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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태복음 5~7장까지의 산상보훈을 천국시민의 헌장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한다. 어떤 헌장이 어떠한 사실에 대하여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정한 규범이라면 명목상의 약속이 되어서는 안되고 특히 하늘나라 백성의 삶의 원칙이요 모습을 결정하는 것이라면 더욱 더 그럴 것이다. 사람에게 진정한 복이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하늘 백성의 삶의 모습과 목적을 가르치신 주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복음에 대한 관계와 적용을 주님을 따르는 천국 시민들에게 가르치시는 내용에까지 왔다.
당시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나 종교인들에게 전혀 파격적이고 획기적인 것처럼 보이는 주님의 가르침은 결코 구약성경에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교훈들을 말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시키기 위한 것임을 분명하고 단호하게 증거하고 계신다. 사실 이 부분이 정확하게 정리되지 않으면 이 복음 시대에 살면서 여전히 율법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고 삶의 생기를 잃어 버리고 오로지 계율을 지키기 위한 힘겹고 어려운 종교생활을 할 수 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이 부분에서 주님께서는 율법을 무시하거나 폐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실 것이라고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오해를 잠재우시고 오히려 자신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선언하시면서 구체적으로 율법의 몇 부분들을 가르치시는 것을 보게 된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4~5)는 바울의 가르침처럼 죄에 있는 사람들을 율법 속에 있는 사람이든지 율법 밖에 있는 이방인이든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율법의 약속대로 율법아래 나시고 죄를 가진 보통사람으로서는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셔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시고 흠 없는 제물로 죽으셔서 완전한 제사를 드리셨다.
우리는 여기서 율법의 몇 부분들을 정리하고 다음 말씀으로 진행할 필요가 있다. 율법의 역할을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19~20)고 선언 함으로서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돌아오게 하는 몽학선생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10:1)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도 온전케 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결국은 실체요 사실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요구를 십자가로 만족시키시고 폐하여 졌다.
옛 계명을 가장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는 히브리서는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히7:18)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10:9) 함으로서 이를 분명히 해 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 후에는 더 이상 율법은 구속력이 없다. 범법함이 없다면 형벌 조항이 존재할 필요가 없으므로 적어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자체가 의미가 없다. 자연인인 죄의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율법의 요구는 채워질 수 없고 지켜질 수 없지만 복음 속에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고 비로소 율법이 지켜지므로 율법의 존재 가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바울 사도께서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1~4) 할렐루야!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율법의 핵심으로 이루어진 10계명 자체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의미가 없다. 그것은 옛적 이스라엘에게 주신 계명일 뿐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12:29~31)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그 피를 헛되게 여기는 불신의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율법의 정죄는 계속 될 수 밖에 없다.
Ⅰ.율법을 완성하시는 그리스도(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에게 비난을 받은 이유는 ‘율법을 어긴다’는 것이었다. 특히 가장 심했던 것은 안식일을 어긴다는 비난을 많이 들으셨다. 사실 이것이 주님의 구속의 역사 후에는 가장 사실적으로 복음의 사람들에게 폐해진 율법 조항이다. 그 정신은 살아서 주님의 날에 예배를 드리고 있기는 하지만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시118:22~24)] 오늘날에는 더 이상 금요일 날 해질 때부터 토요일 날 해질 때까지의 안식일은 주님께서 폐하시고 주님의 부활의 승리의 날을 주셔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감격을 그의 백성들에게 주셨다고 확신한다.[주님의 날을 정리하면 ①부활의 날이다.(마28:1; 요20:1) ②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날이다.(요20:19, 20:26; 행1:3) ③성령이 임하신 날.(행2:1-4; 레23:15-16) ④최초로 복음이 선포된 날이다.(행2:14-36, 같은 날이다). ⑤교회가 세워진 날이기도 하다.(행2:41) ⑥떡을 때기 위해 모이는 날(예배의 날)이 되었고 연보를 드리는 날이 되었다.(행20:7; 고전16:1-2) ⑦계시록을 받은 날도 주님의 날이다.(계1:10)] 그러므로 이 부분에서 아직도 안식일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아직도 복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옛 언약인 율법아래 거하고자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오셔서 구속의 피를 흘리시지 않으셨다면 율법의 조항들은 모든 이방인들에게 이해가 불가능한 법이고 지킬 수 없는 종교 계율에 불과했을 것이다. 주님께서 완전한 제사를 드리심으로 오늘 우리는 비로소 율법의 의미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게 되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경우에도 무의미하게 폐하여지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고 이사야를 통한 언약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55:11) 약속되고 있다. 적어도 이 하늘과 땅이 없어 질 때까지 한마디의 말씀도 버려짐이나 헛됨이 없이 이루고야 말 것이다. 무엇보다도 불변 하는 그 약속 위에 오늘 내(우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Ⅱ.율법에 대한 자세(18~20)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에서는 말씀의 불변성과 함께 그 말씀에 반응하는 자세에 대한 보응과 율법 속의 의와 복음 속에 있는 우리의 의를 비교하면서 율법의 의에 미치지 못하는 의라면 당연히 천국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운 경계를 주고 있다.
