고 ‘나는 그분이 무엇을 명령하든지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실 저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저들의 모습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마23:2)라고 경계하신 바 있다. 그들은 사실이야 어떠하든 모세의 역할을 자신들이 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 그리고 서기관들은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들은 물론 이 사람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12:3)는 모세의 모습은 확실히 본받지 못했던 것 같다.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28) 저들의 이러한 반응은 사뭇 급하고 분노한 모습이었을 것 같다.

우리가 세번째로 나눌 내용과 연결되는 내용이지만 이 바리새인들의 말은 사실 신앙의 무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저들 상태의 사실적인 고백이 되고 만다.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29)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29f) 이 고백은 너무나 일반화되고 별로 믿음이 필요 없는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다. 이것은 무슬림들도 자신들의 사용하는 경전이고 세상 사람들의 법의 기초로 사용되는 율법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한 마디 속에 말하고 있지만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29b)는 어리석음은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 비극의 고백이다. 이 말에는 자신들에게는 영생이나 생명을 갖지 못했다는 고백이 되기 때문이다.

이 요한복음을 통해서 계속 강조되는 중요한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복음과 내가 어떻게 관계가 되는가 이다. 내용은 결코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다. 누구든지 이 종교지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29b)고 주님을 부인한다면 생명을 갖지 못한 사람이다.

모든 성경은 바로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말하고 있는 내용을 다른 성경이나 이 요한복음 도처에서 볼 수 있지만 대표적인 내용이 17:3의 말씀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 말씀과 오늘 이 종교지도자들이 시각장애자였던 사람에게 말하고 있는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29b)는 내용은 정확하게 정반대의 고백이다.

오늘도 여전히 모세의 제자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가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과제인 것은 이것은 적어도 영생과 직결된 고백이 되기 때문이다.



Ⅲ. 신앙의 바른 스승, (30~34)

이 마지막 부분이야 말로 이 맹인이었던 사람의 자신이 경험한 복음의 위력을 증거하는 절정(絶頂)이다. 사실 어디서 이런 용기와 신앙적 논리가 나오는지 바리새인들도 놀랐을 것 같다. 이 또한 사도들의 당한 대우와 다르지 않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행4:13)

바리새인들이 신앙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29b)고 말하자 이 사람은 그들의 지위나 일의 성격상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된다는 말을 하고 있다. “…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30)

자신에게 이루어진 이 엄청난 사실이 있음에도 그들은 거기에 대해 정확한 신앙적 답을 줬어야 함에도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29b)는 무책임한 대응을 이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다. 다른 이론은 다 놔 두고 부모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속에 해 줄 수 없었던 능력의 역사에 적어도 종교지도자들은 답변을 줬어야 함에도 오히려 자신보다도 이해를 못하는 것에 대한 실망과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마음에서 저들에게 이제는 오히려 신앙적 논리를 가르치기까지 한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31) 이 말씀은 오늘도 여전히 진리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시편을 비롯하여 성경에 흔하게 나타나는 믿음의 교훈이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시34:15)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66:18)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잠15:29) 그러나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죄인의 기도하 있긴 있다. 그것은 진심으로 회개하는 기도는 들으신다. 사실 바리새인들이 이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강한 펀치를 한 대 맞은 샘이다.

그러나 이 시각장애자였던 사람의 가르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32) 지난 번에 인용했든 대로 이것은 OT의 구원역사 속에 사실이다.

이제는 좀더 적극적인 증거를 하기 시작한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33) 바리새인들은 어디로부터 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사람은 자신 있게 그 주님의 출처를 선언하고 나선다.

사실 이름뿐인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체험한 사람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런 가르침을 받는 이 어리석은 어두움의 종들은 자신들의 부족함을 회개하고 겸손해야 했음에도 오히려 분노하고 정죄하려 드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 내어 보내니라”(34) 바리새인들도 처음 예수님의 제자들이 물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라 역시 당시의 일반 사회에 널리 통하는 개념으로 이 사람을 정죄하고 나선다.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이것은 세상에 탄생하는 모든 사람들의 입장이긴 하지만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판단이나 생각은 성경의 바탕에서 가르치는 논리가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즉, 그 사람이 자신이건 부모의 죄 때문에 시각장애자로 났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가르치느냐!” 가르치는 선생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역설적이게도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특히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가르치려 할 때는 더욱 견디기 어려워하는 것이 사실이다. 자신들의 생각으로는 죄가운데 즉, 죄 때문에 맹인으로 났다고 생각하는 이 사람이 자신들을 가르치려 든다고 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분파와 가르치는 지도자들을 구분하는 고린도교회의 병폐를 지적하면서 오히려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고전14:31)고 권고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라고 당부함을 듣는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피차 서로 가르침에 열려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신앙인으로서 옳지 않은 것이다. 우리 각자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서로를 권면하며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열린 마음이 되어 있어야 한다.

“…이에 쫓아 내어 보내니라”(34b) “쫓아 내어 보내다[ἐκβάλω, 내쫓다, 쫓아버리다]” 라는 것은 단순한 눈 앞에서 쫓아 내는 의미도 있지만 앞에 v22 같은 경우를 볼 때 유대교에서 출교를 시켰다는 표현으로 이해된다. 결국 이 사람은 소경으로 있을 때는 종교인들의 모양을 위해서라도 동정과 보호를 받았었지만 그리스도를 향하여 영육의 눈을 뜬 것으로 이들의 보호를 잃게 되었다.

어쨌거나 여기에서도 표면적으로 신앙의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증거하는 이 사람이 정죄 받고 적대시 되는 것을 본다. 우리 주님께서는 山上寶訓에서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1~12)고 진리를 순종하는 것으로 인해 핍박받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있다.

바울은 이 시각장애자였던 사람과 같은 “내가 … 한 가지 아는 것은”이라는 표현을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고 고백하고 있다. 오늘 나는 누가 무어라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날 수 없는 다른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나만이 아는 한가지 신앙을 든든하게 지탱할 주님의 역사를 경험한 것이 있는가!

오늘 우리가 비록 부족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것은 각자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니, 우리의 생애 중에 주님께서 오시기까지 끊임없이 주님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신앙을 지도하도록 세워주신 대상에서도 배우지만 우리는 서로 간에 피차 배우도록 이 교회라는 주님의 공동체를 주셨음을 확신하고 감사합시다.

늘 바로 배우고 깨달을 때 우리는 이 바리새인들처럼 남을 정죄하고 욕하기 보다는 복음을 나누고 전하는 생명의 도구로 더욱 다듬어져 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