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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막3:7~12 2026-09-13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안식을 주신 뜻이라고 가르치시고 한 손 마른 사람을 치료하셔서 모범을 제시하셨지만 이것이 오히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는 죽여 없애 버려야 하겠다는 사악한 의지를 확인하시고 안타까워하셨을 것이다. 그들에게 더 이상 진리나 바른 율법의 해석은 의미가 없음을 확인하신 것이다. 사람이 한번 삐뚤어지면 그것을 돌이키기 어려운 것도 역시 사람의 죄 된 성향 때문이 것 같다.

성경에 보는 대로도 예수 그리스도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출발이 다르기 때문이겠지만 너무나 다른 것을 볼 수 있고 창세기에서부터 구속의 완성을 이루기까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죄 된 인류 구원의 의지와 너무나 다름을 보게 되면서 하나님의 안타까움이 조금은 이해되는 것 같다. 흐트러짐 없이 변함없는 진리와 사랑으로 역사하시지만 그러한 사랑과 긍휼을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다수였고 이런 안타까움에 힘겨워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심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러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 계속적으로 부딪히게 되지만 그러심에도 그들의 사악함에 관계없이 진실과 공의로 그들을 대하고 사악한 저들의 권모술수에도 언제나 빛과 진리도 대응하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헤롯당과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하지만 주님의 또 다른 자세는 어떤 경우에도 의미 없는 죽음은 피하심을 보게 되는데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시간에 맞추셔서 물러날 때와 대면할 때를 이 마가복음에서조차 수없이 보게 된다. 이런 주님을 배우면서 우리 또한 물러날 때와 희생할 때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우리 각자의 의지나 원함보다는 우리 주님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첫째에 둔다면 이런 분별이 주님처럼 가능할 것이라는 확신도 갖게 된다.

잠시 회당에서 물러나 갈릴리로 나가시지만 오히려 사람들의 입소문은 빨라서 이스라엘 사방에서 모여오고 어디서든지 더러운 귀신이 들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하게 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고백은 기뻐하셔도 귀신들의 고백은 오히려 침묵하라는 권고를 주심을 본다.



Ⅰ. 몰려오는 사람들(7~8)

종교지도자들이 없는 곳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귀신을 쫓아 내시거나 질병을 낫게 하시는 같은 권능으로 당시의 삐뚤어진 종교지도자들을 제압할 수도 있으셨지만 하나님의 아버지의 때를 따라 죽음에도 적절한 때를 기다리셨다.

이러한 실제적인 사실은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가룟 유다와 함께 주님을 잡으러 온 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이 파송한 무리에게 잡히시면서도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마26:54)시는 말씀을 보면 철저하게 예언의 말씀에 맞추어 삶을 사셨음을 볼 수 있다. 사실 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럴 수 있다면 신앙의 판도는 많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대부분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보다는 언제나 자기 중심의 삶을 삶으로 거룩함 보다는 오히려 부끄러운 삶을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7f) 회당에서 바다로 물러 가시는 이유를 마가는 침묵하고 있지만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는 지난 시간의 마지막 말씀과 이어지는 내용을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마12:14~15f) 이미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죽이려는 의향을 아셨기 때문에 바다로 물러가셨다는 이해를 할 수 있다.

주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치시지만 배척당하시고 그곳 사람들이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눅4:29~30)는 누가의 기록도 볼 수 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수없이 죽음의 위기를 당하셨지만 역시 하나님 아버지의 예정과 계획이 아니시면 그러한 위기를 벗어나셨다. 그러나 때가 찼을 때는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요18:4)하시자 잡으러 온 군인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하자 v8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고 스스로 나가 결박당하시는 모습은 오늘의 내용과는 다름을 본다.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7b) 어쩌면 주님께서는 때로는 조용한 시간을 갖고 싶으셨지만 그것이 낮에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밤에 주무시지 못하고 그런 시간을 가지셨음을 더러 볼 수 있다. 회당에서 나오셔서 갈릴리 바닷가로 가셨지만 이미 소문을 들은 갈릴리 부근의 많은 사람들이 쫓아와서 오히려 방해꾼들이 없는 가운데 말씀과 치료의 사역을 하심을 본다. 또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 가서 옷자락이라도 잡아 보려는 나름대로의 저들의 믿음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심도 볼 수 있다. 큰 무리가 따랐다고 하는 것으로 볼 때 그 수를 짐작할 수 있다.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8) 여기에 나타나는 지명들을 볼 때 그야말로 갈릴리의 동서남북에서 사람들이 몰려 들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마가는 각 지명들을 들어 기록하고 있지만 마태는 이 내용을 침묵하고 있고 누가는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눅6:17)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먼저는 “유대와 예루살렘”인데 이제는 주님 당시에 천시했던 갈릴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중심지가 됨을 볼 수 있다. 어떻게 “유대와 예루살렘”의 사람들이 갈릴리의 바닷가에까지 올라왔는지는 사실 당시의 상황에서는 짐작하기 어렵다. “이두매”는 갈릴리에서는 상당히 먼 곳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번도 가신 일이 없는 곳으로 에돔인들이 살던 지역으로 예루살렘 남서쪽 지역으로 이해되고 “요단강 건너편”은 베뢰아 지방을 비롯해서 데가볼리 지역을 이름이고 “두로와 시돈”은 갈릴리의 북서쪽의 지중해 연안으로 페니키아 지역을 말하고 있으므로 이런 여러 지명들을 거론하는 것은 벌써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이심을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몰랐지만 사방의 사람들이 알고 몰려 든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주님께서 비록 유대인의 회당에서는 죽임을 당할 위기를 당하였을 찌라도 사방의 사람들이 몰려 들어 은혜와 생명의 말씀은 물론 육신의 병고침을 받고자 했던 이스라엘이 천하게 여기는 이방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으신 것도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모형을 보는 것이었다.



