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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배 전도자
롬 4:18~25 2003-12-18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아브라함을 말할 때 우리와 같은 복음 시대의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율법서 라고 분류하는 창세기에 기록되고 있긴 하지만 아직 율법은 주어지지 않았고 믿음으로 인정받는 사람이라는 데서 그렇다. 사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전에 인간의 범죄를 미리 아시고 가입한 것이다.[“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3:19)]

아브라함을 복음 시대의 사람이라 하는 이유는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믿음으로 산 사람이라는 데서 그렇고 바울조차도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갈3:8) 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이지만 성경은 그렇게 우리에게 전하고 있고 예수께서도 지상에 계시면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고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가 오늘 우리와 비교될 수 없는 신앙의 사람이라고 평가되는 이유는 우리처럼 明明白白한 증거를 받지 못한 가운데서도 역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고 행했다는 사실이다. 무슨 말씀인고 하니 그는 우리처럼 믿음의 선진들을 갖고 있지 못했다. 기록된 성경도 믿음의 위인도 아무도 없었다.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어떤 방법을 통해서 받았는지 분명히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의 태생이 우상의 중심지인 갈데아 우르, 그것도 우상을 파는 데라의 아들이었고 설령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지라도 우리처럼 확신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음에 분명하다.

그가 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환상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고(자식이 없는 가운데 늘 그것에 관심을 가지다 보면 ‘네 자손이 바닷가에 모래 같으리라는 …), 지나는 바람 소리로 생각해 버릴 수 있는 소지는 얼마든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주님의 부르심을 좇아가는 것을 보면 참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아시는 분이시고 아브라함을 정말 잘 선택하셨다고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수많은 증거를 받은 우리들은 얼마나 믿음생활을 더 잘 해야겠는가? 하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고개 수그려 진다.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 증거들을 보면서도 여전히 적극적이지 못한 우리의 믿음생활은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4:48)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러실 것 같다. “너희들은 얼마나 더 봐야 믿고 열심을 내겠느냐?” 우리는 이 믿음의 위대한 영웅 앞에 오늘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나중에 주님 앞에 설 때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할 것이다.

Ⅰ.아브라함의 믿음은?(18~19)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고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은 과연 어떤 것일까?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신앙은 1년 짜리 적금을 매달 부으면서 날을 헤아리는 ‘옳지 이제 몇 달 남았구나!’ 하는 식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 가면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걸 믿음이라고는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사람들이 주님의 약속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예금이나 보험 증서 같은 보이는 증서는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그것(증서)보다도 더 확신하는 것을 원하신다. 그리고 사실은 우리에게 이러한 증서는 주어져 있다. 이것은 믿음의 세계에서는 너무나 확실히 통하는 증서인데 그것은 바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함께 생각하는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에게는 그런 것조차 없었다.

1.가능성을 보면서 기대하는 것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람이 아직 가능성이 있는 것을 믿는 것은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평범하게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런 사람이 아들을 낳았다고 해서 기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이 닫혀 있는 사람으로 시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이 역사 속에서 그의 일을 감당할 사람들을 선택하심에 있어서 언제나 인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별로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을 부르시고 쓰셨다. 오늘 우리 각자는 어떤가? ‘나는 하나님이 아니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라도 사회적으로나 시대적으로 성공할 배경과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많은 인물들을 낱낱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아브라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자기 형제 나홀이나 하란이 자식들을 낳았음에도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이 無子했고 사라의 생산능력은 정지되었고 아브라함도 오늘 본문을 비롯해서 인용된 창세기의 말씀들처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 있었고 오히려 가나안에 들어 올 때도 하란의 아들인 조카 롯을 데리고 나왔다.

