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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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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3:1~9, 18~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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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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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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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은 이 마태복음의 5개의 교훈집중에서 가운데 해당하는 교훈이다. 산상에서 주어졌던 산상 보훈(5~7장) 복음을 전파자들의 자세에 대한 교훈(10장) 이 천국 비유와 겸손과 용서의 교훈(18장) 최후 예루살렘에서의 교훈(23~25장)
이 13장의 기록은 모두 7개의 비유와 비유를 베푸는 이유, 그리고 두 가지의 비유에 대한 주님의 직접적인 해설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비유는 나름대로 다른 비유들이면서 전체를 구성해 보면 또 하나의 내용이 구성되는 신비를 보게 되는데 씨 뿌리는 비유(1~9),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24~30), 겨자씨의 비유(31~32), 누룩의 비유(33), 감춰진 보배의 비유(44), 값진 진주의 비유(45~46), 고기를 모으는 그물의 비유(51~52)로 구성이 되고 있는데 이 땅에서 교회의 탄생과 확장 그리고 천국의 가치와 심판의 때를 점진적으로 풍자하고 있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고향에서 배척당하시는 내용이 첨가되고 있다.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는 사람들의 마음[씨 뿌리는]과 선과 악(惡)이 함께 하는 이 세상의 역사[알곡과 가라지]와 교회의 성장[겨자씨, 누룩]과 천국을 누리는 자의 감격[감추인 보화, 좋은 진주]과 이 역사의 마지막 심판[바다에 친 그물]의 사실로 그려지고 있다.
또 다른 위치에서 보는 이 비유의 교훈들은 오늘 본문을 비롯해서 계속 되는 4개의 비유가 바닷가에서 가르쳐졌고 거기에 연이은 3개의 비유는 다시 집안에서 베풀어지고 있고, 비유의 범위도 농사의 일과 여자의 일, 상업과 어부의 일 등 당시의 일차 산업 속에서의 대부분의 생활과 관련된 일상의 비유이다.
오늘 우리가 대하게 되는 비유는 예수께서 비유를 해설해 주고 계시는 내용을 함께 읽었는데 이 말씀과 가라지의 비유도 집에 들어가셔서 제자들에게 그 의미를 설명해 주시는 내용(36~42)을 역시 같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1~3f)
마태의 기록이 반드시 순서를 따라 기록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앞의 내용에 반드시 연결해서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주님의 가르침의 장소는 자연의 여러 상황들이었음은 짐작이 된다. 산위에 앉으셔서 가르치시는가 하면 집안에서도 바닷가에서도 천국복음의 증거장소는 제한되지 않는다. 이러한 모습은 어쩌면 천국을 보다 속히 많이 전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고 이해되어지고 마지막을 앞둔 우리 오늘의 그리스도인들 또한 이런 자세를 본받게 된다.
우리는 이 내용을 읽으면서 한 장면을 연상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누가복음 5장의 장면이 머리에 떠오른다.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눅5:1~3)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5:4)
이 13장 대부분이 비유의 교훈들이지만 비유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비유, 헬,파라볼레(parabole)- 곁으로(헬, 파라(para) + 던지다(헬, (발로)ballo) parable, 곁에 놓는 것, 비교, 예증, 모형, 상징]
이 첫번째의 비유가 복음을 받는 각 사람의 마음 밭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고, 먼저 씨를 부리는 자는 다음의 가라지의 비유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37) 라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말씀하셨는데 물론 그리스도 이후 복음의 씨는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이고 그러므로 그 사역은 오늘도 여전히 이 역사의 마지막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이며 씨는 각가지의 마음밭에 뿌려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주님께서 해설해 주신 것을 다시 강론한다고 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황송하고 죄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역시 바르게 더 깊이 이해해야 하고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 하려고 하는 입장에서 외람되지만 이 말씀을 통해서도 성령께서 역사하시므로 생명이 풍성한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
Ⅰ.길가 밭에 떨어진 씨.(3b~4, 19)
“…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길가’ 라고 상징할 때 수많은 종류의 사람과 짐승들이 오가며 밟으므로 굳어질 대로 굳어진 것을 이해할 수 있고, 이런 굳어진 땅 위에 덩그렇게 놓여진 씨는 일상적으로 먹이를 찾는 새들이 찾아 먹어 버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의 상황이다. 씨앗은 생명을 가지고 있고 정상적인 씨앗이라면 반드시 뿌리를 내고 떡잎이 나오고 자라게 되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지만 돌처럼 굳어진 땅 위에서는 어떤 씨앗도 움을 틔울 수 없다.
