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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계보와 탄생의 배경을 기록한 마태는 연이어 주님의 탄생의 주변 상황들을 우리에게 들려 주고 있다. 이 땅에 죄의 형벌을 중지시키고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여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주변에도 반응들이 각양각색(各樣各色)이었음을 본다. 간악한 사람들은 언제나 이 전체 역사의 바른 흐름을 위하기 보다는 언제나 자신 각자의 이익을 헤아려 반응하는 모습들이고, 약하게 죄를 지시기 위하여 어린아이로 탄생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탄생에 따른 반응의 모습들이 죄와 상관없이 다시 오실 영광의 주님 앞에서는 반드시 정죄 되고 심판 받게 될 것이라는 입장에서 초림 예수와의 간격을 보이게 될 것이다.
자신이 분봉 왕으로 있는 데 또 다른 왕이 났다는 데서 그 새로운 왕에 대한 경계심과 함께 헤롯과 일련의 정치 집단들은 견제 하려고 신경을 곤두 세우고, 메시야의 예언들 들었음에도 육신의 안녕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 심령이 어두워져 오신 메시야를 환영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과 자신이 가진 예언을 신앙적인 방향에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 보다는 자신의 정적이 되려는 탄생이라고 생각해서 제하려고 이스라엘의 메시야의 탄생의 장소를 묻는 헤롯에게 선지자의 메시야 예언의 말씀을 찾아 주는 종교 지도자들의 그릇된 성경 적용 또한 우리에게 많은 경계를 주고 있는 안타까운 교훈이다.
그러나 불리한 자신의 처지나 입장에 관계없이 예수를 잉태하여 탄생한 마리와 자기 땅에서 환영 받지 못하지만 먼 나라로부터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고 찾아와 경배하는 동방의 박사들이나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때를 지키다가 메시야 탄생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목자들과 같은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심 자체로 감격하고 경배하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의 단순함이 오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뒤를 따라야 할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본 받아야 할 삶의 모습인 것이다.
Ⅰ.여러 계층의 사람들의 반응을 본다.
(1)헤롯 왕 때에; (3)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1.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역사적 사실로 전달 한다.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눅2:1~3)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단순한 한 종교의 경전의 기록으로 머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측면을 보는 데서 깊은 의미를 가진다. 나중에 바울 사도는 로마로 잡혀 가기 전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이런 사실을 증거하여 “…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행26:26) 라고 그리스도의 삶과 희생을 증거 한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역사와 사실 앞에 분명한 사실로 나시고 자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일생 역시 신비에만 가려 진 것이 아닌 역사적 사실이다.
2.주님의 탄생을 달가워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①자신의 위치를 염려하는 정치적인 사람들이다.
헤롯 – BC 37에 씨저에 의해 유대의 분봉 왕으로 임명되어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거대한 제3 성전을 지어 줄 정도로 권모 술수에 능하고 유명한 폭군에다가 일세기의 영화들의 화면에 무려 10명의 아내를 거느릴 정도의 언제나 음란한 왕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사람이다. 예수께서는 이 헤롯을 간교하다는 데서 “여우”(눅13:32) 라고 표현 하셨다. 언제나 자신의 입지를 저울질 하는 간교한 정치인에게는 구원이니 생명이니 진리니 하는 것들이 거북스러운 종교 구호로만 들릴 뿐이다. 주님은 계산 없이 단순한 자들에게 힘이 되시고 능력이 되시는 분이시다.
②여기에 이용당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있다.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예언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계시와 예언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권위와 존경만을 지켜 가려고 외식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정작 메시야가 탄생했다는 이방인 박사들의 전달에 감격과 기쁨 보다는 위험과 두려움에 몸을 사리게 된다. 메시야의 오심을 당연히 자신들이 먼저 알고 증거 해야 할 것인데 오히려 이름 모를 동방의 이방인들로부터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는 소리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의 소식이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깨어있지 못하고 무사 안일 속에 있는 신앙의 사람들이나 권력자들은 다시 재림 하실 주님 앞에서도 마찬 가지가 될 것이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계6:15~17)
적어도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는 영적으로 깨어서 때마다 일마다 주께 하듯 살아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감격으로 맞을 수 있기를 …
평화의 왕이 오셨는데 정치와 종교 지도자들의 혼란의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하기를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3) 라는 말씀이 무슨 말인가! 은혜를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러할 것이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7~8) 얼마나 야비한 주문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세주를 정치적인 힘으로 제압 하려는 어리석은 시도 그것은 정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 일 뿐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막으려는 시도를 하는 자는 결국 자신이 그 올무에 걸리고 말 것이다. 나중에 진행 되는 헤롯가(家)의 집안 싸움과 내분의 비참한 모습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3.그리스도의 탄생을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 있다.
