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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배 전도자
롬 10:9~17 2003-11-03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면...  
구약의 욥을 보자 그는 언제나 주님 앞에 긴장해 있었던 사람임을 확인한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욥7:17~18)

우리는 바울의 자기 민족의 버림받음에 대한 탄식과 함께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운 사랑의 신비를 고백하고 있다. 대개의 경우 이 말씀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은혜의 성취와 그것이 사실적으로 완성되는 구원의 현상을 설명하는 내용으로 인용되곤 한다. 그러나 당시의 박해 속에서 이러한 결단과 고백하는 행위는 목숨을 담보한다는 상황에서 오늘의 상황과 비교할 때 그냥 누가 물으면 답변하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구원의 감격을 고백하고 선언하는 적극적인 자세임을 깨닫게 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이해한다면 주님의 최후의 지상최대의 명령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구원받음의 감격을 선포하고 전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엄청난 우리 자신 속에서의 차이를 이해하고 적극적인 복음 선포가 남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한다.

Ⅰ.이 말씀에는 먼저 가정(假定)이 있다.(9f)“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That if you confess with your mouth] 그렇다! 우리는 분명히 전할 수도 있고 전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는 있다. 하지만 우리의 과거의 상태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전에는 영적인 것에 관한 무엇을 선택하고 버릴 수 있는 권리조차 없었던 영원한 죄의 노예로 절망에 있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할 필요가 잇다. 이러한 비극적인 사망의 감옥에서 자유를 얻게 된 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의 역사로 가능케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은혜로 주어진 이 엄청난 자유의 바른 사용에 대한 바울 사도는 권면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6:17~18) 는 은혜의 확인 후에 주어지는 당부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나 교회가 주님을 증거하기를 그만두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며 어리석은 선택이다. 그러한 선택은 결국 주님으로 인한 구원에 대한 감격을 갖지 못한 모습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과거에 경험한 놀라운 것이나 지금 경험하고 있는 기쁨의 이유를 자랑하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럼으로 언제나 가능한 주님의 사랑과 구원의 증거를 하지 않는 삶이란 주님과의 생명과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있지 못하다는 단적인 모습이다.

바울 사도가 이 글을 로마에 써 보내고 있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한다고 하는 것은 곧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가능한 고백이었다. 이 고백은 믿음의 사람들끼리의 시인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만나면서 인사하기를 “시저는 나의 주인이다!” 라고 말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아니요, 나의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인사했고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의 감격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인사하고 기꺼이 죽음으로 잡혀갔던 것이다. 오늘 우리 각자에게 있어서는 어떤가? 오늘 나에게 주님을 증거하지 않고는 견디기 힘든 감격이 있는가? 그렇다면 표현할 필요가 있다.

Ⅱ.주님의 이름을 증거 하는 것은 곧 구원받은 증거이다.(9f)“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 (10b)“…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f)"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조차 대단히 이기적이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최소한의 것들을 하려고 하고 어떤 것은 구원과 관계없기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어떤 적은 신앙적 과제를 감당하면서 구원에 대한 안심을 한다. 그런데 바로 오늘 말씀이 대개의 경우 그렇게 쓰인다. 하나님의 구원이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사실이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살아야 될 모습에까지도 등한히 여기는 우리 자신들을 보고 하나님께 부끄러울 때가 많다.

주님은 우리(나)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으로서 도저히 불가능한 일가지 하셨다.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것은 물론이고 창조주로서 지음 받은 인간에게, 그것도 죄를 가지고 절망으로 가는 간교한 인간들의 모욕과 침 뱉음과 욕설과 저주를 참으셨다. 그러한데도 나는 너무나 간교해서 구원 얻는데 관계되면 무엇을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그야말로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마23:24) 이기주의를 그를 섬긴다고 하는 예배에서나 삶에서 너무나 자주 드러내곤 한다.(예배 한번 빠진다고 설마, 수요일 날 성경공부 안 한다고 구원을 못 받는 것은 아니니까…, 주님은 다 이해하실 거야!) 주님과의 만남보다는 세상의 어떤 일이 더 귀중하고 (그래도 구원에 지장이 없으니까…) 적당히 신앙 생활 하면서 구원은 얻고 싶어하는 지독한 독선을 신앙에서조차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마치 음식을 죽지 않을 정도만 먹는 것처럼, 겨우 구원 얻을 정도까지만 신앙하려고 하는 엄청난 독선과 이기주의를 오늘의 믿는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본다. 이것이 바로 주님으로부터 호되게 책망을 받았던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의 ‘고르반’과 다를 것이 없고, 구원과 관련이 있고 없고를 우리 마음대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앞서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우리(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에조차 너무나 인색하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2~33)는 두려운 경고를 주고 계신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세상의 어떤 것만 못하다는 것인가? 사람들은 세상의 일도 너무 자주 이야기하는데 나를 절망에서 건지시고 지금도 구원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놀라운 은혜에 대하여 이야기 거리가 없는 나(우리)는 정말 구원받은 사람인가?

주님은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7:16~18)고 말씀하신다. 오늘 나의 행동은 그만 두고라도 입술의 열매는 과연 무엇인가?

지금도 주님의 사랑하심의 감격이 있다면 어찌 입술을 닫고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말씀이 걸림이 된다고 해도 문제이다.

