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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막3:1~6 2026-09-06
어느 것이 옳으냐?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우리 말이 있다. 믿음의 조상들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이나 이삭 그리고 야곱에서 다윗왕도 존경받는 인물들이었지만 모두 먼지나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성경에는 털어도 먼지가 나지 않는 사람이 있었고 그 먼지나는 것을 기대했다가 오히려 자신들의 완악함이 들어 나고 말았던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딱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파사(페르시아)국 전신이었던 메데국의 다니엘이었다.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고관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 이에 총리들과 고관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하였으나 아무 근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 그들이 이르되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서 근거를 찾지 못하면 그를 고발할 수 없으리라 하고”(단6:3~5)

어느 시대에나 권력의 욕망은 다른 사람들 위에 서려는 욕심으로 인하여 나보다 사람들로부터 더 존경받고 신뢰받는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을 자신의 아래에 끌어내리려는 권모술수가 있게 마련인 것은 사람들의 죄의 속성 때문이다.

다니엘의 지혜와 충성됨에 시기한 메데나라의 대신들은 다니엘을 모함하기 위하여 왕의 명예를 높이는 것처럼 한 악법을 제정하고 결국 다니엘을 몇일씩이나 굶주린 사자 굴에 던져 넣지만 사람들에게 보다 하나님께 충실한 다니엘을 위하여 하나님은 다니엘이 갇힌 하룻밤동안 사자들의 입을 막아 다니엘을 보호하시고 대신들의 모함을 알게 된 다리오 왕은 이 일을 모의한 대신들의 가족들까지 사자 굴에 던지게 하여 굶주린 사자들의 배를 채우게 하였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그런 상황과 전혀 다르지 않은 바리새인들을 본다. 날로 따라다니는 군중들이 많아지고 인기가 올라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기를 보면서 자신들의 거짓과 어리석음이 들통날까 봐 전전긍긍하는 저들은 오로지 주님의 허점을 찾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을 2천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보이는 것 같이 드러난다.

지난 시간과 같이 오늘도 여전히 안식일 문제인데 장소는 밀밭사이가 아닌 회당에서이다. 바리새인들은 회당에서 성경을 읽고 그것을 해설하는 것을 하시게 한 것이 아니라 한 손이 말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들과 함께 그곳에 있는 것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불쌍한 사람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산해드린 공회에 고발하기 위해 고치시는가 엿보고 있었고 그들의 완악함을 이미 아신 주님께서는 다시한번 안식일이 왜 주어졌는가를 이 장애자를 고치시면서 친히 가르치시지만 그들은 분명한 일깨움을 주심에도 불구하고 당시까지는 원수 시하던 헤롯당과 공모해서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없애려는 사악한 의도를 드러내고 만다.



Ⅰ. 오로지 고발하려는 사람들(1~2)

앞에서도 이미 봤던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당에 들어가시는 일은 생소한 일이 아니셨다(1:21, 39). 일반적으로는 안식일날 회당에 모여서 종교적행위를 위하여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자 들어가신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지만 지방마다 도시마다 회당이 있어서 예루살렘에는 1년 3회 절기에만 올라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회당에 모였던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 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눅4:16)라는 주님께서 자라셨던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신 모습을 봐도 이스라엘 속에서도 회당은 상당히 흔한 것으로 나타나고 우리 주님께서는 주로 가버나움을 비롯해서 갈릴리 주변의 회당들을 순회하셨던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1) 우리 주님께서는 전혀 계산 없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시기 위하여 회당에 들어 가셨지만 계속 시비를 걸어왔던 바리새인들은 이미 이 회당에서도 주님을 책잡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1:23~26에서 보는 대로 가버나움 회당에서도 봤던 대로 귀신들린 사람을 보시거나 질병에 고통 당하는 사람이면 그들을 고치시는 것은 일상이셨다. 이러한 우리 주님의 사랑과 긍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속성인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을 오히려 비판하고 항의하는 모습은 앞으로도 계속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1b) 정상적인 사람은 몰라도 지체가 부자유한 사람은 불편하고 힘겨운 것은 당연할 것이고 병행되는 눅6:6b에서는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주로 사용되는 오른 손은 더욱 요긴하기 때문에 이 사람이 그 때까지 얼마나 힘겹고 불편한 삶을 살고 있었는가를 예상에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우리 주님의 성격상 그런 불행한 사람을 절대로 그냥 두시는 일이 없으시기 때문에 반대자들을 그러한 주님의 행동을 통해서 고발하려고까지 벼르고 있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2) 고발하기 위해 벼르고 있는 사람들을 마가는 단순히 “사람들이” 라고 하였지만 v6ff에 보는 대로 “바리새인들”임을 확인할 수 있고 눅6:7ff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라고 하여 이들의 정체를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이 벼르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수밖에 없는 모습인 것은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2f) 안식일에 하나님을 찾고 신앙을 다잡기 위해서 모였으면 진리를 갈망하고 진리에 마음을 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원수인 마귀 사탄의 속성을 그대로 보이고 있다.

