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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11:25~30 2005-02-20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우리는 이 11장의 과정들을 보면 대부분이 어두운 내용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군중들에게 소개했던 요한의 제자들을 통한 의심의 내용과, 유대인들의 세례 요한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배척과, 수많은 이적과 능력으로 복음을 증거 하였어도 거기에 반응이 없는 갈릴리 지방의 고을들에 대한 탄식, 모두가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없고 심판을 선언하신다고 해도 역시 주님은 마음만 아프실 뿐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안타까운 사실을 오늘 첫 부분에서는 아버지께 기도하신 후에 자신을 환영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초청의 음성을 들려 주신다. 하나님은 비록 죄진 人間일지라도 결코 계속해서 절망에 버려두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계속 이어질 12장에서도 종교 지도자들의 반대는 보다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고 그리스도의 치료와 이적의 역사 앞에서도 반감과 불신은 심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오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와 거역하는 세대가운데서 주님을 순종하는 자들에 대한 사랑의 초청이다.



Ⅰ.주님의 사랑의 메시지는 언제나 어린아이 같은 단순한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25~26)

(25)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예수께서는 어떤 경우에든지 사역과 어려움도 아버지께 맡기고 의논하셨다. 나사로를 살리시는 무덤 앞에서도 자신의 능력의 과시보다는 아버지께서 역사하심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셨다. 주변의 불신과 의심도 당연히 하나님 아버지께 의논의 대상이셨을 것이다. 한 시대의 사람들과 고을들이 배척을 한다고 하나님께 어떤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주님을 거역하고 대항하는 것은 결국 그 당사자들에게 아픔과 고통을 가져오게 될 것이기 때문에 결국 불신하는 사람들에게 비극이다.

하늘의 구원초청은 어떤 것도 인간의 머리로 이해되거나 판단될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고전1:20~23) → v26~27에 다시“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중에 문벌이 좋고 공부를 많이 하고 세상에 부족한 것이 없는데도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그 사람은 더 많이 감사할 이유가 된다.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했는데 이것은 사실적으로 어린아이들만이 복음을 받아 들일 수 있다는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 머리를 굴리지 않고 어린아이들처럼 단순하게 “아멘!” 할 수 있는 겸손과 꾸밈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켜 하시는 말씀이다. 복음을 양팔 벌려 환영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조건의 사람들보다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습니까?

때로는 사람들이 철저하게 하나님과 담을 쌓으면서 살다가 죽을 병에 걸리고 그러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게 되는데 이런 사람은 나중에 은혜를 맛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나면 죽을병 걸린 것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어떤 경우에 너무 완악한 사람들은 진탕 두들겨 맞고 회개를 하게 되는데 그러고도 회개치 못하는 인생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다.

주님께서는 기도하시면서도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라고 고백하시는데 야고보의 고백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4:6; 시138:6; 잠3:34)

여러분 모두가 어린아이 같은 단순함과 순진함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허락하신 은혜를 넘치도록 누리는 모두가 되시기를 …



Ⅱ.주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들만이 하나님 아버지를 안다.(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께서는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고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신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 사도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3)고 예수께서 창조자이심을 증거 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다”고 말씀하시고 그 주심 자체가 아들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서부터 이스라엘을 향하여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율법 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알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를 오늘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이나 율법 시대부터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 왔던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 조차 막상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어도 알아 볼 수 없었고 그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계시를 받았어도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민족을 향하여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롬11: 33~34) 라고 탄식하고 있다.

과연 누가 죄에 신음하여 절망으로 가는 인류를 두고 볼 수 없어 사랑의 가슴알이를 하셔서 자신의 가장 귀한 독생자를 십자가에 찢어 죽게까지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런데 주님께서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가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없다고 선언 하신다.

옛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 복음이 완성된 이 시대에도 사람들은 계시 즉, 말씀을 받는 것 조차도 얼마나 이기적인지 모른다. 아들의 소원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소원을 따르는 계시보다도 자신이 즐길 수 있는 계시를 선택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 조차도 말세적인 현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4:3~4)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소원을 따라 말씀을 받아드림으로 하나님을 깊이 이해하는 신령한 하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



Ⅲ.주님의 초청과 주시는 쉼을 누릴 수 있는 약속.(28~30)

(28)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초청하시기를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사55:1~3)고 말씀하셨다.



1.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부르신다.(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쉬게 하겠다 약속하신다.

세상적으로 보면 이렇게 어리석은 초청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되도록이면 그럴싸한 사람들을 모으려고 하지, 지지리도 힘없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불러모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모아봐야 골치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초청은 세상과 정 반대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공동]

이러한 주님의 마음을 담은 찬양이 327이다. 1.죄 짐을 지고서 곤하거든, 3.진실한 친구를 원하거든, 네 맘에 평안을 원하거든, 네 맘속에 주 영접하며, 네 구주를 영접하라, 의심을 다 버리고 구주를 영접하라, 맘 문 다 열어 놓고 네 구주를 영접하라]

스스로 잘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은 말고, 도움이 필요 없는 완전한 사람은 말고, 뒤 배경이 든든한 사람은 말고, 어디 가서 하소연 할 데도 없고 아무리 하소연해도 다른 사람들이 다 외면하는 그런 사람들을 주님은 초청하신다. 꼭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만 초청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모든 인류는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과 다르지 않다. 그대로 두면 그냥 죽을 수 밖에 없는 마귀 사탄이란 강도를 만난 자들이다. 그렇게 초 죽음이 다 된 사람들을 우리 주님은 부르고 계신다.

