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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모자라는 무엇이든지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셔서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채우시는 놀라운 역사를 지난 시간에 나누었다. 우리 각자의 삶에 모자라는 것들은 무엇이든지 주님의 손에 들려드린다면 늘 풍성히 채워 넉넉하게 하시는 놀라우신 사랑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주의 기적은 주님을 좇는 수많은 군중들을 향한 사랑의 역사였다면 오늘의 내용은 그를 따르며 섬기는 제자들의 위기와 고통에 처해있는 형편을 해결해 주시는 조금은 사적인 표적이고 五餠二魚의 기적이 우리의 일상적인 필요에 관한 것이었다면 오늘 본문이 다루고 있는 표적은 주님께서 친히 모든 자연을 다스리시고 운행하시는 창조주이심을 나타내는 놀라운 이적이면서 그러한 주님 앞에서 우리의 어떤 위기나 절망이 회복될 수 밖에 없음을 확신하게 되는 주님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오늘의 내용이 마가복음 6:45~52과 요한복음 6:16~21에 함께 기록되고 있지만 28~31절의 베드로 사도가 물위를 걸었다는 기록은 이 마태복음 뿐이다.
Ⅰ.메시야와 그를 따라 일하는 자들의 자세.(22~23)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함께 이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요한 복음에 보면 기적의 떡을 배불리 먹은 군중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 삼으려고 야단들이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6:15) 먹고 살기 어려웠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기적을 보면서 자신들의 먹고 살 문제를 해결해 줄 분이심을 확신하고 이런 육신적인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주님은 자신의 역할에 대한 귀한 가르침을 계속 군중들에게 베푸시는 것을 요한 복음 6장에서 길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군중들의 인기를 조금도 허용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러한 유혹을 피해서 제자들마저도 먼저 건너편으로 가도록 하고 홀로 어두운 산상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시기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뵙게 된다. 요즘 시대에도 같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일꾼들이라면 역시 반드시 따라야 할 자세를 배운다. 영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사람들의 인기에 휘말려 신령한 것은 뒷전이 되고 그 인기를 누리기에 급급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일꾼을 신령하게 사용하실 수 없으실 것이다. 최고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면서도 오히려 그것이 믿음을 무너뜨릴 가능성이 있다면 그런 유혹으로부터도 자유 하는 여러분 모두가 …
Ⅱ.주를 떠나서는 한 순간도 평안할 수 없는 제자들의 모습을 본다.(24~27)
(24)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25)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27)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예수의 제자들의 대부분이 바로 이 갈릴리 출신의 어부들이고 그런 입장에서 제자들은 이 갈릴리의 형세를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잘 아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주님을 홀로 남겨두고 밤바다를 건너는 이 제자들의 모습은 어린아이들처럼 위태롭기만 하고, 5천명이 넘는 사람을 기적으로 먹이시던 그 권능의 주님은 바람 속에 고난 당하면서 잊은 지 오랜 것 같다.
그리고 오늘 날 어줍잖게 신앙하는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평안할 때야 누구든 기뻐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산다고 하는 진가는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 나타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는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는 수치를 드러내곤 하는 경우가 많다.
오늘 제자들이나 베드로의 믿음이 흔들린 것은 바로 [바람] 앞에서 임을 복음서의 기자들은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다. 우리가 어두운 역사 속의 인생 항해와 인생의 바람를 괴롭게 노 저으면 건너면서 의외로 이 [바람]을 만나는 경우가 대단히 흔하고, 어떤 바람이든지 바람으로 인하여 비틀거리는 것은 너무 흔한 경우이다.
짝 사랑하는 사람과 일방적으로 약속을 하고 그 사람이 나타나지 않은 것을 가리켜 ‘바람 맞았다.’ 고 하고 뇌졸증으로 건강을 일케 되는 경우도 중풍(中風)을 맞았다고 표현한다. 그런가 하면 유행이라는 것도 불다가 그치는 풍랑일 수도 있다. 이렇게 인생의 큰 고통을 대개 바람을 맞은 것으로 표현하곤 하는 데 야고보의 가르침을 보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6~8) 흔들리는 인생은 바람에 요동하는 물결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바람으로 일렁이는 파도는 물의 표면을 계속 변형시키면서 두들기고 쏟아지고 부딪히는 모든 것들을 부숴버리는 것이 일반이다. 그러나 그 바람을 이기는 방법도 의외로 간단하다. 배를 크게 지어서 띄우면 웬만한 바람에는 흔들림이 없다.
