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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세상적인 기준에서 판단 할 때는 복이라고 할 수 없고 영원을 사모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천국의 시민 다운 모습이라고 이 말씀의 이해 기준을 먼저 생각 했었다. 이 네 가지들의 이해가 불가능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조건들도 그렇고 거기에 따르는 약속도 오늘의 시대에는 별로 귀하게 여겨지지 않는 항목이 되고 있다. 배고픔이나 가난함을 모르는 시대, 천국의 중요성이 이해 안 되는 시대라서 더욱 비극적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①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②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③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④그들이 배부를 것이다.”(3~6) 라는 네 가지 조차도 오늘의 시대에는 별로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제목들이다.
오늘 주어지는 말씀들 역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쫓겨 다니며 숨어서 예배 하면서도 그것을 감격으로 여기던 시대에는 분명히 큰 위로와 소망의 이유가 되었겠지만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는 멀게만 느껴질 수 있는 시대, 그래서 이 시대를 암흑이라고 우리는 말하는 것이다. 진리를 이해 못하는 것은 칠 흙 같은 어두움으로 인하여 빛이 멀리 퍼지지 못하는 상황을 의미하고 현실의 가치 자체가 오감(五感)의 만족에 집중되어 있어서 영적이라든가 하는 신령한 것은 가치평가가 불가능한[기준을 잃어 버린] 시대가 어두움이 점점 깊어지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영적으로 깨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이 더욱 가슴깊이 다가오는 시대이기도 하다. “…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b)
주님께서 주시는 경계는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17:26~30) “롯의 처를 생각하라”(32)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예언은 한 가지도 빗나감이 없이 성취 되었고 앞으로 남은 예언도 반드시 성취 되리라는 확신 때문에 이러한 무딘 세대들조차도 반드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안타까운 일이다. 문제는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고 고집 부리던 사람도 다시 오실 심판 주 앞에 서야 할 것이기 때문에 안타까운 것이다. 이러한 안타까움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셨고 바울이 가졌고 오늘 같은 믿음을 가진 우리가 갖고 있다면 이 불신의 시대에 우리의 후세들을 어떻게 주님과 대면하게 해야 하는 안타까움을 가지면서 이 팔복(八福)의 뒷부분을 생각했으면 한다. 앞에서 4가지의 복은 주로 자신의 성숙을 다루고 있는 내용이었다면 나머지 부분은 이웃과의 관계의 성숙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복 받은 사람들
1.긍휼히 여기는 자(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불쌍히 여기는 사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의 속성가운데 우리가 가장 감사해야 할 부분이다. 현대인들에게 긍휼을 찾아 볼 수 있을까? 긍휼은 포악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요즘 사람들은 스스로 포악하게 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영화나 게임이나 폭력 물을 통해서 대리적으로 포악성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긍휼의 하나님’[출34:6; 삼하24:14; 느9:31(주의 긍휼이 크시므로 저희를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시119:156]으로 성경은 소개 한다. 세상의 일반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남들보다 낳은 위치에 있으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받아 주는 것은 고사하고 이해해 주지를 못한다. 그래서 빗대어 나온 말이 ‘개구리 올챙이 시절적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같은 어려움 속에 있다가 자신의 위치가 바뀌고 나면 함께 자라고 살던 사람들 조차도 이해해 주질 못한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러신 분이라면 십자가의 은혜 같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수많은 군중들의 불행한 운명을 바꿔 주시기 위하려 저들의 비극적인 질병과 고통을 치료해 주시면서도 그들의 잠시 동안의 굶주림도 불쌍히 보셔서 먹을 것까지 챙겨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15:32; 막8:2)
우리 부모들은 자신의 힘을 다하여 가르치는데도 배은망덕한 아이들을 이해 하기 힘들어 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 그렇기 대문에 자신의 들인 공이나 희생을 생각하면 자신에게 대해 오는 자녀들의 태도를 참지 못하는 것이다. 허리가 휘도록 돈 벌어서 공부 시켜 놨더니 ‘우리 부모는 무식해서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무서운 말을 하고 말 때 어머니나 아버지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자녀들은 자녀들 대로 어려운 경쟁의 시대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애쓰는 자신을 이해해 주지 못한다고 부모를 원망하고 투정한다. 서로에 대해 원망과 불평하는 마음 뿐이고 서로 간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란 없다.
