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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13:31~33, 44~52 2005-05-01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지난 주 우리는 마지막 추수의 역사 때까지 좋은 곡식과 가라지가 이 세상 역사의 밭에 함께 자라며 하나님께서는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뽑지 않으시고 두는 이유가 바로 알곡을 상하지 않으려는 사랑의 의도라고 말씀을 드렸다. 하나님의 말씀이 듣고 행복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듣고 소화하기 어려운 말씀도 있는데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말씀 역시 은혜인 이유는 듣고 깨닫고 삶을 다시 주님의 말씀과 약속으로 돌이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주어지는 이 비유의 말씀 역시 대단히 중요한 교훈이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력과 귀중한 가치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크게 둘로 나눈다면 한 부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이 절대적인 사람들로 이 사람들은 세상을 단지 거쳐가야 할 과정으로 생각하고 언제나 하늘의 부르심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는 하늘의 음성 즉, 말씀과 성령에 민감한 사람들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 목숨을 걸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명령이 절대적이고 세상은 육신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명령하신 일을 감당해야 한다고 인식하는 사람들로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지혜나 힘으로 사는 것 보다는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구하는 사람들로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실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안락한 환경과 처지가 삶의 이유이거나 감사의 이유를 환경과 가진 것에서 찾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 됨을 감당하고 있다면 함께 역사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늘 만족해 하는 그런 사람들이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가치가 언제나 첫째인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세상에서의 영광과 출세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동원하고 과격하게 말하면 영적인 것들을 세상의 영광을 위하여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바울 사도는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6:5)고 디모데에게 경계해 주고 있다.

사도 바울은 다시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3:18~19)고 평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사울과 압살롬 같은 인물들이고 신약에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비롯해서 데마와 같은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의 복이라고 여기는 것은 땅의 일이 잘 되는 것이고 신앙생활 잘 못하는 것에 대한 핑계거리가 충분한 사람들이다.

하나님 앞에 온전치 못한 것은 언제나 “부득이 하여 …”(삼상13:12) 라고 변명하기에 바쁘고 하나님께서 해 주신 일들에서 조차 자신의 기념비를 세우기에 바쁜 사람들이다.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났더니 혹이 사무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돌이켜 행하여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삼상15:12)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가져 세웠으니 이는 저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음을 한탄함이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으로 그 비석을 이름하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삼하18:18) 한마디로 세상에 이름을 남기려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삶의 이유인 사람들은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지 않느냐!” 라는 변명은 어울리지 않는다. 만약에 이러한 태도가 일반적이고 맞는 신앙적 모습이라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시는 주님의 말씀은 허풍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순종한다면 세상에서 절대로 비굴하지 않아도 우리의 인생을 전적으로 책임지실 주님이시다.



Ⅰ.천국의 확장성을 비유한다.(31~33)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놀라운 확장력과 삶을 변화 시켜가는 능력을 교회와 개인 모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속담이 “겨자씨처럼 작은 것”이라는 말을 우리말로 바꾸면 “눈곱만큼 하다” 라는 말로 바꿔 이해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실제로 채소들의 씨는 역시 시골에서 “배추장다리, 무장다리”를 본 사람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무씨보다는 배추씨가 작고 배추씨 보다는 상추씨, 그보다는 겨자씨가 훨씬 작다. 겨자씨는 손가락 사이에 넣고 만지작거려 봐야 겨우 느낄 정도이고 바닥에나 흙에 뒀을 때는 거의 볼 수 없을 정도로 작지만 심어서 다 자란 경우에는 말을 타고 서 있는 크기 정도까지 자란다고 한다. 이렇게 작은 씨에도 하나님은 생명의 메커니즘을 넣어 두셨고 이 생명은 반드시 역사할 수 밖에 없어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비유로 사용하신 내용의 핵심은 처음에는 그렇게 있는지 없는지 조차 미미한 존재가 마침내는 모든 나물들의 위에 자라서 새들이 깃들일 만큼 된다고 하는 천국의 신비성을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사실 처음에 복음을 들을 때는 그 내용이 한 사람의 인생을 살아 오는데 있어서 마치 겨자씨 같은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들리지만 마침내 복음의 씨가 자라서 결실할 만큼 되었을 때는 한 인간의 운명 속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게 되고 이제는 그 자란 믿음 속에 다른 사람을 참여 시키는 것이 마치 겨자나무에 새들이 깃들이는 데에 이르게 된다는 변화의 사실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눈 여겨 의미를 살펴야 하는 내용은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와 “자란 후에는” 라는 부분이다. 남의 밭에 심기운 씨는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고 우리 각자 자신의 심전(心田)에 복음을 심어져야 하고 씨로 그냥 남는 것이 아니라 씨가 나고 자라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신다.