인간적으로 계산한다면 아브라함보다는 자식을 잘 났는 나홀이나 하란이 더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는 것이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산이 불가능한 폐인인 아브라함을 택하셨다는 사실이다. 이후에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창15:2) 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봐도 아브라함에게는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에 의지할 것이 많고 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습게 여겼다. 그래서 바울은 고백하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아브라함은 자식 못 낳는 이유 때문에 멸시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어려움을 겪는 신앙의 사람들의 고백을 듣는다. “내가 잘 되고 잘나갔다면 아마도 믿음에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약하게 하셔서 믿음에 머물러 있게 하셨습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감사해야 한다. 사실 영원 속에서 믿음보다도 귀한 것이 없는데 오늘 나 자신이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함께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많이 감사해야할 조건인가? 오늘도 실패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그럴 때마다 이렇게 위로하시기 바란다. “주님께서 나를 하늘의 영원을 상속하게 하시려고, 믿음에 머물러 두게 하시려고 이런 일들을 당하게 하시는 구나!” 할렐루야!

2.모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가능성을 두고 기대를 꺽지 않는 것이 믿음이다.

인간의 판단은 끝나 버렸지만 하나님의 판단을 남겨두었다.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불신의 사람들은 보이는 것으로 모두 판단해 버린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최종적인 절망의 기미를 보면서도 아직 하나님의 최종적인 판단은 남아 있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왜 오늘 본문을 “자기 몸의 죽은 것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을 알고” 라고 기록하지 않았을까? 사실 인간적인 면에서는 그렇게 기록해야 옳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는 자신을 아직 죽지 않은 상태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인간이 모두 포기하며 손을 털고 일어설 때 하나님은 새롭게 시작하시는 분이시다. 믿는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최종적인 상황의 판단은 아직도 미뤄둬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판단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실 탄식과 절망은 미루어 둬도 괜찮다. 마9:24; 막5:40; 눅8:53에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 대한 반응에서도 그렇다.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사람들은 장례를 준비하는데 거기서도 주님은 생명을 보시기 때문이다.

바울 일행이 마케도니아를 떠나 드로아에 머물면서 안식 후 첫날 떡(만찬)을 떼기 위하여 모였는데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의학적인 판단은 이미 끝나 있었다]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행20:9~10)

그래서 신앙의 사람들은 막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가능성을 열어두고 물어야 하는 것은? “과연 하나님이 보실 때는 어떨까?” 라고 최종적인 결론을 남겨 두어야 한다. 아브라함이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었다. 상황이 완전히 마지막에 와 있는가? 그래도 하나님의 최종 판단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Ⅱ.아브라함의 믿음은?(19~22)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제가 믿기로는 계속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더욱 자라 가는 몇 가지의 단계들을 증거하고 있다.

믿음의 성장 단계를 본다. 사실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확고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는 명령에도 아버지가 죽기까지는 하란을 지나 유브라데 강을 넘어오지 못했고 하갈과 이스마엘의 사건이나 이집트에서 바로에게나 아비멜렉 왕에게 사라를 누이로 속이는 것들까지 올바른 신앙으로 봐주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들을 거치면서 믿음이 자랐다고 볼 수 있다.

1.절망적인 상황에 좌우되지 않았다.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19b) 두 사람 중 어느 한쪽에게도 인간적인 기대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 感情的인 존재인 사람들은 상황에 많이 좌우되고 어려운 상황에서 대부분은 믿음이 약해지고 계속 지탱하지 못하고 넘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면서 쉽게 “사람은 다 그런 거다!”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아브라함 같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 절망 같은 고난의 벽을 오르면서 오히려 믿음이 더 자라는 것을 본다. 아브라함은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라는 기록을 보면 절망적인 상황을 믿음으로 잘 극복한 예가 될 것이다. 오늘 나는 어떤가?

2.오히려 믿음이 더욱 굳건해졌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세상과 더불어 살다가 믿음이 점점 허약해지면 믿음은 이네 의심으로 돌아서게 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은 오히려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렇게 世上的인 어려움에서 믿음이 자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마귀는 밤낮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참소 하고 있다고 성경은 지적한다.(계12:10) 그러나 부정적인 환경에서 믿음이 더욱 견고해 지면 마귀는 참소 할 말을 잃게 된다. “…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욥에게서 본다. 아브라함이나 욥이나 모든 보이는 상황은 점점 절망이 되어 갔지만 오히려 믿음은 점점 성장하였다. 오늘 이 역사 속에 우리는 어떤가?

