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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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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3:1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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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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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열 둘을 세우셨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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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혼자 복음을 전하는 것은 지난 시간으로 마무리를 하셨다. 제자들이 몇 있기는 했어도 데리고 다니는 정도였고 반대자들의 대항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증거의 일은 좀더 범위를 넓혀 12제자들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도 능력을 주시고 생명의 복음을 전하게 하심으로써 복음증거는 본 궤도에 이르게 하신다. 그럼에도 이 3장의 나머지 부분도 순탄치 만은 않음을 본다.
20~ 친족들은 미쳤다고 붙들고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서기관들은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몰아 세우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 대해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는 설 수 없다는 교훈과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모독하는 일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가르치신다.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부르자 진정한 가족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주님 자신의 가족이라 증거하심으로 무리를 가르치신다. 이렇게 당시의 교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당시에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사실에 있어서는 3년간을 이 선택된 제자들을 훈련하시는 것으로 대부분을 보내셨고 물론 진리의 복음을 전하시는 일을 지속하시며 제자들을 훈련하셨지만 그들을 능력 있게 사용하신 것은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신 후 성령께서 오셔서 비로소 사도의 역할을 감당하여 교회를 세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계승되어서 세계속으로 복음이 확산하게 된다. 물론 공관복음에 이 제자선택과 파송이 다 기록되었지만 연결되어지는 내용은 조금씩 다름을 볼 수 있다. 누가가 주로 이 마가와 같은 순서로 제자선택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에 오르셔서 밤새껏 기도하신 후에 이 제자들을 선택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눅6:12). 그냥 즉흥적으로 제자들을 택하신 것이 아니라 밤새 하나님 아버지와 의논하시고 제자들을 선택하신 것이다. 일반적으로 구원받는 사람의 선택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선재적으로 사람들의 됨됨이를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고(롬8:29) 그들을 부르셨다는 기록을 본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일꾼들은 철저한 하나님의 선택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OT의 대 선지자들의 고백 속에서 이를 듣는데 특히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1:5; 사49:5)는 예레미야나 이사야 같은 선지자들에게서 듣는 고백들이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위하여 세워진 열 두 사도 역시 그런 하나님의 의향과 역사 속에서 부르심을 받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선택된 열 두 사람의 성경 속의 기록만을 살펴볼 뿐이고 그 이상의 이력들은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마지막에 거론되는 가룟 유다는 역시 구속의 역사를 위하여 그의 성향대로 사용되기 위해서 선택된 안타까운 인물이다.
Ⅰ. 세우신 목적(13~15)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능력을 따라 가려 뽑은 것이 아니라 선택에서부터 원하시는 자들을 부르셨고 이들을 항상 함께 있게 하시며 보내셔서 전도도 하게 하실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가지셨던 권능들을 주셔서 복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낫게 하는 우리 주님과 동일한 권능들을 그들에게 주셨다. 물론 이들이 주님주신 권능을 가졌음에도 때로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는 한결같이 주님을 떠났던 것을 보면 그때까지의 역사도 역시 OT적인 성령의 역사였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 것은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오순절날 성령의 세례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우리 주님 같은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내놓는 담대함을 볼 수 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13) 마가는 단순히 산에 오르셔서 제자들을 부르셨다고 하였지만 병행 구절인 누가는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6:12~13)라는 기록으로 장소적인 것뿐만 아니라 시간까지 전달해 주고 있다. 밤새껏 기도하시고 다음날 열 둘을 택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 주님의 사역은 산위에서 이루어지는 일들도 더러 있었지만 자신과 함께 복음을 감당할 열 두 사도 역시 산위에서 선택하셨음을 보게 된다.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13m)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면서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6)고 선포한다. 