우리 각자 속에 들어온 복음의 씨앗은 과연 우리 인생의 밭에 어떤 과목보다도 크게 자라고 있는가 살필 필요가 있고, 그것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의 복음이라면 자라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와 함께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자란 복음의 나무에 시원한 그늘을 찾을 수 있는데 까지 나 자신의 인생과 다른 사람의 인생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 인생에 들어 오면서 세상에 절대적인 가치로 여겨졌던 모든 것들이 상대적인 가치로 전락해 버리고 하나님 만이 내 인생에 절대적 가치가 되어 버렸다고 고백하는 신앙인들은 얼마든지 있다. 겨자의 특별한 매운맛도 천국의 비유와 관련성이 있을 것이다. 만약에 견자를 한입 물고 숨을 계속 들이시기만 한다면 그것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천국은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다. 주님이 한 인간 속에 들어 오시는 것은 온 우주가 들어 오는 것이고 인간적인 방법이나 힘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움직임에는 성령이 함께 하시고 우리 자신의 것은 품어 내고 성령께서 감당하게 하는 것이다.

33절의 비유도 다르지 않은 내용이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누룩은 섞인 가루의 성질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데서 복음에 비유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양의 비율이 아니라 생명의 능력이다. 여기 “가루 서말 속에” 라는 말에서 꼭 깊은 의미를 찾을 필요는 없다. 일반적인 가정에서 빵을 부풀게 하거나 우리 나라에서 술을 담그는 양이 서말정도 되고 중요한 것은 “전부 부풀게 한 누룩”의 힘이다.

어려서 술밥을 쪄서 누룩을 섞고 띄워서 옹기항아리에 물과 함께 섞어서 방 아랫목에 이불로 씌워 두면 이내 부글부글 개서 전혀 밥이 아닌 술로 바뀌어 버리는 것을 참 신기하게 생각했고 행여라도 여름에 밥이 쉴라치면 그 쉰 밥에다가 누룩을 섞어서 한참 두면 부글부글 개고 달콤할 정도 덜 발효가 되어서 먹으면 배탈나지 않게 먹을 수 있었던 기억이 더러 있다.

복음이 내 인생 속에 들어와, 한 사회 속에 들어와서 온 갓 추하고 더러운 모든 것을 온통 신령한 것으로 뒤바꿔 버리는 능력을 경험한 복음 속에 사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사실이다. 누룩이 곡식의 성분을 온통 바꿔버리듯이 우리 각자의 삶의 가치를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경험을 바울이 아닐지라도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하는 고백이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3:7~9)

이런 경험을 가진 자들마다의 찬송이 202:1.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는 승리 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2.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정결한 마음을 얻게 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3.눈보다 더 희게 맑히는 것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부정한 모든 것 맑히시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4.구주의 복음을 전할 제목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날마다 나에게 찬송 주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후렴)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복음의 씨앗이 여러분의 어떤 가치보다도 커서 여러분의 인생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역할이 여러분들의 삶의 이유가 되고, 세상의 모든 욕심과 죄악을 뒤집어 하나님께 드려진 삶으로 변화 시키는 놀라운 복음의 능력을 매순간 경험하고, 그 변화된 삶에 상처 받고 절망하는 세상의 영혼들이 새들처럼 깃들어 안식을 얻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교회가 되시기를 …



Ⅱ.천국 가치의 놀라운 귀중성을 말씀하고 계신다..(44~46)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이 두 가지의 비유도 역시 다르지 않은 비유이다. 차이가 있다면 “밭에 감추인 보화”는 알지 못했다가 알게 된 것이고 “극히 값진 진주”는 자신이 찾아서 만났다는 차이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알지 못했다가 깨닫게 된 사람이나 진리를 찾아 갈망하는 사람에게나 다 일생에 있어서 가장 귀한 보배요 가치임에 틀림이 없다.