복음의 씨앗은 반드시 생명을 잉태 시키지만 그것을 바라지 않는 어둠의 세력은 할 수만 있으면 생명의 씨앗이 움트지 못하도록 벼르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수족관에 열대어를 키우다 보면 뱃속에서 부화되어 나오는 새끼를 나오는 대로 잡아먹는 다른 고기들을 볼 수 있고 심지어는 지어미 까지도 낳아 놓고 돌아와서는 제 새끼인 것을 알지 못하고 잡아먹는 안타까움도 보게 된다.
여기에 중요한 낱말 하나는 그렇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로 말씀하고 있는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라는 내용이고 이 ‘깨달음’은 나중에 ‘좋은 땅’을 비유하시면서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말씀을 듣는데 있어서 참으로 보석같이 귀중한 포인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그대로 뒤집으면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만이 반드시 자라게 된다는 내용으로 들린다. 세상의 온 갓 잡다한 이론과 종교 철학으로 인하여 굳어진 마음 받은 복음이 움트기에 힘겨웁고 깨달음이 불가능하기 대문에 경계 되고 있다.[이단의 교훈을 배우고 나서 분명히 잘못되었다고 의식을 하는데 그 이론이 자기를 지배하고 있어서 순수한 하나님의 진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을 본다.]
여러분 모두가 성령의 역사로 깊은 깨달음과 함께 한마디의 진리도 빼앗기지 않는 복된 천국의 사람들 되시기를 …
Ⅱ.돌 밭에 뿌려진 씨.(5~6, 20~21)
“더러는 흙이 얇은 돌 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돌 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움은 틔웠는데 흙 심이 깊지 못한 밭의 비유로 대개의 경우 밑에는 바위가 깔린 위에 흙이 덮인 종류의 땅을 비유하는데 가파른 산자락에 맨 위 고랑은 늘 이런 것을 경험하곤 했다. 밭을 갈 때마다 흙이 늘 밑으로 밀려 내려 와 버리기 때문에 메말라서 자라도 결실을 못하거나 죽어 버리는 모습이다.
이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는 사실 속에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감정의 기복이 심한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여기까지는 참으로 좋다. 그러나 문제는 감정이란 언제나 변화가 많다는 것을 기억할 때 감정만의 신앙은 언제나 위험하다. 우리 대한민국의 민족성이 대개의 경우 감정적인 요소가 강한 민족이다 보니 늘 감정으로 흐르는 경향이 많다.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에 감정을 좌우하는 음악적인 요소가 함께 해야 믿음에도 활력을 갖는 모습들을 더러 본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 민족은 음악적인 소양들이 삶을 깊이 지배하는 경향들을 느끼곤 한다.
이런 분위기에 몰입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요란함 속에서는 믿음이 있는 것 같은데 조용하면 흥이 생기지 않는 극단적인 모습들을 더러 발견하곤 한다. 이런 입장에서 돌 밭의 심령은 감정적인 부분에 편중된 신앙으로 뿌리가 없다. 감성(感性)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이성(理性)과 의지(意志)가 골고루 믿음으로 채워지는 인격적(人格的)인 신앙이 되어야 한다. 감정에 치우친 신앙은 환란을 만나면 이내 감정은 말라버리기 마련이다.
