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전반기 사역의 시작이 그를 증거 하던 세례요한이 옥에 갇히면서 시작되(4:12)었고 이미 8~9장에서도 그리스도의 이적과 치유의 역사들이 기록된 바 있었다. 공교롭게도 메시야의 갈릴리 전도의 후반기 사역이면서 두 번째 표적과 치유의 역사들이 기록되는 서두에 세례요한의 죽음의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두 번째 표적의 기록들이 15장까지 마무리되고 16장부터는 죽은 세례요한처럼 메시야의 대속의 죽음을 향한 수난이 예고 되고 있다.
이 세례요한의 죽음의 이유와 배경이 구약의 엘리야와 시돈 왕국의 공주였다가 아합과 결혼한 이세벨의 배경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왕상18~19:3) 특히 이 본문 속에서 권모술수로 권력을 지탱해 가는 헤롯이 세례요한을 선지자로 존경하믐 양심의 소리와, 허영과 욕망으로 동생의 아내를 빼앗고 그 여인의 간악한 요구 때문에 삶의 중심이 없는 헤롯왕의 양심을 던져버린 연약한 죄성의 인간성과, 자신의 영광과 쾌락을 가로막는 의로운 세례요한의 죽일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간교하고 도덕성을 잃어버린 욕정에 사로잡힌 헤로디아 라는 간악한 여인, 그리고 그 어미를 빼닮은 무서운 십대라고 할 수 있는 살로메라는 이성 없는 女兒靑年, 이런 세상의 권력과 부요를 억지로 누리면서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과 잔인성은 마치 밀림의 수탈자인 맹수의 어미와 새끼를 보는 것 같은 섬짓함마져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사명에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세례요한도 소수이긴 하지만 있을 어느 시대나 보게 된다.
헤롯 집안은 성경의 역사와 함께 수없이 언급되고 그 악명 만큼이나 음란하고 간교한 집안으로 예수께서도 “여우”(눅13:32) 라고 비유할만하다. 그 부친 헤롯 대왕은 예수의 탄생을 전해 듣고 자신의 권좌를 잃을까 봐 베들레헴의 2살 이하의 유아(乳兒)들을 참혹하게 학살 한 것에서 보더라도 무서운 권력욕에 사로잡힌 권력의 노예였었고, 그 아들인 이 헤롯 안티파스는 그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아라비아의 아레다 왕의 딸과 혼인을 하지만 얼마 후 다시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빼앗아 부부생활을 시작하자 첫 아내는 자기 모국으로 도망을 가는 바람에 아레다 왕과 원수가 되고 국가간에 싸움이 시작되고 바로 이 요한을 죽인 후에 전쟁에서 크게 지자 그것이 세례 요한을 죽인 벌을 받은 것이라고 유대인들은 생각했다고 역사가 요세푸스는 전하고 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마가복음 6:14~29절에 좀더 자세히 기록을 하고 있고, 누가는 이 내용을 불과 석 절에 간략하게 언급을 하고 있다.
여기서는 결국 인물 중심으로 말씀을 이해해가야 할 것 같은데 1세기의 헤롯 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의 도덕적으로 헤이 해진 모습이 현재에 재현되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기까지 하다.
결국 사람이 바른 인간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지으신 창조주의 만드신 법칙에 따라 살고 움직여야 함을 이 사건을 보면서 더욱 실감하는 것 같다. 우리는 요즘 생활과학의 발달로 엄청난 종류의 전자 제품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일상적인 삶에서도 깊은 교훈을 얻는 것은, 각각의 전자 제품들을 사게 되면 반드시 Manual(사용설명서)이 함께 따라오고 그 기계를 쓰고 관리하고 보존하는 모든 원리가 거기에 적혀 있고 그 지시에 따라 사용하는 이상은 별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과, 그렇게 매뉴얼을 따라 사용하다가 만약에 고장이 나면 무료로 수리를 받거나 교환을 받을 수 있지만 그 사용설명서를 무시하고 무리한 사용을 하거나 할 경우에는 무상 수리도 안되고 교환해 주지도 않는 것을 본다. 뿐만 아니라 복잡한 기계일수록 이 사용설명서도 두꺼운 것이 일반적인 사실이다.
이러한 원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도 꼭 같다고 이해가 되는데 그럼 사람을 바르게 사용하는 Manual은 무엇인가? 바로 성경이다. 사람은 영육의 복합체이기 때문에 그 사용설명서인 성경은 두꺼울 수 밖에 없고 조금은 복잡하게 보이고 특이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사용함에 있어서 이 창조주 하나님의 사용설명서를 따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이다. 이 헤롯과 헤로디아, 살로메 같은 사람들은 인간 사용 매뉴얼을 전혀 참고하지 않고 무리하게 자신들의 삶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Ⅰ.권력의 노예 헤롯.(1~2, 3, 5, 7, 9~10) 주로 오늘 본문에 언급되고 있는 내용은 헤롯의 모습에 집중되고 있다.