그리고 단호하게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신다. 하늘과 당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자가 쉬게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이 인류가운데 주님의 이 초청이 필요치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모습 그대로 : 당신은 무엇을 믿고 가나 무엇을 바라며 사는가, 고달픈 인생의 험한 길을 예수님 내짐을 지셨네, 당신도 오시오 예수님 품으로, 그 모습 그대로 새로운 인생 길로-김호성]

더 이상 무엇을 기다립니까? 이 초청을 수락하십시오. 받아들이기만 하면 이 약속은 당신 것이다.



2.이 복된 약속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이 있다.(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신다.

그러나 이 쉼의 초청에 조건이 하나 있다. 바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시는 명령이다. 이 조건이 충족되어 지지 않고는 초청의 약속은 사실 의미가 없다. 우리는 주님의 귀한 약속을 좋아 하면서도 사실 그 약속을 누릴 수 있는 명령을 순종치 않아서 그 귀한 약속들이 공수표가 되는 예가 얼마든지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귀한 약속이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말씀이 지켜지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냥 듣는 천둥 소리와 다를 바가 없다. 앞의 초청에 응하는 가장 구체적인 약속이 바로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을 배우는 것이다.

멍에라고 하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멍에는 절대로 거짓으로 멜 수 없는 것이다. 메는 척으로 해서는 절대로 땅은 갈아지지 않는다. 사실 처음 멍에를 메워 밭을 갈고 논을 가는 소들은 그 멍에자국이 생기기 까지는 헐고 짓물 나고 낫고를 반복한다. 바리새인들이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은 사실은 자신들은 어떤 멍에도 메지않고 말만하면서 오로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에게만 멍에를 메게 했던 것 때문이었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마23:4)

우리 신앙생활 한다는 그리스도인도 행하는 것 조차 구원과 관련이 있고 없고를 따진다. 얼마나 독선적이고 이기적인지 모른다. 그 이기적인 사람이 누군가 바로 나다. 예수께서 이렇게 이기적이셨다면 우리 중에 과연 구원 받을 사람이 있을까? 아마 하나님이 이런 계산적이셨다면 십자가는 어림도 없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송영미 자매의 고백]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시면서도 바로 그 앞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하여 그 멍에의 성격을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절대로 우리가 감당치 못할 힘겨운 멍에를 우리 어깨에 두지 않으신다. 믿습니까? 왜 입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2:18)고 말씀한다.



3.주님께서 쉼을 위해서 메우시는 멍에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말씀하셨던 주님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약속하신다. 초벌 갈이를 이미 다 해 놓으시고 흙덩이를 깨는 정도로 가벼운 멍에를 우리에게 메우신다. 또 이스라엘 속에서의 멍에는 겨리 해서 매는 멍에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함께 메시는 멍에가 될 것이라는 약속이다. 또 아무리 힘겨운 짐일지라도 억지가 아니라 기쁨으로 지면 무개를 느끼지 못한다. 사랑으로 지는 짐은 어떤 무거운 짐이라도 능히 감당할 수 있고 가볍게 느낀다. 야곱의 라헬을 위한 7년의 머슴살이를 세월을 수일같이 여겼다(창29:20)는 기록은 여기에 견주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범죄 한 인간은 불러도 불러도 주님의 사랑의 초청을 거부하고[호11:2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 어리석게 독립 선언을 하는 간교한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많지만, 십자가의 구원의 메시지는 인간적인 지혜나 슬기로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했다.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단순히 받아 들이는 어린 아이 같은 순종의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소망이 되고 능력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자신들의 계산과 꾀를 다 버리고 오직 주님의 뜻과 의지를 따라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안타까운 사랑의 뜻을 이해하고 찬양하게 된다.

이제 십자가를 지심으로 완성하신 구원의 초청은 이 인류 역사의 모든 사람들을 향한 초대이다. 하나님께서는 인종도 계급도 부와 가난도 구별하지 않고 부르신다. 인생의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시겠다고 부르신다. 그러나 이 복된 주님의 부르심에도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의 멍에를 기쁘게 메는 자들이 누리게 될 것이며 감사와 기쁨으로 함께 메겠다고 만 하면 이 짐은 참으로 쉽고 가벼운 짐이다.

구원 받았다고 하면서 아직도 우리의 생각과 두뇌로 하나님의 약속을 저울질하고 이러한 것들이 구원에 관련이 있는가 없는가를 헤아리면서 신앙생활 한다면 우리의 삶에 가슴에 진정한 쉼은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온유하고 겸손을 본받아 바탕으로 삶고 주님의 말씀이면 계산 없이 몸과 마음을 드림으로 우리 인생의 모든 수고와 무거운 짐들을 주님께 내려 놓는 저와 여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