우리는 제자들의 모습을 좀더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는 것은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다.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25) 당시 로마인들의 시간 계산 방식으로 대략 새벽 3~6경의 시간이다. 밤새껏 풍랑 속에 노를 젓던 제자들은 새벽녘에 고난 속에 찾아 오시는 주님을 뵙지만 이미 그들의 눈은 고난을 견디는 것으로 인하여 피곤해질 대로 피곤하여 지쳐있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마태는 그들의 모습을 기록하기를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26) 이라고 묘사한다.
바다 위를 걷는다는 것 자체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행동이었고 5천명을 기적의 떡으로 먹이시는 주님 이시라면 왜 그것이 불가능하겠는가 만은 이미 지친 제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조차도 바로 볼 수 없었고 이것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경계가 되는 이유는 우리가 아무리 고난을 당해도 주님을 몰라보면 안된다는 경계이다. 힘겨운 인생의 항해를 끝내고 주님을 만날 때 같은 경계를 가져야 할 것이다.
죄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은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평탄한 인생은 거의 없다. 세상이라는 고난의 바다에 인생의 노를 젓는 우리 모두에게 때로는 예상치 못하는 풍랑으로 비틀거리고 쓰러지고 고통스러울 때가 있지만, 그런 순간에 나를 찾아 오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비극이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을 신앙생활 한다고 해놓고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주님을 부인해 버리는 안타까운 일들도 있다.
특히 여기 “…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했는데 여기 [유령]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유령, (헬, 판타스마, phantasma, 허깨비, 환영)←(헬, 판타조, phantazo, 생각하다, 보이게 하다.) ]에서 온 말이다. 결국 유령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착각으로 보는 것이다. 결국 제자들이 놀라 소리지른 것은 자신들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어두움과 공포로 인한 착각 때문이었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고요한 음성으로 그러나 뚜렷하게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27)고 일러 주신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시다. 고난 당하는 자신들을 찾아 오시는 주님을 향하여 유령이라고 소리지르는 꼴을 보면 우리 같으면 얄미워 하겠는데도 주님은 따스한 위로의 음성을 들려 주신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반응에 치우치심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분이시다. 할렐루야!
우리 모든 인류는 마귀 사탄의 헛된 속임 수에 바람맞고[선악과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창3:4~5) 헛된 일들을 하며 결코 자신들에게는 좋은 일을 할 수 없는 비참한 존재들이었지만, 그러한 우리를 위하여 주님은 이 세상이라는 무서운 죄의 풍랑의 바다위로 오셔서 우리가 저주 받아야 마땅할 저주를 십자가에서 대신 감당하시고 이제는 그를 순종하는 자들의 고난과 절망의 장소에, 마음에 오셔서 같은 음성을 들려주고 계신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얼마나 감사한지 모를 일이다. 오늘도 주님을 믿으면서도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는가? 이 위로와 소망의 음성을 다 듣는 저와 여러분 …
Ⅲ.성급한 베드로의 덤벙대는 믿음에도 붙들어 주시는 주님을 본다.(28~31)
(28)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29)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는 위로의 음성을 듣자 말자 베드로는 “…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베드로의 급하고 대담한 일면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다. 나중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이 갈릴리에 그들을 찾아 오셨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요21:7) 이러한 조금은 즉흥적인 요구에도 불구하고 “오라!”고 그것을 허락하시는 주님은 역시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확신케 한다.
아직도 풍랑 이는 바다 위를 주님만을 바라보며 물위를 걷는 베드로의 흥분된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그러나 급하고 즉흥적인 그의 믿음의 눈은 이내 파도 속에서도 조용히 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바다를 요동 치게 하는 바람으로 옮겨가고 감격과 흥분은 다시 두려움과 혼란으로 물 속으로 빠져갔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30f) 갈릴리에서 잔뼈가 자라고 이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왔던 그에게 사실 이런 일은 예전에도 흔한 일이었을 것이고 수영도 잘 할 수 있었을 것임에도 주님 앞에서 이런 연약함을 보이고 있는 것은 그 원인이 “바람을 보고 무서워” 했기 때문이라는 마태의 기록이 조금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자신이 가장 자신 있다고 큰소리 치고 자랑하는 부분이 어떤 경우에는 가장 약한 부분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믿음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믿음의 사람들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고난 당할 때 고난의 파도가 넘실대는 그곳에는 주님도 와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거친 풍랑을 바라보는 것 보다 주님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여기에서도 역시 그의 천성적인 기질을 발휘하여 주님을 부른다.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어떤 잘못이든지 실 수이든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실수와 약함을 그대로 가지고 주님께 구원을 요청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방법이다.