①영혼의 소리 양심의 소리를 무시했다. 첫 부분에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헤롯이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 전혀 무지한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때에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하더라”(1~2) 당시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 중에 사두개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 헤롯은 자신이 죽인 요한이 살아났다는 것으로 예수를 생각하는 것으로 봐서 영적인 부분에 감각이 전혀 없는 사람은 아니었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도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눅23:8)는 기록을 봐도 영혼이 전혀 마비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믿음에 자신을 맡기지 못하는 비겁자였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막6:20)는 자세도 상당히 진지한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감정을 짓눌러버리는 자세는 자신을 살리는 대신 존경의 대상조차 죽이는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귀신도 믿고 떠는 믿음이라고 야고보는 경고하고 있다.(약2:19)
②여자에 의해서 조종당하는 하수인과 같았다.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3) 사실 요한을 옥에 가둔 것은 자신의 의지이기 보다는 헤로디아의 성화 때문이었다.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막6:19) 아무도 자신들의 불륜을 감히 지적하지 못하고 있는데 세례요한만이 그것을 책망하는 것에 대해서 없앨 기회를 엿보며 헤롯을 부추겼던 것이다. 마치 엘리야를 죽이라고 아합을 부추기는 이세벨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본다.
③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민중을 두려워 했다. 이것은 사실 모든 정치가들이 가져야만 할 자세이다.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민중이 저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민중을 두려워하더니”(5) 그러나 그보다 더 두려워 해야 하는 것은 권력을 부여해 주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바른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빌라도는 군중의 소리에 양심을 팔아 버려서 역사 속에 비극의 주인공으로 남아있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요19:12)]
바른 정치는 백성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롬13:1) 바른 권력은 절대적인 법(성경)으로부터 나온다.-중세]는 사실을 인식하면 당연히 백성을 섬기고 바른 정치를 베풀 수 있음에도 헤롯은 여기에 대해서도 하나님 아닌 사람만을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이다.
④지킬 수 없는 맹세의 사람이다.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 허락하거늘”(7) “또 맹세하되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막6:23) 결국 허풍이 강한 사람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런 안타까운 일을 겪고 있는 것이다. 맹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금하신 것이고 믿음이 가지 않거나 자신을 과신하는데 쓰기 때문에 금지하신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5:34~37) 하셨고 주님의 육신의 형제였던 야고보 역시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약5:12)고 당부하고 있다.
결국 헤롯은 가벼운 맹세 때문에 심적 고통을 어찌할 수 없었다.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 베어”(9~10) 주고 만다.
오늘 우리 시대의 정치가들 역시 함부로 내 뱉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조심해야 하고 조그마한 권력이라도 가지면 거드름을 피우는 자세는 그 권력을 주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악한 것이다. 또 잘못 된 것이 있다면 솔직히 시인하고 용서를 비는 자세가 백성들에게도 더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에 하신 약속을 한 가지도 어기지 않으시고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면서 까지 철저히 약속을 지키셔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다. 이러한 진리에 근거한 삶이 견고하고 하나님의 보호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말씀과 성령과 양심에 민감한 영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귀함과 존경을 누리는 …
Ⅱ.정욕의 노예 헤로디아.
자신의 본 남편을 버리고 더 남자다워 보이고 권력가로서의 소양이 많은 시부와 재혼을 하는데 까지는 많은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이고 결국 자신의 야욕을 남자를 통해서 발휘하려고 했던 헤로디아는 사실 첫 결혼 자체가 숙부[작은 아버지] 되는 사람과 결혼을 했고 아이러니 하게도 그의 딸(살로메)도 같은 결혼을 했다. 이러한 사실을 사람들은 수근대면서도 자신의 앞에서는 감히 입에 올리지 못했다. 함에도 유일하게 면전에서 이것을 지적하고 나선 사람이 세례요한이었기 때문에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막6:19) 라고 기록하고 있다.
옛날 속담에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끔찍한 속담이 있는데 사실적으로 없어야 할 불신의 속담이요 죄의 현상이다.