환란 앞에서 신앙의 깊이가 중요하다. 수많은 세월동안 뜨거운 여름날과 같은, 매서운 겨울 추위와 같은 환란과 핍박[헬, 들립시스(thlipsis), 압박하다, 짐진; 헬, 디오코(dioko), 추격하다, 쫓기다]을 견디며 뿌리는 깊이 박히고 이제는 태풍과 같은 고난에도 흔들림이 없는 신앙인격이 만들어져서 ‘환란아 올 태면 와라!’는 뿌리 깊은 믿음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 모두가 갑자기 뜨거워지고 차가워지는 냄비 신앙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과 더불어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같은 심지 깊은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
Ⅲ.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7, 22)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이 비유는 특히 환경적인 영향이 신앙에 미치는 것을 비유하고 있다고 봐진다. 여기에 가시떨기가 나중에 난 것이 아니라 ‘가시떨기 위에’ 씨가 떨어졌다고 비유되고 있다. 곡식보다 생장력이 강한 가시떨기가 이미 자라고 있는 가운데 씨가 떨어졌다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대개의 경우 이미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나는 다른 나무 씨앗은 발아를 해도 건강하게 자라지 못하고 햇빛을 보기 위해 가늘게 키만 자라다가 죽는 예가 많다. 세상의 다른 것들이 무성하게 마음을 사로 잡고 있는 가운데 말씀을 받아서는 생명을 결실 할 수 없다.
주님께서 직접 주신 해설은 이를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라고 하셨는데 다른 모든 조건은 문제가 되지 않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이 문제가 되고 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세상의 온 갓 것들을 가득 가진대로 말씀을 들으면 은혜가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바울사도가 돈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경계를 주고 있는 내용이 바로 여기에 해단되는 내용이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9~10)
이 내용을 공동번역은 “또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억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당부하기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고 당부하고 있고 베드로 사도도 같은 권면을 주고 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5:7)
주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나 여호와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렘4:3)고 경고하고 있다. 귀한 생명의 말씀을 가시떨기 속에 뿌려서야 되겠는가!
염려와 재물의 유혹은 신앙의 가장 큰 적이다. 생명의 말씀을 듣는데 가시떨기와 같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복음의 씨앗을 잃지 않는 저와 …
Ⅳ.좋은 땅에 떨어진 씨.(8, 23)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신앙 하는 우리 모두가 가장 바라고 사모하는 옥토의 요건은 무엇인가? 결코 어렵지 않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주님은 해설하신다. 그러나 말씀을 깨닫는 것 역시 인간 이성으로는 불가능하다. 주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하여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고 직접 말씀하셨고, 요한은 그의 만년의 편지에서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고 가르쳐주고 있다.
결국 깨달음은 성령의 역사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자신의 인간적인 판단이나 이권(利權)에서 가 아니라 전적인 주님께 대한 신뢰로 가능함으로 여기도 역시 전적인 순종이 관건이 되고 있다.
그리고 결실에 대해서도 성경은 역시 크게 과장하지 않았다.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우리는 수 천 배의 결심을 욕심 내지만]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막4:8)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눅8:8)
그러나 경계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 밭이 이 4가지 유형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길가 밭도 가시떨기의 땅도 갈아 엎으면 좋은 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고 다만 이것은 인간의 의지로는 불가능하고 주님의 성령께 맡기고 전적으로 의탁하면서 선하신 주님의 역사를 기대함으로 순종하는 자세가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10:12)고 당부하신다.
이 귀한 비유의 말미에도 주님은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9) 육신의 귀도 밝은 것이 중요하지만 영혼의 귀의 천성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은 자신의 희생으로 맺게 될 결실을 말씀하시면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말씀하셨다. 우리자신 각자가 죽고 주님께서 우리 자신을 통해서 사시게 한다면 그러한 심령은 주님께서 깨끗케 하시고 생명의 씨앗이 자라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해 주실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모두는 이 말씀을 듣고 경성함으로 모두모두 옥토의 심령으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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