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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천국의 비밀을 깨닫고 복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른다. 교회 안에서 우리 자신들 속에서는 별로 귀하게 느껴지지 않지만 세상에서 믿음을 갖지 못하고 인생의 역경을 만나서 갈등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비교해 보면 참으로 실감이 난다.
물론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신앙 안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깊이 깨달을수록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6~19)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읽은 말씀과 같은 내용이 34~35절에도 간략하게 쓰여지고 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말씀하셨는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하신 것처럼 구원의 진리를 깨닫기를 원하신다.
즉 죄로 인하여 절망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받아들이기를 바라고 계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는 말씀이나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는 베드로 사도를 통한 안타까움도 다 이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계속 해서 천국 비유를 베푸시면서 그 비유를 때로는 해설해 주시기도 하셨는데 비유나 비밀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한편에게는 더 깊은 뜻을 이해하게 되는 도구가 되는가 하면 반대편에게는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말은 말이지만 이해가 안 되는 그저 들리는 소리일 뿐이다.
사람들이 어떤 것을 이해하기 위한 통로가 바로 눈과 귀이고, 그 눈과 귀로 들어온 정보를 정리하고 판단하는 것이 마음이다. 보고 듣는 차이도 상당히 많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보는 것과 듣는 것의 머리에 남는 시간이 각각 다르고, 함께 보고 들은 것은 더욱 오래 기억되는 것으로 검사 결과가 나타난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기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고 선언한다.
오늘 우리가 깨닫는 하나님의 진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우리 삶 속에서 손으로 만질 만큼 체험 하는 사람과 단순히 다른 사람의 삶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보거나 듣는 것으로는 차이가 크다.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라신 복이 오늘도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
Ⅰ.비밀을 알 권리를 허락 받은 감사를 알아야 한다.(10~11)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비유는 같은 코드를 알고 있는 자에게는 의미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분명히 보고 들어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전쟁터에서 조차 ‘암구호’ 라는 약속된 단어로 아군과 적군을 구별해 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비유와 비밀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은 분명히 제한되어 있다. 만약에 모두가 이해하는 말이라면 이미 더 이상 비밀이 아닐 것이다. 가족 단위든 국가 단위든 통할 수 있는 말은 다 따로 있다.
그러므로 천국의 비밀을 알 권리를 가진 것에 감사해야 당연하다. 본래 비밀[musthvrion, mysterion(롬16:25; 계1:20) 이란 말은 영원히 감춰진 신비로, 경험한 자 외에는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본래는 동방의 신비종교의 폐쇄된 사실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성경에 사용되면서 창세전부터 감춰졌던 구원의 신비를 나타내면서 분명히 듣고 보는데도 이해되지 않은 은혜의 복음을 표현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원 받은 감격의 경험들을 아무리 이야기 해도 다른 나라 말처럼 듣게 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부부인데도 가족인데도, 친척인데도 하나님의 구원에 교훈에 관한한은 전혀 통하지 않는 그런 경험들을 하곤 한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11) 이 말씀이 어찌 보면 하나님께서 구별을 하시는 것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는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구분하시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어쨌든 사람들이 사랑에 감사로 반응하지 못하고 오해하고 곡해하는 가운데서도 오늘 나 자신이 구원의 복음을 받아 드리게 되었다는 사실에 충분한 감사를 갖는다. 할렐루야!
Ⅱ.믿음에도 빈부의 격차는 점점 더해지는 것을 배운다.(12~13)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우리가 경제원리로 표현하는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 현상이 영적인 세계에서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듣게 된다. 세상에서의 부익부빈익빈은 반전이(反轉) 어렵다. 아니 대부분이 불가능하다. 돈이 돈을 낳는다고 기반이 없으면 한마디로 맨땅에 헤딩한다고 한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가능하다는 것이 또한 감사한 일이다. 세상에서 가난한 바탕이 부자 되는 것이 어렵지만, 영원한 세계에서의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에서 부요할 수 있다는 소망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를 일이고,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 아버지는 참으로 공평하신 분이심을 감사한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의 서두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고 표현한바 있다.
믿음의 바탕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받아 드리지만 불신과 비판적인 사람들은 사실조차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을 보곤 한다.[믿음이 돈독한 아버지를 둔 딸은 결혼을 쉽게 하고 현숙한 믿음의 어머니를 둔 아들도 쉽게 결혼을 한다.]