이제나 저제나 이 앓는 이 같은 바른말 하는 요한을 없애야 마음이 편할 것이라고 기회를 노리는데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막6:21) 했는데 이것은 사실 좋은 기회가 아니라 죄지을 기회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죄지을 기회는 절대로 복이 아니다. 그러나 헤로디아는 이 끔찍한 일에 자신의 딸을 동원하고 있다. 그 어미에 그 딸이라고 참으로 자식에게 이런 엄청난 일을 시키는 어머니가 있다면 분명히 저주 받은 운명의 사람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헤로디아는 철저하게 죄의 여인인 이세벨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
Ⅲ.무서운 십대 살로메.(6, 8, 11)
“마침 헤롯의 생일을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6)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8)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여아에게 주니 그가 제 어미에게 가져가니라”(11)
도저히 아직 어린 17세의 소녀(少女)가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당시의 잔치 석상의 춤은 주로 노예 신분의 사람들이 춰서 흥을 돋구고 그것도 대개는 음란한 춤이었다. 어미를 닮은 이 딸아이는 계부(繼父) 즉, 의붓아버지이자 큰 아버지인 헤롯 앞에서 교태(嬌態)를 부리고 이에 흡족해 하는 계부에게 어머니의 시키는 대로 용의주도用意周到)하게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섬뜩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 말대로 군사가 세례 요한의 머리를 베어 오자 그것을 자연스럽게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 제 어미에게 가져가니라”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 모습이다. 이것을 천연덕스럽다고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죄의 능력이 이렇다. 죄는 사람의 양심을 완전히 마비 시키고 뻔뻔하게 만든다.
이런 것들은 마치 범죄한 후의 아담과 하와의 모습 같고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3) 이 모습은 동산에 늘 동행하시던 하나님과 나누던 그런 류의 답변이 아니었다. 아벨을 돌로 쳐죽인 가인과 같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4:9) 죄를 지으면 계속 술 취한 것처럼 용감해 진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용기가 아니라 저주의 용기이다.
요즘 가끔 매스컴에 비치는 경건치 못한 십대들의 모습도 바로 이 살로메의 모습이다. 감히 그 일을 그들이 했을까 싶을 정도로 끔찍한 일들을 태연히 해내는 모습을 보면 이 사회가 죄가 극에 달했던 1세기와 같은 착각을 일으키곤 한다.
이런 비정상적인 죄의 만용을 해결해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지셨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골고다의 십자가에 우리의 죄를 죽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살 때 비로소 죄에 대해 몸서리 쳐지고 진정한 인간다움을 찾는 것은 십대이건 인생의 만년이건 차이가 없을 것이다. 이래서 거듭남은 특별한 사람이라기보다는 가장 자연스러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회복이다.
Ⅳ.사명에 살고 죽는 세례요한.(4)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당시의 권력자 앞에서는 저자세를 취하고 있는 듯 없는 듯 처신하는 것이 편하게 살았던 대부분의 권력의 하수인들이었는데 반해 유독 광야의 외치는 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증거하던 요한 만이 바른 직언을 했다.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막6:18) 거친 광야의 기질을 가지고 사람이 듣기에 좋지 않은 거친 소리로 분봉왕에게 까지 바른 말을 하다가 목 배임을 당하는 것으로 자신의 사명을 마무리 한다.
좀 과격하기는 해도 이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사실 목숨을 내놓은 하나님의 종에게 두려울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오늘 우리 시대의 강단에도 이런 선지자적인 메시지가 있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을 듣기 좋게 하는 것보다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바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고 살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주님의 종들이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시도를 많이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말하기를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물론 모두가 세례요한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자기 사명에 이보다 분명한 사람은 없다고 볼 때 참으로 하나님의 종다운 삶을 살고 자기의 역할을 그래도 제대로 하고 간 사람의 자세를 보이고 있다.
헤롯의 생일에는 의로운 사람 세례요한이 죽었다. 욥의 아들 생일날에는 열 자녀가 다 죽었다. 성경 속에 생일 기념과 축하는 주로 이방인 권력자들에게서 보인다. 죄로 인하여 처음 탄생은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나야 할 준비의 탄생일 뿐이다. 그렇지 못하면 처음 탄생은 심판으로 나아가는 관문일 뿐이요 하나님과 원수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출생이다.
철저하게 권력의 하수인으로 권세의 종 노릇 하는 것 때문에 수치스럽고 음흉한 인간으로 역사 속에 남은 헤롯, 하나님 외의 무엇이든지 종 노릇 하는 것은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윤리와 도덕은 가치의 기준이 되지 못하고 자기 신분을 잊어버리는 것 역시 육신의 정욕에 노예 된 헤로디아와 살로메의 모습이다. 바울은 권면하기를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고 신앙의 사람들에게 권면 한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성령과 말씀이 삶의 도구가 되지 못하면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비록 평균적인 인생조차도 다 살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최고의 삶의 이유로 믿고 산다면 세례요한같이 담대할 수 있고 하늘의 영광이 보장된 인생이 될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