사실 천국을 내 힘으로 산다면 그것은 문제가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가치만이 죄진 인생들에게 천국을 사 줄 수 있는 유일한 대가이고, 또 그것만이 유일한 천국을 살 수 있는 가치이다. 주님께서 이미 사 주신 천국, 그러나 우리 힘으로 살 수 없는 천국이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사 주셨다면, 하나님의 나라도 모르고 영원도 모르는 하루살이 같은 아무 가치 없고 공로 없는 나에게 영원한 영광의 천국을 거저 사주셨다면 인간적인 입장에서라도 우리가 이런 모습이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바울 사도가 지적하는 것 처럼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11~12) 완전히 비극의 주인공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러한 상황이 완전히 반전이 되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13)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천국을 보게 되고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든 것 무엇으로 이것을 가능할 수 있겠는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3, 5)

여기서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은 두 비유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그 진주를 샀느니라”는 사실이다. 천국은 우리 인생 전체를 투자하고 살 가치가 있고, 또 우리 인생 전체를 투자하고 사야만 하는 것이다. [Apt. 청약과 같다.] 어떤 사람들은 천국을 사는데 있어서 계약금 정도만 지불한 상태에 있는 것과 같은 사람이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천국을 사는데 있어서 중도금까지 정도를 투자하고 더 진척이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죄송하지만 이 단계에 까지 왔어도 아직 천국은 완전히 내 소유가 아니다. 비로소 나의 소유를 다 지불해 버렸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는 나의 나라가 될 수 있다.

오늘날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의 좋은 지위나 재산보다도 못하게 취급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을 더러 보는데 이 사람들은 아직 천국의 가치를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요, 이런 사람들은 다음에 나타나는 비유에서처럼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아차 이것이 아니었구나!” 라고 깨달을 때는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천국을 자기 자식만도 못한 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데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도 아깝지 않은 귀한 것이 천국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하찮은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가치를 다 지불해도 결코 손해날 것이 없는 귀중한 것임을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란다.

“The martyr of the catacombs; A tale of Ancient Rome”(마세라스 - 원형 경기장과 지하 토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주신 천국이 우리 세상의 어떤 일보다 못한 그런 것인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것인가?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의 피를 지불하고 이 천국을 나에게 사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Ⅲ.천국의 구별을 비유하신다.(47~50)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미 앞의 가라지의 비유의 말미에서도 이 말씀은 선언하신 바 있다.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41~42) 천국은 구별의 역사라고 한다. 선과 악, 악인과 의인, 구원과 형벌, 천국과 지옥 등등 영적인 가치를 가장 명확하게 구별하는 곳이 또 천국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4:19) 말씀하셨고 교회는 각종 고기를 모는 그물이라고 해도 그르지 않을 것이다. 그물질은 세상 끝 날까지 지속될 것이고 마치 갈릴리의 아침 해변처럼 밤새껏 바다에 쳤던 그물은 바닷가로 끌어 올려져서 고기를 선별하는 모습을 세상 역사의 말미에 양과 염소를 분리하여 심판하시는 임금의 비유와 같이(25장)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는데 이것을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넣으리니” 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 마치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의 말미에서 말씀하신 내용과 다르지 않다. 그물에 들어 온 것까지는 차이가 없는데 최종적으로 행선지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비유의 말미마다 이러한 경계를 주시는 것 역시 생명이 걸린 교훈이기 때문이다. 이왕에 한 인생을 살고 마지막의 운명이 있다면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된다는 경계를 주님으로부터 듣고 있는 것이다. 형벌이 없다면 의인의 삶이 가치가 없고 지옥이 없다면 천국도 의미가 없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이 비유들을 제자들 각자에게 확인해 주고 계신다.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51) 깨달은 한마디가 듣기 좋은 천마디 보다 귀중하고 자신의 진리로 들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천금보다 중하다. 오늘 이 모든 말씀역시 우리 각자의 말씀으로 소화 하지 못한다면 자신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52) 이런 비유의 이해는 구약 성경의 예언과 그 예언의 실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함께 다루지 못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천국은 처음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미미한 것이지만 그것이 싹이 나고 자라나서는 마침내 다른 사람들을 참여 시키고 구원할 만큼 우리 각자의 삶을 변화시키고 우리 인생을 다 팔아 사야 하고 모든 인생을 걸 만큼 확실한 가치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고, 이제 주님은 다시 오셔서 천국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골라내는 이 역사의 마지막에 심판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