요즘 같으면 시험을 치거나 어떤 일을 시켜보고 거기에 우수한 사람들을 선택하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보기에 그럴싸한 사람들을 자신의 일꾼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람들의 됨됨이를 너무나 잘 아시고 또, 시키시는 일 자체가 사람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을 부르신 것이다. 이러한 의향 속에는 물론 하늘의 일 자체가 세상의 능력으로 감당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 고려하신 것은 다만 철저한 순종이었다. 이미 앞에서 베드로 형제나 요한 형제, 그리고 마태를 부르실 때 이미 그러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를 따라오라!”하셨을 때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1:18) 하였고 v20도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2:14도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는 이유나 조건 없는 순종을 가장 귀하게 보신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꾼의 영성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면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만이 교회의 일꾼 된 자격이다.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통하여 친히 주셔서 감당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일을 시키시는 데도 이것 헤아려보고 저것 재 보고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자세가 아니다. 이런 이치를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20)는 자세를 증거하고 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14f) 여기서 부터는 구체적으로 제자를 세우신 이유를 지적하고 있다. 이스라엘 속에서의 숫자 개념은 다른 문화권과는 많이 다르다. 특히 열 둘이라는 숫자는 OT의 야곱의 아들로 출발한 지파의 수로 복음 시대까지 연결되어지고 이 역사의 마지막을 예언하는 계시록에까지 계속되는데 인 맞은 지파의 수도 역시 열 둘로 연결되어 지고 있다. 나중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이 제자들에게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22:30)는 숫자를 말씀하심을 본다.
이 열 둘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신비로 봐야 하겠지만 하늘의 수를 3으로 그리고 땅의 수를 4로 곱한 것이라는 이론들이 있다. 이에 반해서 완전 수라고 하는 7은 하늘의 수와 땅의 수를 합한 것이라는 해석을 하기도 하지만 역시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서 확실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14m) 이것이 열 두 제자들을 선택하신 첫째의 목적이었다. 육신적으로도 주님께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전까지 함께 하면서 훈련받았고 더 밀접한 임마누엘은 저들에게 성령으로 함께 하심이 세상 끝까지 복음을 들고 가는 능력이 되었던 것을 본다.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14b) 두번째는 주님께서 삼 년이라는 세월동안 이스라엘을 중심하여 복음을 전하셨지만 마침내 성령의 능력으로 두려움 없이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는 목숨을 돌보지 않고 복음을 전한 것을 보면 주님께서 부르신 이유는 성취됨을 확인할 수 있다.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15) 이것은 주님께서 이미 1:26이나 앞의 v11~12에서 주님께서 행하셨던 권능으로 어두움의 세력을 제압하는 일은 이 땅에 복음전파와는 떼 놓을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권능의 역사였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증거하신 바 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 눅11:20) 이런 권능을 제자들에게 주셔서 우리 주님의 구속의 은총이 마귀 사탄의 수하에서 고생하는 모든 인류에게 놓임을 주시기 위한 것 또한 제자들을 택하신 이유의 세번째였다.
오늘 우리의 시대에는 이러한 부르심의 역사는 그의 복음을 순종하여 하늘로부터 거듭난 모든 하늘의 백성들이 동일하게 누리는 혜택이 되었다. 물론 그 중에는 오늘 우리 모든 성도들이 예외일 수 없음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Ⅱ. 복음을 위해 세워진 일꾼들(16~18)
이제 여기부터는 그렇게 불리움 받은 제자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우리는 열한명의 복음을 위한 일꾼들을 나름대로 생각하고 마지막 가룟 유다를 따로 생각하려고 한다. 여기 이름의 거론의 순서도 조금은 특별한 것을 보는 것은 부름 받은 순서이거나 형제 간들이 그대로 거론되기도 하지만 별명이 붙여진 것들도 독특한 표현이다.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16f) 앞의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14f) 한 내용을 반복하고 있는데 특히 우리 성경에서 읽는 것처럼 “세우셨으니[ποιέω, 만들다, 창조하다, 행하다]”라는 표현이 단순히 불러서 명령하는 정도가 아니라 새롭게 창조하신 의미를 가진다는 것에서 여러가지 이치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야곱의 아들들로 만드셨지만 온전한 통일과 화합이 되지 못했고 그런 온전치 못한 데서 마침내는 강대국들의 포로로 절락하고 말았지만 이제 모든 역사의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이루시는 새로운 열 두 이름은 새 예루살렘의 완성의 때까지 복음을 감당하는 데까지 소용되었다. 주님께서도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 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17:12)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고백 드리는 데서도 나타난다.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16b) 독특하게도 베드로를 첫번째로 거론하면서 당시 히브리 이름이었던 시몬은 물론 아람어 이름이었던 게바도 있었지만 헬라어 이름인 베드로라는 이름을 더하신 것은 사도들의 첫째 자리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통용어였던 그리스어 이름을 주신 것도 분명 세계적인 역할을 할 것임을 암시하기도 하였다. 물론 오늘의 가톨릭은 이를 지나치게 해석한 데 문제가 있지만 부르심에서부터 베드로의 이름이 첫 자리를 차지함을 볼 수 있다.