그러나 신앙 하는 사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용서를 맛보고 이해 하는 사람은 상황이 다르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셨다면 벌써 지옥으로 갔어야 마땅한 나 같이 천하고 죄 많은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지금 까지 참으시는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비로소 긍휼을 알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큰 죄 용서를 받은 사람 만이, 하나님의 진정한 긍휼을 맛본 사람만이 긍휼을 알고 남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의 긍휼을 맛본 사람만이 옆의 사람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것이다.[나도 알지 못할 때는 저랬었지!]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의 형이 동생을 이해 못하고 불쌍히 여기지 못한 것은 용서 받은 감격을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불평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렇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15:29~30) 죄 사함의 감격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못하는 것은 사랑 받아본 경험이 없이는 사랑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라는 말씀이 율법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씀역시 십자가의 은혜 아래서 이해 할 때 나 자신이 하나님의 한량없는 긍휼을 입었기 때문에 옆에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므로 다른 사람이 감격하는 복을 나눌 수 있다는 복음적 의미로 이해를 해야 한다. 가장 구체적인 긍휼의 모습은 십자가의 주님으로부터 배운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23:34) 그러므로 진정한 하늘의 백성이라면 연민을 갖지 말아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2.마음이 청결한 자(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깨끗한 사람] 이 말씀은 3절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란 말씀과 의미가 연결 되는 말씀이다. 다윗은 시24:3~4에서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주님께서도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눅11:34~36)는 말씀도 육신의 눈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 육신의 눈에 들어 오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눈으로 다시 이해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세계관(世界觀-Weltanschauung)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 라는 흔한 말도 있다. 우리 각자의 가진 내면적 가치관에 따라서 모든 사물과 생각은 판단되어 질 것인데 그 마음의 자리를 누가 지배 하느냐에 따라 가치 평가가 달라진다.
현대인(現代人)들의 마음에는 무엇이 보일까?
어떤 집이건 누가 사느냐에 따라 그 집의 모습은 바꿔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런 입장에서 우리의 마음 중심에 누구를 모시느냐 하는 것이 마음의 청결과 더러움의 이유가 될 것이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늘 뵐 정도로 청결하기 위해서는 거룩한 성령께서 주인으로 사셔야 가능할 것이다. 그럴 때 모든 상황과 입장에서도 하나님을 뵈올 수 있을 것이고 그러한 지속적인 삶의 마지막은 소망의 천국이 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엡1:18) 라고 기도하고 있다.
죄의 성격을 가진 우리 각자가 우리자신의 마음의 주인이라면 우리의 마음은 어두워 죄의 지저분한 것으로 더러울 것이고, 어두움의 세력인 마귀 사탄이 마음을 지배한다면 더욱 절망적인 지옥만이 충만할 것이다. 우리 사람은 스스로의 마음을 거룩하게 닦을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께 맡길 때 청결은 유지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청결한 마음을 가질 수도 유지할 수도 없다.
우리를 죄로부터 깨끗케 하시고 정결케 하기 위하여 죄의 값을 십자가에서 감당하시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고 성령께서 와 계시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지속적인 성결의 삶만이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뵈옵고 우리 인생이 끝나도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뵙는 천국에서 긍휼의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영광된 삶이 될 것이다. 할렐루야!
3.화평케 하는 자(9)“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평화를 만드는 사람] 이 말씀을 이해 하려면 반대 의미를 생각해 보면 역시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화평의 반대는 혼란과 싸움이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잔치 자리에서도 초상집에서도 곧잘 싸움을 일으키는 것을 본다. 교회당에 찾아와 배고프다고 하면서 돈을 달라고 해서 밥을 주겠다면 입에도 못 담을 욕설을 퍼붓고 간다. 그들은 배가 고픈 것이 아니라 술이 고픈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은 왜 그럴까? 근본적인 조화가 일그러진 사람들이라서 그런 것이다. 화평이란 말은 사랑이란 말과 조화를 이루는 말이다. 사랑이 있어야 화평이 되는 서로 사촌정도의 촌수를 가진 말이다.