우리 주님은 다시 한번 베드로의 기도를 들어 응답하신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31) 같은 풍랑 속에서도 주님의 손에 이끌릴 때 베드로는 비로소 구원을 받았고 은혜를 입었다. 다만 그렇게 허약한 베드로에게 따끔한 충고를 주신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이 주님의 책망에는 우리가 세상의 폭풍과 파도 속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를 일러주고 계시는 주님의 당부의 말씀이 함께 담겨져 있다고 확신한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바람에 혼란하고 갈팡질팡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즉, 우리 인생을 책임 지시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적은 연고이고, 그 영원한 약속을 의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백성들이 약속에 흔들림이 없다면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든지, 우리 각자가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든지 주님은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분명한 약속을 주셨고, 이것은 이 세상과 우리 개인의 인생 속에서 요동치는 어떤 바람이나 물의 요동에 관계없이 유효한 언약이기 때문이다. 이 분명한 약속을 믿으시는 저와 여러분 …
Ⅳ.이적을 통해 주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고백한다.(32~33)
(32)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또 하나의 시련의 역사는 그 의심하던 제자들에게 더 큰 확신으로 열매를 맺는다. 어두운 밤에 주님의 명령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뒤에 남겨두고 갈릴리를 건너고 있었고, 그 명령하신 길이지만 제자들에게 닥친 늘 있는 갈릴리의 풍랑, 그것은 그 시간 속에서는 괴로움이었고 부끄러움이었지만 오히려 이 풍랑 때문에 주님께 대한 확신은 더 커짐을 보게 된다.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32) 주님께서 배에 가까이 까지 오셨을 때에도 바람은 여전하였고 힘겨웠지만 주님께서 배에 함께 오르셨을 때 비로소 풍랑은 그치고 평안이 모두를 다스리게 된다. 어떤 경우는 주님께서 함께 타고 가는 배에서도 풍랑을 만나기도 하는 모습을 이미 우리는 8:23~24에서 상고한 바 있다.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고백하고 이 거친 인생을 항해하는 그리스도인 개인이나, 주님 함께 하는 구원의 방주라고 하는 [배]인 교회도 때로 바람과 풍랑을 만날 수 있지만 그러한 어려움을 주님과 함께 감당한다면 그 풍랑을 거친 후에는 주님의 더 큰 영광과 위엄으로 결과하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몰라도 그 배에 함께 했던 사람들은 구원의 주님의 역사를 인하여 확실한 신앙의 고백을 드릴 수 있게 되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33)
우리 모두가 이 풍랑 많은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우리와 늘 함께 하시고 우리의 역경 속에서 불러 주기를 기대하고 계시는 주님과 함께 한다면 매 순간 풍랑의 말미에 마다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라는 고백을 드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의 결론과 같으면서 주님의 이적과 사랑의 역사의 한 부분을 정리하는 내용인 마지막 34~36절을 생각하면서 오늘 말씀을 정리하고자 한다. “저희가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그 곳 사람들이 예수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다만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비록 풍랑을 만나 고난을 겪긴 했지만 군중들이 아닌 제자들만의 배에서 있었던 체험은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더욱 깊은 믿음을 끼쳤고 이제 주님께서 명령하신대로 건너편에 이르렀고 질병과 불편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 스스로 뿐만 아니라 같은 병을 가진 사람들에게까지 기별해서 그들을 예수 앞으로 나오게 하고 그들의 믿음의 형태대로 주님께 요청하여 나음을 얻고 기뻐하는 은혜의 역사가 지속된다.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 각자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여러가지의 바람들을 경험했을 것이다. 격동의 세월을 수없이 거쳤는가 하면 가까이는 IMF 라는 고난의 바람도 있었다. 또 어느새 우리 마음을 도적질해가는 유행의 바람도 각 개인이 경험했을 것이다. 이런 일들은 주님의 제자들이 갈릴리에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흔한 풍랑과 같은 것들이지만 그런 고난 속에서 오히려 주님을 가까이 만나고 체험하여 지금까지 믿음을 키워 오게 되었다.
또 앞으로 어떤 거센 격량의 물결이 이 시대와 개인을 거쳐갈지 모르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런 거친 바람 속에서도 주님은 그의 사람들을 그저 버려두지 않으시고 찾으시고 함께 하시고 위로하신다는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다. 주님은 그와 상관없는 사람들은 풍랑을 만나도 관여치 않으신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를 누리기 위해서 첫째로 해야 할 일은 주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제자들이나 베드로가 위기와 절망을 만났을 때 찾아 주시고 역사하신 이유는 다른 것은 없다. 다만 그의 일꾼이라는 사실과 그의 백성이라는 한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분명한 그의 백성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홀로 죄인 된 인생의 풍랑을 만나면 감당할 수 없지만 십자가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자신을 제물 삼으신 주님의 은혜를 믿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 사함 받아 우리의 인생항해에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타게 하여 어떤 풍랑 속에서도 늘 고요와 평화를 회복하는 저와 여러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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