⊙어떤 말은 작은 점 하나가 있고 없음에 또는 띠고 붙임과 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의미가 달라지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비단 성경의 본래 쓰여진 글인 히브리어나 헬라어 뿐만 아니라(성경의 쓰여진 글보다는 현실적인 비유가 더 쉬울 것이다.) 우리 글이나 한문도 마찬 가지다.[大, 犬, 太] 그럼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의 교훈은 결코 가감(加減)할 수 없는 생명의 원칙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주님의 명령이든지 가볍게 취급될 것은 없다. 우리 이기적인 사람들의 생각은 언제나 말씀을 구원과 관련시켜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의 본능이라고 할지라도 오늘의 교훈은 그러한 자세에 대하여 경계를 주고 있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특히 이 말씀은 신앙의 지도자들에게 주시는 교훈이라는 데서 더 무개를 가진다.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비록 천국에 있다고 할지라도 지극히 작은 자라는 취급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버릴 것이 없다는 말씀이다. 그것이 구약의 율법에 속해 있던 신약의 복음에 속해 있던 그것을 받는 사람들에게 마찬가지이다. 바리새인들이 책망 받은 이유는 “…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마23:24)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에 상관 있던 없던,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복이 오건 안 오건 모두 귀중한 생명의 말씀임을 명심해야만 한다.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가장 호소력 있게 가르치는 자세가 바로 “행하며 가르치는 자” 일 것이다. 오늘의 시대에나 이 말씀을 주신 당시의 상황에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그렇지 못한 바리새인들을 두고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마23:3~4) 라고 책망하셨다.
오늘의 시대에 이 말씀은 더욱 우리에게 가까이 들리는 교훈이다. 신앙의 지도자가 되었건 지도자가 아니건 하나님의 사랑의 계명을 전하는 데는 꼭 그래야만 한다는 교훈이다.(많은 구원 받은 사람들의 간증이 이를 증거 한다.)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크고자 한다면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큰척하고 거드름을 피운다고 해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천국에서는 낮춤을 면치 못할 것이다.
⊙율법 속에 사는 사람보다 의롭지 못하다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는 두려운 경계가 연이어 지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율법의 의는 인간의 노력에 의한 의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사실적으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과 조상들의 의를 의지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칭찬이 아니라 책망만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사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자신의 노력보다도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다. 주님의 의를 힘입어 사는 새 언약의 백성이 폐하여질 계명에 사는 사람만 못하다면 참으로 주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근채의 십일조까지 챙겨 바치는 종교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언약을 순종하며 산다면 그 의는 사실 예 언약 속에 사는 사람들과 비교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오늘 날에도 옛 언약을 계명으로 알고 사는 부류들이 더러 있다.[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안상홍증인회 등등] 바른 진리를 가지고 산다는 우리가 그들보다 못하다면 복음의 능력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욕되게 하는 것이 되고 그런 모습으로 주님 앞에 수치스러울 수 밖에 없다. 주님의 은혜의 성령을 의지하면서 말씀을 좇아 사는 사람이라면 이런 공포는 가지지 않아도 될 것이다.