화평 역시 근본이 바로 되어야 가능한 부분이다. 이 우주의 조화를 흐트러짐 없이 지속적으로 운영하시는 하나님의 조화는 이 지구촌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사람의 기술은 아무리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어 두어도 전체와의 조화에서는 언제나 오래 가지 못한다. 온 인류와의 화평을 위한다고 일으키는 전쟁도 부수고 죽이는 아우성으로 계속되어 또 하나의 부조화를 만들 뿐이다.
화평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로 일그러진 이 역사에 화평을 위하여 오셨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2:14~15) 그러므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평의 기초를 세우셨고 십자가가 바로 화평의 기초라는 사실을 바울은 다시 선언 한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1:20~22)
야고보는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7~18)고 위로부터 주어지는 화평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위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는 자는 이웃과 자연과 자신과도 화평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할렐루야! 그렇기 때문에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움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뒤집어 말하면 나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가장 구체적인 모습은 어디를 가든지 화평을 만드는가 아니면 혼란과 싸움을 일으키는가 하는 것으로 판단이 가능할 것이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여러분이 가는 어디든지 화평과 조화를 이루고 평화가 넘치는 화평의 도구들이 되시길 …
4.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10)“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이 말씀 역시 뒤집어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자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달게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세상에서 누구도 핍박을 즐거워 할 사람은 없다. 참으로 신앙이 아닌 이상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특히 요즘 사람들은 신앙 하는 것이 힘겨우면 쉽게 그만두고 어려움이 없는 곳으로 쉽게 옮겨가 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결코 복된 자세가 아니다. 베드로 사도는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19~21)고 격력하고 다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4:15~16)고 권면하고 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의미함을 다음 두절에서 확인해 주고 있고 역사 속에서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런 전례를 남겨 두고 있다. [헬, dioko, 추적하다, 구박하다, 박해하다] 이 말씀은 믿는 것 때문에 누가 너를 뒤쫓으면 행복하다는 말이다. 주님을 잘 섬기는 것 때문에 핍박을 하기 위해서 뒤쫓는다면 그것은 나의 신앙을 키우는 기회가 되고, 나 자신이 모범적인 신앙을 하는 것 때문에 그 것을 본 받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뒤 따른다면 그것 역시 주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 오히려 이 시대는 핍박이 없어서 신앙이 힘이 없고 약해지고 있는 모습들을 많이 본다. 믿음으로 인하여 핍박을 기쁘게 감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천국이 확보된 사람이다.
“나의 제자라는 이유로 모욕당하고 박해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비난 받을 때 너희는 행복하다.[현대]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11~12)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핍박을 받는다는 각오로 주님을 섬긴다면 사람의 위로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상을 누릴 것이다.
이 부분에서 지나치지 말아야 할 내용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사실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한 것이 아니라 ‘받은 자’는 이라고 한 것이다. 미래는 얼마든지 결심할 수 있지만 그것의 실현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 믿음 때문에 이미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핍박을 받고 있는 사실적인 것이 복이 있다는 교훈이다. 그러므로 믿는 것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은 울 문제가 아니라 웃을 문제다. 믿습니까?
내가 바르게 믿음 생활을 잘하기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이 있다면 기뻐하고 즐거워 해야 할 일이요, 성숙한 믿음의 사람만이 그것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에 천국의 상을 확신할 수 있다.
믿음 생활을 편하게 하는 것은 분명히 복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어렵게 하면서도 그것을 견딜 뿐 아니라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늘의 상급을 기대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그럼으로 편한 믿음만 자랑할 것이 아니라 핍박 받는 믿음은 더욱 자랑할 이유가 된다. 할렐루야!
Conclusions: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맛본 자는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 주님을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마음이 청결하여 시장 바닥에서도 전쟁터에서도 하나님을 만나 뵙는 복을 누릴 것이다. 화평의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사람은 아무리 인심이 사나운 가운데서도 화평을 이룰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죄로 인한 고통이 아니라 의를 위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핍박을 기쁘게 감당할 것이고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영광과 생명의 면류관은 영광의 천국에 준비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이 말씀 듣는 여러분 모두가 이러한 복 받은 사람으로 남은 생애를 살고 또 다른 사람과 사회와 세상에 복을 끼치는 삶이 되시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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