꼭 같은 컴퓨터일지라도 Mac 과 일반 Pc는 같은 프로그램을 쓰지 못한다. 어떤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더 심오한 이해를 가능케 하는 것이 비유요 비밀이지만, 이해 못하는 비밀은 더욱 혼란하게 할 뿐이다.[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
우리가 세상에서는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안타깝게 받아 들이면서도 신앙에 있어서는 별로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이해되는 단계가 있듯이 믿음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비록 세상에서는 기본 바탕이 되는 제산을 가지지 못해서 ‘부익부빈익빈’의 안타까움을 느낄지라도 믿음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부자가 될 수 있다. 사실 성경은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약2:5) 물질적으로는 가난하더라도 얼마든지 믿음에 부요할 수 있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여러분 모두가 믿음을 풍성히 가져서 더 받아 넉넉하게 되시기를 …
Ⅲ.왜 모두에게 알게 하신 복음의 비밀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감춰지는가?(14~15)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여기에서 비로소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게 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사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것 같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내용인데, 이 말씀은 이사야 6:9~10의 말씀을 인용한 내용이다. 우리는 이러한 구체적인 예를 스데반을 통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에게서 보게 된다.
사도행전7:54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다시 57절에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58f) 했으나 베드로 사도를 통해 같은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과는 너무나 다른 반응이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2:37) 하나님께서 어떤 큰 역사를 위하여 한 사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것처럼 나타나는 성경도 분명히 있다. 가령 출애굽기에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나의 표징과 나의 이적을 애굽 땅에 많이 행하리라”(7:3)는 말씀과 함께 13번이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 완강하여” 라는 표현이 쓰여지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바로의 마음이 선했는데 하나님께서 강퍅하게 만든 것을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람이란 다른 동물과 달라서 자기의 길을 결정하고 어떤 일을 계획할 수 있다. 이것을 바로 하나님의 형상성이라고 하고 인간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각 사람은 자기의 길을 계획하고 인생을 산다. 사람의 생명의 길이는 하나님의 결정 안에 있어도 그러나 그 생애를 어떻게 사는 것 까지는 각 인간의 결정에 맡기신다. 어떤 사람은 선하게 살고 어떤 사람은 악하게 사는 것은 각자의 성향일 뿐이다.
솔로몬은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전7:29)고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자기 성향대로 살고 하나님께도 사용되는 것이다. 가룟 유다도 역시 그의 성향대로 역할 한 것이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이 절대로 아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마리아가 비싼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을 때 여기에 반응하는 가룟 유다의 태도와 거기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평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12:4~6)
사람이 마음을 겸손히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드리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완악하여 은혜를 거절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각 사람의 선택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고정하시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신다면 하나님은 죄인을 심판하실 수가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 복음을 거절하도록 근본적으로 그렇게 만드셨다면 죄를 짓게 한 책임이 하나님께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공의롭지도 사랑하시지도 않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억지로 열어 주시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다만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려고 각오만 해도 하나님은 도와 주신다. 할렐루야! 사도요한을 통하여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하셨는데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의 사랑에 순종으로 반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15)는 내용이 굳어진 사람들의 마음이 행여라도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몰입 될까 봐 경계를 가지는 내용이다.
마치 사기꾼에게 자기가 넘어갈까 봐 경계하는 것과 같은 자세를 하나님의 사랑에 그렇게 반응하는 안타까움을 이사야는 탄식하며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보면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사65:1~2) 그러므로 완악한 사람은 주님이 불신하게 만드시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주님은 다시 호세아를 통하여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호11:2)
우리 눈과 귀의 가장 귀중한 기능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듣고 깨닫는 것이고 마음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순종하는 자리로 사용되어야 가장 가치가 있다. 그러나 행여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말씀을 듣고 예수쟁이 될까 봐 경계하는 어리석음은 버리는 것이 영원한 행복의 지름길이다.
Ⅳ.과거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보고 듣고 싶어 했던 것들을 우리는 거저보고 있다.(16~17)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복음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고 듣고 기뻐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것 역시 깨닫는 사람만이 느끼는 기쁨이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메시야를 대망하면서 이 세상을 하직했는가!
예수께서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하셨고 히브리서 기자도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히11:13, 39)→“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라 했는데 오늘 우리가 그들이 그만큼 보기를 열망했던 그리스도를 듣고 보고 믿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가!
Conclusions : 신앙 만큼은 자신이 체험해 보지 않고는 이해되지 않는 것도 없다. 천국의 비밀을 알도록 허락 받은 감사를 충만이 누리기를 바란다. 세상의 경제원리는 에서는 富益富貧益貧이지만 이것은 영적으로는 얼마든지 반전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 하셨으므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는 우리 모두의 고백으로 받게 되기를 바란다.
이 지상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행여라도 그 말씀과 성령에 감동 될 까봐 염려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그들에게 역시 성령과 함께 하나님의 진리를 설득시키므로 복음에 복종시켜서 복 받게 하기 위하여 우리 각자가 먼저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고 권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 수 천년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보기를 갈망했고 듣기를 사모했던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한 것에 감사와 찬양 더불어 드리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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