Ⅱ. 작은 배위의 가르치심(9~10)

생명이 있는 그곳은 회당이 되었든 바닷가가 되었든 동산이 되었던 아니면 산 위가 되었던 군중들이 모여들고 찾아 드는 것을 보면 우리 주님은 역시 보통 사람과는 다른 생명을 가지신 분이 지금 우리가 읽어도 확신할 수 있다. 마가는 다만 상황만을 자세히 전달하고 있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이들에게 천국복음을 증거하셨을 것이고 그것을 위하여 군중을 바닷가에 앉히고 작은 배를 준비하도록 하셨을 것이다.

말씀이 끝나자 자신을 찾아 멀리서 부터 몰려온 불편한 많은 사람들을 고치신 것으로 눈에 보는 듯하다.

저는 이렇게 정리된 강대상 앞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지만 갈릴리 바다에 작은 배위에 서셔서 말씀을 전하시는 모습을 상상을 해보면 조금은 낭만적일 수도 있겠지만 그 많은 군중들이 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앰프시설도 없고 물론 가끔 부는 갈릴리 바다의 풍랑은 불지 못하도록 잠잠케 하셨겠지만 그 그림을 보는 듯하다.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9f) 군중들이 몰리고 휩쓸리면 사람들이 깔려 죽기도 하는 일은 그 때나 지금이나 더러 일어나는 일이지만 특히 주님께 모여든 군중들은 고침을 받기 위한 불편한 병자들이 많았음에도 한 사람도 상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볼 때도 우리 주님의 권능은 역시 생명의 능력이셨음을 확인케 한다. 멀리서 부터 몰려든 군중은 대부분 질병을 치료받으려는 목적이 첫째였을 것이다.

요한복음 5장의 베데스다 못 가에 질병을 치료받기 위해 누워있는 병자들을 상상할 수도 있다. 특히 주님께서 낫게 해 주셨던 중풍병자의 고백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요5:7) 한 것처럼 누구든지 낫고자 하는 육신적인 생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접근하고자 하는 것이 진리의 복음을 듣는 것보다는 병자들의 일반적인 자세였을 것이다. 그러한 마음까지 헤아리신 주님께서는 어떤 상황조차도 헤아리시고 대신에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9b)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위한 조치이기 보다는 군중들의 상함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우리 주님의 조치였던 것으로 이해되고 갈릴리 출신의 제자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이러한 지시에는 어려움 없이 신속히 응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이런 조치를 취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이유로 보인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당시의 의료의 취약성을 생각해 볼 때 대부분이 질병의 치료를 위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서로 먼저 주님께 접근하려 다가 불상사라도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물 위에 배를 등대함으로 더 이상 접근의 시도를 할 수 없을 것이고 전체를 향하여 말씀을 증거하는 것은 더욱 편리하고 쉬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10) 어떤 사람은 고치고 어떤 사람은 고치지 못하셨다면 과연 사람들이 이렇게 사방으로부터 많이 몰려 들었을까 생각해보면 역시 주님의 완벽한 치료의 능력이 소문에 소문을 들고 찾아왔을 것이고 먼 곳으로부터 온 만큼 목적을 달성하려는 저들의 육신적인 필요는 더 절실했을 것이다. 만병의 의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내리신 조치를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 주님의 2:17에서의 말씀처럼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하신 것처럼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몰려와서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사람마다 믿음은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런 신비를 바라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몰려왔음[ἐπιπίπτω, ~맹렬히 접근하다, 덮치다, 밀어닥치다]”이라는 표현이 이를 더욱 분명히 해 주고 있다.

대표적인 예를 본다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치료하러 가시던 예수 그리스도께 다가섰던 여인에게서 보는 사실이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마9:20~21; 막5:21~) 요즘도 거짓 능력이라도 있다고 선전하는 사람들에게는 성추행을 당하면서 까지도 가까이하려는 것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모습이다. 그런 모습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10b)는 마가의 기록 속에 잘 나타나고 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믿고 거듭난 사람들은 이 땅에서 비록 육신이 불편한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영원 속에서는 우리 주님과 같은 신령한 몸으로 더 이상 죄의 결과인 질병의 고통을 당하지 않고 생명을 풍성하게 누릴 것이다. 과거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하고 싶어도 불가능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역사에 다시 오셔서 새 예루살렘에 들어 갔을 때에는 우리 모두 따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는 약속을 누리게 될 것이다.