또 주님의 약속이 나의 삶 속에 들어와 나의 것이 되기 전까지는 적어도 생명이 되지 못한다고 볼 때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f)"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 이러한 말씀들은 이미 완료형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오늘 나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자랑은 과연 무엇인가? “주님 때문에 …,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 나는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다는 고백이 사도 바울처럼 고백되어져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오늘 이 말씀을 함께 하는 여러분 모두가 매순간 삶의 이유로 남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밖에 없는 주님의 사랑에 불타는 사람들 되시기를 주님의 …

Ⅲ.주님의 구원을 증거 하는 것은 먼저 나를 위한 것이다.

(9f)“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 (10b)“…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고백은 그것이 나 자신의 유익임에 분명하다. 하나님의 약속이 어떤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전까지는 그냥 말씀으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고백되어지고 순종되어지면 그 말씀은 한 인간 속에 들어와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이루게 되고 그 결과 이 생명력은 주변의 사람들에게까지 누룩처럼 놀랍게 번지게되어 있다.

이러한 구원의 감격을 전하는 사람들의 삶을 평가하는 내용이 바로 (15b)"…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는 것이고 이 말씀은 이사야서의 인용이다. 죽음의 백성들에게 살 수 있는 소망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의 아름다움이야 말하지 않아도 귀할 것이다.

1.전(고백)해야 나 자신의 믿음이 확실해 진다. 우리는 흔히 남에게 주님을 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대문에, 사명이기 때문에,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라고 말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는 먼저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주님에 대한 확신은 내 입술로 고백되어질수록 강해지는 것이다. 다른 말로 얘기하면 나의 고백과 증거와 시인을 통해서 믿음이 자란다는 말이다. 우리가 남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면 반응은 여러 가지 일 수 있다. “그래요, 그렇지 않아도 교회에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인데 교회가 어디에 있어요?” 이런 반응은 기대하기 어렵고 전혀 부정적일 수 있다. “그렇게 좋으면 너나 많이 해, 나 원 참 별 미친 사람 다 보겠네!” 라고 거부할 수도 있지만 그 사람에게 했던 증거는 나 자신에게 되돌아와서 나의 믿음을 더욱 강화시킨다는 사실이다.

주님에 대한 확신이 약하거나 적은 사람일수록 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떤 사람들은 욕을 해대기도 하지만 그럴 때 비로소 주님께서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셨던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1~12 )는 위로가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증거 하는 것은 사람들의 반응 이전에 나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2.전해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더욱 확신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시면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는 말씀을 읽는다. 이 말씀을 역으로 이해하면 주님께서 자신을 증거 하는 곳에 함께 하시겠다는 언약이 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전혀 부정적인 반응이 올 때도, 욕설을 듣고 돌아설 때도 오히려 기쁨이 오는 이유는 주님은 자신을 증거 하는 자들의 말까지도 함께 해 주신다는 확신이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10:19~20)

성령의 임재, 임마누엘을 가장 현실적으로 느끼기를 바란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의 주되심을 증거 하는 것이다.

주님을 증거하고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은 그 증거를 듣는 사람들의 반응에 관계없이 나 자신을 위해서 복되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확인해 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복되신 이름으로 …

Ⅳ.주님의 구원을 증거 하므로 남을 구원에 이르게 한다.(14b)"…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각자의 입술로 시인하는 것에 대한 놀라운 약속을 나누고 있다. 여기서 시인이라는 말은 [homologeo - homou(같은 장소, 시간, 함께)+logos(말씀, 선언, 진술, 연설) = 동의하다, 즉 계약하다, 인정하다, 고백하다, 고백이 만들어지다, 감사하다, 약속하다]로 쓰이고 있는 한 곳의 예를 들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라는 말씀이다.

먼저 믿는 우리들의 신앙적 고백은 다른 사람들을 이 고백에 불러들여서 함께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된다는 말씀이다. 나 자신이 복음에 감격하고 그런 삶과 함께 그 삶의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하고 그것을 듣는 사람 또한 같은 구원의 선물을 누리게 하는 은혜의 역사를 하나님은 천사들에게 시키지 않으시고 우리 모자라는 인간들을 통하여 이루신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감사한가!

이것이 바로 바울 사도의 감격이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롬15:16) 이 은혜는 바울 사도에게만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오늘 나에게도 허락하심을 감사하십시다. 그래서 바울이 하는 기도의 부탁도 이것이었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6:19)

오늘 나의 감격에 찬 주님에 대한 구원의 고백이 다른 사람들을 구원에 불러들인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무엇보다도 이 고백은 삶이 동반된 고백 즉, 삶으로 드리는 고백이어야 더욱 기뻐하신다.

오늘 나는 어떤 것을 선택하겠는가?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내놓고 자랑할 수도 있고 내 속에 감추어둘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은 받은 은혜를 감추어 둔 것에 대한 경계를 말씀하셨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마25:26~27)

주님의 거져 주신 구원의 감격을 상대의 반응에 관계없이 고백하고 시인(是認)하는 복된 삶의 가치를 행하는 것이 나의 삶에 가장 귀한 가치임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이러한 삶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시인하고 증거 하는 것은 나의 구원받은 가장 사실적인 모습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연애하는 대상도 자랑하려고 안달인데 나의 받은 구원이 사람들에게 자랑하기에 너무나 미약하고 보잘 것 없는가?

무엇보다도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명령이나 인류 구원에 대한 방법이라는 말씀이전에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예수를 증거 할 때 나의 믿음이 더욱 확실해지고 믿음이자라며 기쁨이 충만해지고 성령이 함께 함을 확신하게 될 것이고 여기서 덤으로 나의 증거를 들은 사람을 구원하게 되는 놀라운 은혜가 있어지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나의 변화된 삶을 통해서 이 인류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신 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증거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역사인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이어야 한다.(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