자신들의 지위와 입지를 가장 귀중한 것으로 이권 집단과는 반대로 이 땅에 처음 오신 메시야를 반기고 기뻐했던 사람들도 마태나 누가는 기록해 주고 있어 음지와 양지의 양면을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는 사람은 자신의 입장 보다도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언제나 맹목적(盲目的)일 정도의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순수한 사람 단순한 사람을 기뻐하신다. 올바르지 못한 정치가들은 언제나 계산적이다. 앞뒤를 다 헤아려 보고 상대가 이렇게 나오면 저렇게 대응 하는 것 까지 다 계산을 해 놓고 처신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얼마나 고달프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 은혜 받는 사람, 쓰임 받는 사람은 자신의 입장이나 처지 보다는 언제나 하나님의 명령이 우선인 사람들이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는 언제나 은혜를 받는다. 온유한 사람 겸손한 사람은 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어떤 경우에든지 끝에는 언제나 좋게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말씀을 수용하고 받아 들이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어떤 경우는 시행착오를 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결말은 견고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1b~3)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9~12)
(1)동방의 박사들이다. 이스라엘 안에서 수 천년 전부터 예언되어 오는 메시야의 오심을 맞고 즐거워 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탄생시킨 요셉과 마리아 부부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예수께서 이스라엘만의 구세주가 아니라 온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나타내시고자 이 은혜의 역사에 역시 이방인들을 참여 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 “박사들” 이라고 번역된 원문의 의미는 [헬, magos, 영magician] 점성술사(占星術事) 이거나 천문학자(天文學者)인 것으로 보일 뿐 정확한 신분(身分)이나 출발지(出發地) 수(數) 어느 것도 정확한 것은 없다. 성경 속에는 다수의 이방 선지자나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사실들이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민수기 22장의 발람이다.
그러나 이들은 땅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기 보다는 늘 하늘의 징조를 살피며 사는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다. 별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자로 이해 하는 부분들을 요한 계시록에서도 읽게 된다. “…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1:20) 정확한 성경의 계시를 받지 못했던 입장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베들레헴이 아닌 예루살렘으로 갔고 이것이 온 예루살렘을 벌집 쑤시듯 소란케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지 못하면 그리스도를 바로 만나지 못함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통한 바른 계통의 계시를 받지 못한 이들은 별의 가는 방향을 보고 유대인의 왕의 도성인 예루살렘으로 찾아 간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을 것이고 이러한 그들의 판단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두려움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막연하나마 별(하나님의 사자)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이었고 나중에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지시를 바로 받아 헤롯의 간교한 부탁을 물리치고 자신들의 고국으로 바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들의 귀중성은 깨어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직접적인 계시를 받지는 못했어도 어두움의 역사 너머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사모하는 역사의 파수꾼들이었다는 것이다.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①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②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③보배합을 열어 황금(불변하는 가치로 왕)과 유향(성전 제사의 분향재료)과 몰약(시체를 염하거나 십자가에 사형수에게 고통을 덜어 주는 마취제로)을 예물로 드리니라”(9~11) 이 드려진 예물에서도 예수를 왕이요 하나님으로 인간으로 죽어 장사 지낼 속죄제물로 묘사한다는 성경 학자들의 견해이다. 여기에는 예배의 자세가 역시 나타난다.
이것은 오늘 모든 이방인 신자들의 전형이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엡2:12~13)
(2)양을 치는 목자들이다. 사실 이들이 목자들보다 먼저 인 것으로 보이고 박사들이 귀족의 계급이라면 이들은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다.
눅2:8~20
“(8)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18)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19)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20)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Ⅱ.계시를 대하는 자세들의 차이를 본다.(4~6)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왕은 자신의 위치를 확실히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탄생을 성경이 어디라고 지적하고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한 옳지 못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그 권력의 하수인 노릇하고 있는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은 역시 자신들의 안일을 위하여 귀한 예언을 찾아서 제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록된 말씀을 갖지 못한 박사들은 희미한 자연 계시인 별을 따라 그 먼 곳을 찾아 온 석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오늘도 성경을 대하는 차이가 이와 같을 것이다. 소설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무게를 더하기 위하여 적절한 한 구절을 찾아서 인용할 수도 있고 여러 모양으로 성경을 구원의 메시지로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권과 견주어 이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아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신앙의 모든 행위와 바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고 소화 해야만 한다. 우리의 생각이나 가치 판단 조차도 주님의 말씀 위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까마귀⇔까치]
기록된 말씀을 그대로 순종함으로 생명을 풍성히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
Ⅲ.탄생의 장소적인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1, 5~6; 눅2:1~4)
1.베들레헴.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1);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5~6)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미5:2)
2.짐승의 우릿간, 구유. [눅2: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7)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12)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16)]
오늘 제목으로 잡은 가장 중요한 교훈을 여기서 본다. 왜 하나님은 하고 많은 이스라엘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베들레헴에서 나게 하셨을까? 예루살렘도 있고 그 밖의 역사적인 장소들이 많기도 한데 왜 유독 베들레헴일까? 여기에도 깊은 뜻이 담겨 있음을 본다. 그 이유를 성경은 여러 가지로 기록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뜻은 더 깊은 곳에 있다.
“베들레헴”은 본래의 의미가 “떡집”이고 짐승의 우릿간 구유에 나신 것 자체가 에덴에서 범죄 하여 생명과를 잃어 버리고 쫓겨나 짐승으로 전락한 모든 죄인 된 인류에게 먹고 살 수 있는 생명의 떡이 되기 위하여 떡집인 베들레헴 짐승의 여물통 위에 나신 것이다. 그러므로 베들레헴의 구유에 나셨다는 것 자체가 구세주로 나셨음을 말씀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 서두에서 벳세다의 언덕에서 굶주린 5천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기적의 떡을 풍성히 먹이신 후에 이 신비를 말씀하신다. 53~57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예수께서는 이 떡을 가리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요6:48~51)
이래서 주님은 이것을 기념하라 말씀하신 것이고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 함으로서 영적으로는 생명의 떡과 생명의 음료를 마시는 것이다.
과거에 주님을 알기 전에는 잡혀 죽기 위한 짐승 같은 가치 없는 인생이었던 우리(나), 그러한 우리(나)를 살리시려고 죽어 먹히기 위해서 짐승의 우릿간에 오신 예수, 그 희생을 의지하고 그의 살과 피를 먹는 자 마다 생명이 풍성 하시기를 주님의 복되신 이름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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