베드로는 나중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누구라고 하는 가에 대한 질문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는 고백을 드렸고 그 흔들림이 없는 믿음의 반석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리라는 약속을 하셨고 주님의 사역 속에서 그야말로 좌충우돌하는 일도 많았지만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신 후에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행2:14f) 최초로 완성된 복음을 사도들을 대표하여 전하는 중차대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물론 이방인에게 최초로 복음을 전한 것도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이 아니라 이 베드로였음을 볼 때 역시 우리 주님의 안목은 보통 사람들의 그것과는 다름을 볼 수 있다.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17) 시몬 다음으로 그물을 깁고 있다가 부르심을 받은 요한 형제를 거론하고 있지만 이들에게는 “보아너게[Βοανεργές]”라는 별명을 주셨다. 우리 주님께서는 마가가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우뢰의 아들’이라는 의미처럼 순간적이면서 강력한 번개와 같은 성격을 이미 내다보시고 붙이신 별명으로 여겨 진다. 이유는 눅9:52~53의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시면서 사마리아를 지나야 하기 때문에 먼저 사람들을 보냈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고 v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는 급한 성격을 책망하셨지만 이런 그들의 성격으로 인하여 붙여진 별명으로 보여 진다. 사실 성미가 더 급한 것은 베드로였지만 거기에 버금가는 이들 형제들의 성격을 앞서서 보신 것이다.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며”(18) 여기에서는 8명의 다른 제자들이 거론되고 있지만 베드로의 형제였던 안드레와 이미 세관에서 불르심을 받은 레위라는 이름을 가진 마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이 거론되고 있다.
“안드레[Ἀνδρέας,←ἀνήρ, 남자다운]” 베드로의 형제였음에도 중요한 곳마다 데리고 다닌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와 베드로가 함께 하지만 이 안드레가 제외되는 것의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이름이 의미하는 바로는 용기 있고 결단력이 있어 보이는데 전체적인 제자들의 위치에는 남달리 유명한 것이 아니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라는 말이 어울리는 이름으로 여겨진다.
“빌립[Φίλιππος, 말을 사랑하는 사람]” 공관복음에서 그의 활동은 침묵 되고 있지만 요한 복음에서는 심심치 않게 거론이 되는데 베드로와 같은 동네 사람으로(요1:44벳세다) 나다나엘을 주님께 인도했고(요1:45)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이 많은 무리에게 어디서 떡을 사서 먹게 하겠느냐는 질문을 받고(요6:5)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7)고 말씀드린다. 최후 다락방 만찬에서는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14:8)라고 하였고 요12:20~22에서는 헬라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소개하는 내용으로 기록되고 있다.