이들의 행태는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계12:9f, 10b)의 추종자들임에 틀림없는 모습이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6:10; 마13:15) 이것은 하나님의 의향이라기 보다는 당시에 완악한 백성들의 상태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2b) 우리 말에 ‘호시탐탐’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범이 눈을 부릅뜨고 먹이를 노려본다는 뜻으로,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하여 형세를 살피며 가만히 기회를 엿봄”을 의미한다.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꼬투리를 잡아서 고발할까 노리며 마음과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는 것을 보면 그들도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질병도 고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그때까지도 그런 사람을 본 바 없는 권능을 보고라도 그들의 마음을 돌려야만 했었다.



Ⅱ. 어느 것이 법을 완성시키는 것이냐(3~4)

어떻게 해서라도 꼬투리를 잡아 활동하실 수 없게 하려는 바리새인들과는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우시다. 바로 눈을 부릅뜨고 예수께서 고치시는가 눈을 고정하고 있는 그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노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회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조용히 입을 여시고 안식일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하여 질문형식으로 물으신다. 그리스의 철학자들조차도 즐겨 사용했던 문답법은 자신들의 입장이나 형편 생각을 점검하게 하는 중요한 교육 방법으로 일방적인 강연식보다는 좋은 교육 방법이다.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3) 이러한 주님의 자세는 바리새인들의 그것과는 정 반대의 모습이다. 드러나지 않게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몰래 잘못을 찾으려고 숨어서 기회를 보고 있는 것은 마치 사자가 몸을 숨기고 잡아먹을 짐승을 향해 다가가는 모습에 비교할 수 있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이미 그들의 마음을 간파하시고 오히려 그들의 방법과는 반대로 그들이 집중하는 그 사람을 한가운데 일으켜 세우신다. 아마도 바리새인들은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이제는 꼼짝없이 잡혔다’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물론 다른 방법으로 가르침을 주실 수도 있었지만 언제나 우리 주님은 정면승부로 당당하게 의를 행하셨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4) 이미 우리는 창2:2~3에서 안식일 정신을 나눈 바 있지만 이러한 질문 형식 속에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는 것인가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만 있다면 분명해짐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지금 바리새인들은 분명히 악을 행하려 함으로써 안식일의 정신을 완전히 거스르고 있는 것을 일깨워 주시고자 하는 주님의 사랑을 본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이 손 마른 사람을 보더라도 본래 하나님의 창조에서는 정상적이지 못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안식일에 해야 할 일이지 이 불편한 사람을 미끼로 주님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것은 분명히 악한 것이다. 선은 절대 선하신 하나님 성품(至高至善)이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과 생물들로 생명을 얻기를 바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을 본받지 못하고 오히려 마귀의 성품을 가진 저들에게 이러한 안식일 정신을 거스르고 있는 것을 깨우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질문 속에는 하나님과 사탄의 성품이 대조되고 있어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모든 것은 사람들로 살게 하기 위해서 주신 계명과 법들이지 결코 죽이고자 하는 법은 없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다만 어둠의 세력만이 이 선하신 하나님을 왜곡하고 법을 악용해서 살리려는 법을 이용하여 죽이려는 사악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도 OT정신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12:30~31) 하여 사랑임을 뒤에서 증거하신다.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을 당시의 입장에서 헤아려 보면 바리새인이나 종교지도자들은 OT의 금지 조항만을 부각시켜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힘겹고 괴롭게 할 뿐 아니라 이렇게 선을 행하여 사람을 살리려 하시는 주님까지 정죄하려고 나서는 것을 보면 이것은 저들의 잘못된 이해로서 과거의 율법과 그것을 다시 하나님의 뜻대로 되돌리시려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으로 대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옳으냐[ἔξεστι, 합법적이냐, 타당하냐]”는 단순히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것보다는 ‘법을 채우는 것이냐, 법을 완성시키는 것이냐? (lawful)’는 말이다. 이제 저들의 바른 판단의 기회를 주신다. 하나님께서 주신 법이라면 분명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구하는 일을 위하여 안식일 주실 뿐만 아니라 모든 율법을 주셨을 것임에도 그것을 악용하는 것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나타나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유혹하던 마귀와 전혀 다름이 없다. 그럼에도 너무나 당연한 이 말씀의 선택과 이해도 저들에게 허락하시고 있다. 너무나 분명하고 당연하신 이 말씀에 결국 그들은 “그들이 잠잠하거늘”라는 것은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법정신은 오늘 우리에게도 당연히 유효하다.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구하는 일을 위하여 주님의 날은 있는 것이고 신앙의 삶이 있는 것이다.