가장 흔한 눈물은 이별과 안타까움에서도 있어지지만 병으로 고생하는 이유가 가장 흔한 것이 사실이다. 과거 찬송가536:1이 곤한 인생이 쉴 곳은 없는가, 저 높은 산과 깊은 물 나 쉴 곳 아닌가; 2나 애타 바라는 참 안식 무엔가, 나 일생 편히 살다가 죽는 것 아니라; 3이 눈물 골짜기 저 너머 위에는, 끝없는 사랑만으로 쉴 곳이 있도다; 4내 주의 품 안에 참 안식 있으니, 그 사랑 길이 누리며 영원히 살리라. 우리 모두 믿음을 지키므로 이 생명의 평안을 넘치도록 누리는…



Ⅲ. 주님의 신분을 가장 분명히 아는 존재들(11~12)

우리 주님 육신으로 계실 때 질병의 치료만큼이나 흔한 것이 귀신들려 시달림을 받는 사람들의 치료였다. 어두움의 영들은 그 형용하는 표현만큼 깨끗한 영은 있을 수 없고 그런 이유에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평안과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곤고와 혼란과 안타까움을 끼칠 뿐이었다. 또 이 어둠의 영들은 자신이 들어가 살던 사람에게는 절대로 자유나 행복을 주지 못했다. 물론 이러한 마귀 사탄의 의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구속을 이루시므로 머리가 상하여 구속 이전만큼은 자신들의 원하는 대로 할 수 없게 된 것도 사실이다(창3:15).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곳에 어둠의 영들은 두려워했었고 우리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두려워 떨며 나가는 일들(1:23~25, 34)은 복음서들을 비롯하여 이 땅에 교회가 탄생한 후에 사도들에게서 도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역사였다. 당연히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b)는 분명한 약속이 주어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약속은 바울 사도도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는 완벽한 약속이 주어지고 있다.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11f) 영적이지 못한 종교지도자들은 어느 때 어디서도 우리 주님을 알아보지 못해서 대적하고 죽이려 했지만, 오히려 더러운 귀신들은 어느 곳에 주님이 가시든지 가장 먼저 알아보고 굴복하는 것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있었던 일들이다.

또, 당시에 영적인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이 어둠의 영들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러한 귀신을 쫓아 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22)는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억지를 쓰기도 했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들의 근본부터를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귀신들이 사정하고 긍휼을 구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주님께서는 귀신이나 마귀 사탄에게는 어떤 경우에도 사람과 같이 긍휼을 베풀지 않으셨다. 그들이 한 일을 너무나 잘 아시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간하는 간교한 존재들임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11b) 앞에서는 다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1:24b)라고만 했지만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확한 직함을 그대로 고백하고 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나중 빌립보에서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고 다닐 때 귀신들인 여종 하나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행16:17)는 보다 분명한 이해를 볼 수 있다. 이것은 물론 우리 주님께서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있어질 사도들의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예언의 성취이기도 하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16:17)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12)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행동가운데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가운데 한 가지이다. 오히려 종교 지도자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메시아를 귀신이 알아보는 것은 분명히 우리 주님께도 손해날 것이 없을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귀신의 고백은 결코 허락하지 않으심을 보는 것이다. 이런 귀신의 축출하시면서 조용할 것을 명령하셨던 주님은 질병의 치료를 받은 사람들에게도 선전하지 말 것을 오히려 명하시는 것은 치료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반적인 일이셨다. 우리 세상 사람들은 흔히 쓰는 속담이 ‘모로 가나 기어가나 서울만 가면 그만이다.’라는 표현이 있다. 목적을 위해서는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그야말로 비 도덕적인 표현 중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거룩하신 우리 주님은 절대적인 공의를 실천하셨고 또 그를 따르는 우리에게도 같은 삶을 명하신다.

자주하는 말이지만 귀신들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라거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불치의 병을 낫게 해 주셨다는 말을 사람들에게 퍼뜨리면 얼마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쉬울까 여겨지지만 요즘 우리 시대의 건전치 못한 사람들처럼 그런 것들을 절대로 기뻐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이런 소문이 종교 지도자들을 더 자극할 수 있음을 마음에 가지시고 주의를 시키실 뿐 아니라 합당치 않은 영광은 오히려 거절하셨던 것이다. 우리 시대의 종교지도자들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셨다.



진리를 증거하고 옳은 일을 하시는 우리 주님은 비록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셨지만 사람들은 동서남북에서 모여들어 진리를 듣고 치료를 받고자 하였다. 오늘도 진리를 행하므로 당하는 불이익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주실 것이다.

이런 비교될 수 없는 인기 속에서도 우리 주님은 사람들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시고 귀찮을 수 있는 사람들도 외면치 않으시고 한 사람도 서운케 하신 일을 볼 수 없다. 우리 역시 주님 같은 사랑으로 섬겨야 할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내용보다도 사람들로 영광을 얻을 수만 있다면 기뻐하고 자랑한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합당치 않은 영광은 확실히 거절하셨다. 미래의 영원한 영광을 기대하는 믿음으로 수 있다면 역시 이러한 주님을 본받는 섬김과 삶의 자세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