“바돌로매[Βαρθολομαῖος, 돌로메의 아들]”는 열 두 제자들의 이름가운데 네 번 나타나는 외에는 다른 기록이 없다. 여기 쓰여진 이름이 아버지의 아들로 기록된 것으로 봐서 별도의 이름이 있었을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이 사람을 빌립이 예수 그리스도께 소개했던 나다나엘(요1:46)로 생각하지만 분명한 근거는 없다. “마태[μαθήτρια, 하나님의 선물]” 2:14에 나타나는 대로 레위라는 본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이 기록한 복음서에 자신의 이름 앞에 세리라는 영광스럽지 못한 이름을 붙이고 있어서 그의 겸손과 진실성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도마[Θωμᾶς, (아람어의 어근) 쌍둥이]”로 NT에 무려 11회나 거론되지만 주로 의심을 가진 사람으로 자주 나타나지만 확인된 것에서는 믿음의 고백을 드리는 것으로 주로 요한복음에 많이 거론된다(18; 마10:3; 눅6:15; 요11:16, 14:5, 20:24, 20:26, 20:27, 20:28, 21:2; 행1:13).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Ἰάκωβος, 발 뒤굽치를 잡은]” OT은 물론 NT에 대단히 흔한 이름이다(42회). 세베대의 아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이 마가복음서에서는 작은 야고보라고 칭하기도 했다(15:40).
“다대오[Θαδδαῖον, 가슴]” 별로 거론되지 않고 누가의 기록에 보는 대로는 가룟 유다와 구분하기 위하여 야고보의 아들 유다로 기록되고 있다(눅6:16; 행1:13). “가나안인 시몬[Κανανίτης, 아람어에서 유래하여]” 행1:13에 Ζηλωτής, 셀롯인(열심당)이라고 한 것으로 봐서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전에 A.D. 6에 로마에 대항하여 궐기했던 국수주의였던 열심당원 중의 하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이 사람에 대해서 성경의 기록은 눅6:15과 행1:13에 두 번 나타날 뿐이다. 이 제자들이 성경에 생애를 끝낸 소수의 인물들이 있어도 성경의 기록 후에는 여러 전승에 나타나긴 하지만 신뢰할만한 기록들은 찾을 수 없는 것은 신앙의 부분에서의 전승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부풀려 지기도 하기 때문에 믿을만한 것이 못되고 다만 하나님께서 저들의 사역대로 복 주셨을 것이고 이런 궁금증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신 후에 원한다면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Ⅲ. 구원의 역사를 위한 선택(19)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신 제자들 중에 가장 안타까운 비극의 주인공으로 이름은 찬송함이라는 아름다운 신앙적 이름을 가졌지만 모욕의 이름이 되었고 역사 속에 영원히 남는 이 사람이야 말로 영원 속에 비극의 주인공일 수밖에 없다. “가룟[Ἰσκαριώτης, (אִישׁ קִריָא)]”은 지명으로 보이고 “유다[Ἰουδάς, יְהוּדָה 음력이다.]” 이 사람이 열 둘 중에 포함되어 함께 훈련을 받았지만 죽은 오빠를 부화시켜 주님께 감사하여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는 마리아에게 자신의 속내를 들어내고 만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12:5~6)는 요한 사도의 평가를 보게 된다.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13:29f)라는 기록으로 볼 때도 주님께서 제정을 맡기신 것으로 보는 데 어려움이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신을 신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한 것이고 마27:5에 보는 대로는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는 육신의 삶에서도 비극의 마무리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유다가 ‘본래는 선하고 쓰임에 합당한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되도록 그를 몰아갔는가!’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그렇지 않다. 유다는 안타깝게도 요한 사도가 판단하는 대로 본래 그런 사람이었고 이런 사람이야 말로 솔로몬의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16:4)는 전형적인 주인공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악한 사람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라는 기록으로 본래 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적당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고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셔서 전도도 하며 질병과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주셔서 복음을 더욱 널리 증거하도록 하셨다. 오는 나(우리) 역시 전혀 다르지 않은 생명의 능력을 받았음으로 부르심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할 것이다.
이 선택된 열 두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우수하거나 금 수저를 타고 난 사람들이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부르시고 그들이 복음을 위하여 일하는 데 필요한 능력과 권능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순종뿐이었다면 오늘 우리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가룟 유다는 땅에서의 부와 영광을 사모하다가 스승을 팔고 죽는 불명예를 얻었다. 이것은 전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성품 때문이었다. 좋은 성품 순종의 성품을 키워 합당하게 쓰임 받고 영원 속에서 영광을 누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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