Ⅲ. 완악한 사람들(5~6)

그들이 적어도 종교지도자들만 아니었어도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탄식하시기까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그냥 어리석다는 백성 중의 한 사람이 이렇게 이해를 하고 있었다면 일깨워 주시고 또 그것을 듣는 사람도 자신의 생각을 고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모든 백성들의 신앙을 지도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라는 데 우리 주님의 안타까움이 있으셨다.

이런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백성들이 과연 안식일에 영혼을 회복하고 삶이 회복되는 것은 기대할 수조차 없는 이유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식하신 것이다. 이런 귀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오히려 더 완악해져서 주님을 대항하는 데서 이제는 죽여 없애려는 모의까지 함을 본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5f) 여기에서는 우리 주님의 정서를 마가가 표현할 수 있는 대로 묘사하고 있다. 먼저는 저들의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는데 “완악함[πώρωσις, 굳음, 완고]”은 돌처럼 굳어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변화의 여지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같이 쓰여진 표현이 10:5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모세에게 아내를 내버리도록 허락하신 이유를 말씀하시는 내용에서 볼 수 있고,

롬11:25에서는 같은 낱말이 ‘우둔함’으로 엡4:18에서는 ‘굳어짐’으로 각각 번역되고 있지만 개선의 여지가 없는 상태를 이름이다. “탄식하사[συλλυπέω, 함께 슬퍼하다, 함께 애통하다]”로 그들의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음을 탄식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것도 백성의 신앙적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의 이러한 상태를 보시고 분노하시며 둘러보신 것이다.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5b) 죄로 인하여 완악해져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는 안타까운 저들 가운데서 드디어 한쪽 손 마른 사람을 불러 세우시고 네 손을 내밀라 하시자 이 사람의 손은 즉시로 회복되었다. 앞에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물으셨던 주님은 이 불편한 사람을 본래의 온전한 상태로 회복하시는 안식일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 주님의 치료 사역은 단순히 “네 손을 내밀라!” 하신 것으로 완벽하게 회복을 시키셨다.

태초에 “있으라!”하신 말씀 한 마디로 창조의 사역을 이루신 것처럼 같은 능력의 말씀으로 이 가련한 한쪽 손 마른 사람을 명하셨고 바리새인들이야 어떠하든지 이 사람은 순종하여 무질서에서 창조로 질서를 회복했던 것처럼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된 것이다. 사실 바리새인들이 진정으로 봐야 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위였었다. 사실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 주님의 사랑의 역사인가! 그럼에도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의 능력이 일반 사람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역사임을 알면서도 이것을 은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이제 마지막까지 가고 마는 것이 오늘 마지막 말씀이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 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6) 자신들의 성결을 내세우면서 평상시에는 교류조차 하지 않았던 헤롯 당의 사람들과 의논하며 찾는 것이 예수님처럼 사람을 살리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올바른 율법정신을 일깨워 주고 자신들의 어리석은 무지를 일깨워 주시는 우리 주님을 죽일 방법을 찾게 되는 데까지 이른다.

사실적인 이런 일이 있었던 것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죄를 씌워 죽이려 하는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눅23:12)는 모습 속에서도 보게 된다. 이 땅에 교회가 탄생하고서도 이런 간교한 일은 있어지게 되는 데 헤롯이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를 죽이자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까지 죽이려고 합세하는 내용이 그것이다(행12:1~3)

본래 바리새인은 이스라엘의 우익으로 국수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헤롯을 “여우”(눅13:32)라고 하셨을 만큼 간교한 자들이었고 당시 헤롯 안티파스가 갈릴리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힘을 빌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간교함까지 보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 ‘목적을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을 모르는 일반 사람들은 생명이나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항상 자신들을 살피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종교지도자를에게 있어서는 있을 수 없는 모습이다.

그러나 양심이 화인 맞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나 행동이 어떤 것인가도 생각지 않는 모습이 여기서도 사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4:2) 한 것처럼 이미 걸러야 될 것을 걸러내지 못하는 신장이 투석을 받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안타까움처럼 내면적인 양심이 역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행동들이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사는 것 조차가 힘겹고 주변의 사람들조차도 힘들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불편함에도 남들을 더 의식하게 되고 그런 것들로 인하여 오히려 더 힘겨워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 생각 없이 행동이나 말을 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믿음의 사람이라면 언제나 빛가운데 행하는 당당함으로 진리를 행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유이다. 믿음생활 하는 것이나 예배로 모이는 경우에도 늘 나의 행동이 옳은 것인지 서로에게 생명이 되는 행동인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신 은혜를 헤아려 한사람이라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주변에 사람들에게 생명을 끼치는 삶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