3.확신하는 믿음이었다.(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확신, plhroforevw, plerophoreo, - plhvrh" (가득찬, 충분한, 온전한, 심히 많은) +forevw (입다, 쓰다, 가지다) = 많은 양을 가져오다, 충분하게 되다, 완수하다, 전파되다]

“우리말에 하늘이 두 쪽이 나도 …” 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은 그런 것이다. 세상이 무너져 없어져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을 확신하는 자세가 되어 있을 때 그것이 비로소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귀한 약속은 이 세상의 어떤 일에도 절대로 영향받지 않는다. 이 역사 속의 어떤 사건도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계획하신 약속을 이행하시는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사실 이것은 사람들이 인정하던 부정하던 그것은 상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또한 이러한 주님의 약속을 함께 확신한다고 하는 것이 귀한 것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의로 인정되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처지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하나님의 약속과 어긋나가는 것처럼 변해 갔어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약속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을 확신하는 까닭에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22)고 기록되고 있다. 눈으로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입으로 내신 것이기 때문에 긍정하고 그러한 약속에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유효한 사람들이다.

4.자신의 바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확신했다. 사실 많은 신앙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오늘날 신앙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자기가 바라고 소원하는 것을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확신하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고 자신의 감정에서나 생각에서 나온 것임에도 그것을 철석같이 믿고 김칫국부터 먼저 마시는 잘못된 신앙의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욕망하고 소원하는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는 믿음, 나 자신의 기대는 점점 무너지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소원하는 믿음의 자세가 절실한 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칠성당에 정한수(정화수-井華水) 떠놓고 소원 비는 유치한 무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으로 변화 받은 존재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불교에서도 대단히 문제가 되고 있다. 모든 욕망을 다 버리고 자신의 업보를 모두 벗고 해탈하여 성불하는 것이 불자들의 목적임에도 대웅전 법당 앞에도 ‘염주 알’에도 ‘연등’에도 모두 ‘소원성취’ 라는 글들이 새겨져 있으니 부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무속신앙만을 충족시키는 또 하나의 샤머니즘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친척의 보호와 안전을 다 벗어 던지고 나그네와 같은 유랑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확신했다는 증거이다. 오늘 나는 어떤가?

Ⅲ.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도전.(23~25)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1.이 기록은 아브라함의 명예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를 위한 기록이다.

이 기록은 아브라함을 칭찬하기 위해서 위인전으로 써서 읽으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같은 입장에 있는 오늘 우리를 교훈하기 위해서 기록되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전서 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23~24f)

2.다만 믿음의 내용에 있어서는 아브라함과 우리와의 차이가 있다.

“①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②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24b~25)

첫 번째는 아브라함과 같이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 하”(히11:12)게 하신 동일한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신 그 하나님을 믿는 데에서는 같고 두 번째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믿고 순종하는 것을 오늘 우리에게 요구 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25) 서두에서 그런 말씀을 나눴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분명한 증거가 있고 수많은 증인들이 있으므로 핑계치 못할 것이다.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 우리가 핑계치 못할 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있으므로 변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3.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요구한다.(25)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가능성을 보면서 기대하는 것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으며 모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가능성을 두고 기대를 꺽지 않는 것이 믿음이다. 아브라함은 절망적인 상황에 좌우되지 않고 오히려 믿음이 더욱 굳건해지고 확신하는 믿음이었으며, 자신의 바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확신했던 아브라함의 믿음은 오늘 불신이 범람하는 이 사회에서 아브라함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증거 해 주고 있다. 우리 각자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이름에 부끄러움이 없는 하늘의 사람들이기를 복되신 이름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