Ⅲ.옛 계명과 새 계명의 차이(21~22)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드디어 옛 계명과 새 언약이 비교 되어지고 있다.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제 6계명과 복음 속에서의 삶을 비교하고 역시 옛 언약 속의 선언된 심판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더 무섭게 경고 되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옛 계명보다 새 계명은 강화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옛 계명은 결과로 심판하지만 새 계명은 죄의 근원부터 정죄하고 있다. 요한 사도는 이를 더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3:15)고 가르친다. 이것은 적어도 천국백성의 기준임을 기억한다면 이해가 어렵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이 땅에서 아직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살면서도 영의 사람으로 훈련되어져야만 한다는 입장에서 우리 자신을 시험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천국에 존재하지 않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미움’이다. ‘사랑’으로 충만한 곳, 희락과 기쁨과 감사로 충만한 곳, 그곳에 들어갈 신령한 사람으로서 미움을 갖는다면 어울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떼어 버려야 할 것, 범죄로부터 생겨난 미움은 하나님의 성령의 산물이 아니라 마귀 사탄의 속성이기 때문에 천국의 시민에게는 있어서는 안되는 항목이다. 자신의 욕심으로 인한 분노, 형제에 대하여 은혜롭지 못한 표현을 일삼는 자는 천국에 합당치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가진 속성대로 마귀를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 가게 되는 것은 기정 사실이다. 우리의 선이나 의가 천국의 조건이 아닐지라도 천국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천국은 죽어서만 가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마음 중심에 현실로 존재하고 그 천국과 지옥은 그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표현되어 지는 것이다.
Ⅳ.화평의 복음(23~26)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오늘 본문의 마지막은 하나님을 향한 제사와 형제와의 관계가 별개가 아님을 증거 한다. 우리나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가 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나 예배를 대단히 귀중하게 다루는데 주님은 그것에 앞서야 되는 것이 이 지상에서도 형제와의 화평임을 가르치신다. 단적으로 말해서 형제와 불화한 가운데 드려지는 예배나 제사나 제물 모두는 주님께서 받지 않으시겠다는 두려운 말씀이다.
우리는 대개 어떤 경우에도 예배는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옛 계명을 비교하는 교훈 속에서 역시 미움으로 드리는 가인의 제사와 믿음으로 드리는 아벨의 제사를 상징적으로 생각나게 한다. 하나님과 화평을 가진 사람은 이 땅의 형제, 자매들과도 당연히 화평을 이루어야 함도 이 교훈은 가르치고 있다. 바꾸어서 말하면 형제와 불화한 사람은 아직 하나님과도 평화를 누리지 못함을 이해하게 한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이 올바른 관계는 반드시 옆으로 수평적인 관계를 이루게 되어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더 깊은 의미로 가르쳐 주고 계신 것이다.
형제의 원망 소리가 들리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책망 소리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피로 이루신 화평을 옆으로 형제와 더불어 나눌 수 있기를 …
다음으로 연결되는 송사의 문제도 사랑의 법에 의해 사는 천국백성에게 합당치 않다고 가르치신다. 언제나 법으로 쉽게 가려 하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딤전1:9~10)라고 말 함으로서 법은 義의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없음을 가르친다. 가능한 한 법정에 가기 전에 화해 하는 것은 모든 면에서 분명히 이득이 된다. 그럼으로 주님의 이 가르침과 당부는 대단히 중요한 현실적 교훈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교훈은 역시 바울 사도의 로마서 13:8~10의 말씀으로 정리가 될 것 같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의 결정이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에서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 가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율법을 채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영원 전부터의 계획이셨고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필요치 않은 것은 없고 다만 복음으로만 채워지며 완성된 복음만이 그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는 물론이고 사람과 사람 즉, 형제와의 관계에 비로소 화평이 가능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랑의 법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천국백성이라고 할 수 없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강한 경계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사실에 신비와 감사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사랑의 법 성령을 의지하여 완성된 복음 속에 사는 여러분 모두에게 성령의 역사로 날마다 율법의 요구가 채워져 그러한 천국백성의 모습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날마다 구원 받는 사람을 더하시는 은혜의 역사가 함께 하시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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